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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할 길( M. 스캇 펙 지음,신승철

사랑

사랑을 간단히 정의하면 ‘자기 자신이나 또는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정신적 성장이 그 목적이다. 자기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이란 진화의 과정이다. 타인의 성장을 목적으로 할 때도 사랑의 행위는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진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사랑은 힘든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사랑하려는 욕구자체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행위로 표현되는 것 만큼만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에 따른 행동이며,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주관적으로는 참된 사랑의 경험으로서 대단히 강하게 경험되므로, 이것은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 남자든 여자든, 그 사람이 확실히 느끼는 것은 '나는 그 남자를 사랑한다' 또는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는 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첫 번째는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특별히 성적인 것과 관련된 애욕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둘째 문제는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는 경험의 특징인 황홀한 사랑의 느낌은 항상 지나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아기는 자기 자신이 장난감이나  부모와는 별개의 개체임을 구별하지 못한다. 아직 나와 너를 구별하지 못한다.  아기와 세계는 하나다. 거기에는 경계도 구분도 없다. 자기라는 정체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기는 점점 자신이 외부 세계와는 분리된 독자적인 존재임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배고플 때 마다 어머니가 젖을 먹여주진 않는다.  아기가 놀고 싶을 때 마다 어머니가 놀아주지도 않는다. 그러면 아기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항상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게 된다. 자아영역 발전은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또 성인기까지 계속되는 과정으로, 나중에 확대된 영역들은 신체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이 강하다. 아이는 자기 부모와 형제들이 마치 자기소유의 군대 있는 졸병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에게 함부로 명령을 내리고 부려먹으려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의지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도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에 빠지기를 열렬히 원할지라도,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못할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그런 경험을 원하지 않을 때에도 사랑한다는 느낌이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기도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참사랑이 아니라면, 자아영역의 일시적, 부분적인 붕괴 이외에 또 어떤 측면이 내재해 있을까? 그런데 이러한 자아경계의 붕괴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잘은 모르겠으나 나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짝을 구하려는 성적본능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다시말해 이것은 짝짓기를 통해 아이를 낳고, 이리하여 종족 보존을 이어가려는 것으로 사랑에 빠져 일시적인 자아영역의 붕괴를 일으키는 것은, 내부의 성적충동과 외부의 성적자극 상황에 대한 인간 본능의 전형젹인 반응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소 우스광스러울지 모르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유전자가 정신을 속이는 하나의 속임수로써 결국 결혼이란 덧에 걸리게 만든다.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는 까닭은 아마도 그 경험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란 환상 때문이다. 이 환상이란, 사랑이란 낭만적인 것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동화속의 이야기처럼 함께 행복하게 산다는 줄거리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이 우리에게 정해준 사람을 만나고 있으며, 그 짝지어 주는 것이 완전하기 때문에 서로 원하는 것을 영원히 만족시켜줄 수 있으므로, 완전한 합일 과 조화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거니와 서로 원하는 것을 채워 주지도 못하고, 알력이 생기며 사랑이라는 마력에 빠져 나오게 된다. 그때 우리는 짝을 잘못 만난 것으로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고 후회하게 된다. 사랑의 도취에 빠진 부부는 상대방에게 참사랑을 찾으려 하다 보니, 오히려 서로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들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시작임을 물랐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 밖에 있는 대상에 집중할 때, 우리는 심리적으로 대상을 자신과 일치시킨다. 취미는 만족을 주고 시간도 유익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정원 가꾸기를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람은 정원에 매료되어 거기에 자신을 일치시켜 정신을 집중해 왔다. 그는 정원을 참으로 사랑함으로써 정원을 자신의 내부에 심어 자신과 일치시키고,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자아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적 행동과 사랑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다른 현상이므로, 대개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별개의 것으로 발생한다. 성행위 그 자체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어떤 상대라도 오르가즘과 더불어 일어나는 자아영역의 붕괴는 똑같이 일어난다. 잠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시간과 공간을 망각한채 자아를 벗어나게 된다. 우리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순간일 뿐이다. 요약하자면 사랑에 빠져 성행위를 할 때 수반되는 자아영역의 일시적인 붕괴는 다른 사람과 함께 참사랑으로 갈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시발점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참사랑을 향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볼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랑에 빠지는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크고 신비로운 전체 구도의 일부분일 뿐이다. 사랑에 관계된 두 번째의 그릇된 개념은 의존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살고 싶지가 않아, 나는 우리 남편(아내,애인,친구 등) 없이는 살수가 없어, 나는 그를 무척 사랑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기생충 생활이지 사랑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그 사람에 기생하는 식객이다. 그것은 사랑이기보다 필요성 때문이다. 의존성이란 상대방이 자기를 열심히 돌봐준다는 확신 없이는 적절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거나, 자기가 완전하다는 느낌을 경험할수 없는 것이라 정의한다.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의존성을 나타낸다면, 이것은 병리현상으로 정신과적 질환이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의존성에 대한 욕구와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신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아기처럼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성숙할지라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충족시켜주는 어머니상이나 아버지상을 찾고 있고 또 그런 상을 가지고 싶어한다.

