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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영혼의 에너지 발전소(짐 로허,토니

정신적 몰입에너지, 영적인 몰입에너지

신체에너지는 감정적인 능력과 기능에 기본연료가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정신적인 능력을 최대화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성과와 몰입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집중력 부족이다. 최선의 성과를 올리기 위해 집중력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지엽적인 것 과 광범위한 것 사이에 초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유연하게 움직여야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도 목표하는 결과와 해결책을 찾으려고, 긍정적으로 노력하는 현실적인 낙관성을 살려주어야 한다. 부정적인 본능은 우리의 인식에 색깔을 덧씌우거나, 문제해결은 생각도 않고 방어적인 자세만을 고집하는 비관주의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매일 성과를 위협하는 도전적인 상황이 닥치는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손상을 가져오고, 비생산적으로 작용하기 쉽다. 우리가 부딪히는 도전적인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분명 현실적인 낙관성이다.

 

일반적으로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일만 하는 대신 규칙적으로 휴식을 취하고, 대낮에 잠깐 업무외의 활동을 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문제는 정신노동이 많은 양의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있다. 뇌의 무게는 우 리 몸전체의 겨우 2%를 차지하지만 몸전체 소비하는 산소의 25%를 사용한다. 따라서 정신적이니 회복이 불충분하면 판단착오, 창의성저하, 위험상황에 대한 대처능력 저하 등의 결과를 가져온다, 정신적인 회복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의식과 생각에 간간이 휴식을 주는 것이다.

 

학계의 연구결과를 종합해 볼 때 인간의 뇌는 근육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용하지 않으면 그 능력이 감퇴하고 활발하게 사용하면 아무리 노화되어도 그 능력이 향상된다. 폐나 신장은 오랫동안 사용하면 기능이 저하되지만, 뇌는 쓰면 쓸수록 더 정교해지기 때문이다. 쓰면 쓸수록 뇌의 기능은 능력이 향상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격하지 않더라도 운동을 해주면, 뇌의 인지능력이 향상된다. 운동을 하면 뇌로 가는 혈액과 산소량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또 운동을 하면 손상된 두뇌 세포를 치료하고 추가적인 손상을 예방하는 신경안정물질의 분비가 촉진된다.

 

우리 몸과 마찬가지로 두뇌 역시 쓰고 난 다음 회복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정보와 체험에 직면했을 때 뇌는, 그 정보와 체험을 재해석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휴식과 회복이 없으면 두뇌의 학습활동은 효과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거나 다른 기술을 습득하는 식의 도전적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근육은 운동 부족 상태가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불편함 때문에 또는 창피해서 나이가 들면, 도전을 시도하지 않고 포기하고 만다. 그 결과 정신능력감퇴가 계속 진행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가 쓸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우리의 신체적 능력에 비례한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모든 영역의 에너지를 사용하도록 동기부여하는 것을 큰 의미에서 보면, 대부분 영적인 이슈들이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말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개인적인 자기 이익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와의 유대감을 가르키는 단순하고 원리적인 용어일 뿐이다. 영적인 에너지의 주원료가 되는 영적 근육은 '용기와 확신'이다. 용기와 확신을 가질 때 개인적으로는 희생과 곤경을 치른다해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가치에 따라 살 수 있다. 그외 작은 영적 근육에는 열정과 헌신, 고결함과 정직함 등이 있다. 자신을 돌보는 일과 다른 이들에게 헌신하는 일의 균형을 잡을 때 영적인 에너지는 유지된다.

 

어떤 일은 그다지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으면서도 영적인 재충전이 일어나게 된다. 숲속을 걷는다거나, 마음을 움직이는 책을 읽는다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좋은 강연을 듣는다거나 하는 일이 여기에 속한다. 영적인 실천은 에너지 사용과 동시에 회복이 이루어진다. 영적인 능력을 확장시키려면 자기만족을 넘어선 무언가를 위해서 자신의 욕구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 자기만족을 넘어선 무언가를 위하여 자신의 욕구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욕구를 가장 긴급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관심을 남에게로 돌릴때 생존과 관련된 두려운 방어본능에 사로잡힌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나는 누가 돌봐 줄까? 하고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자기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큰 용기의 표현이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자기이익에만 몰입하면 궁극적으로 에너지만 고갈되고 성과를 저해할 뿐이다. 두려움과 자기이익에만 매달릴수록 긍정적인 행동에 쏟을 에너지는 더욱 줄어들게 된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 라는 책에서 니체의 유명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절실한 삶의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상항도 참아낼 수 있다."  프랭클은 니체의 이 한마디의 힘으로 주변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살아있다는 의식이나 삶의 목적 의식이나 목표가 없는 사람은 불행히도 삶을 끈질기게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런 이들은 이내 삶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에 대한 태도를 뿌리부터 바꾸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뿐만 아니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을 멈추고, 대신 인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생각해야