 

의존적 요구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사람들을 수동성 의존적 성격장애라고 부른다. 이러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사랑받기를 갈구하며,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나의 일부분이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은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들은 충만감이나 완전함을 느끼지 못하므로, 자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판단하려고 한다. 수동적 의존성이 있는 사람들은 급작스럽게 변한다. 그들은 누구에게 의존하든지 의존할 사람이 있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이 자아 정체감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에게 자아정체감을 줄 사람만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 아무런 상관없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는 얼핏보기에는 열렬하고 극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극히 얕다. 그들은 내적 공허감이 너무 커서 그 굶주림을 채우려는 요구 또한 크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다른 사람을 위해 뒤로 미루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수동적이라는 말을 의존적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한다. 그 이유는 이런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라면 그걸 성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확실히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이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첫 번째 생의 목적이 수동적으로 사랑를 받는 것이라면 당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수동적 의존자는 남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하는 일의 동기가 다른 사람이 자기와의 관계에 집착해서 자신만을 보호하고, 자신만을 사랑하도록 하려는데 있다는 것이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결혼생활에서는 부부사이의 역할 분담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아내는 청소하고 장보고 아이를 기르며 남편은 직업을 갖고 경제를 책임지고, 잔디를 깍거나 집안의 수리를 한다. 때로는 그들의 역할이 바뀌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부인이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래서 남편을 아내 곁에 쇠사설을 채워 묶어두려고 한다. 이제 그 남편은 가족을 위해 장보는 일도 모두 맡든가 아니면, 부인을 차에 태워 시장에 데리고 나녀야 한다. 이런 행동은 대체로 부부 모두의 의존적 욕구를 만족시키므로 이것을 해결해야할 문제로 보지 않는다. 부인은 남편이 퇴근후에 자기를 장보는 데까지 데려가고, 아이를 차로 데리러 다니도록 만들며 결국 다른 여자와 사귈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자기를 버리는 일이 없게 될 것이라고 안심한다. 그 남편도 자기가 데리고 다니지 않는한 아내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남자를 사귀지 못하여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수동적 의존 결혼생활이 오래 지속되고 안전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건전하거나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안심의 댓가는 구속이며, 그러한 결혼은 결국 서로의 성장을 지연시키거나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건전한 결혼은 오직 강하고 독립된 두 사람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사랑이 결핍되고 보살핌을 잘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내적 안정감을 갖지 못하고 성인기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나는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다'는 불완전한 느낌과 더불어 '세상은 예측할 수 없고,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결사적으로 달라붙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국은 자신이 집착했던 관계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포기해야 하는 낡은 관계도 끈덕지게 매달린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자녀들에게 조차 자신의 행복과 만족의 원천을 기대한다. 그 결과가 불만스럽거나 불행할 때 그들은 노골적으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한다. 사람들에게 중독되어 사람들을 빨아먹고 그렇게 빨아먹을 사람이 없을 때 사람들 대신 술을 탐닉하거나 마약 같은 약물에 중독 된다는게 수동적 의존성을 지닌 사람들이 공통적 결함이다. 요컨대 의존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끈질기게 상대방에게 애착하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의존성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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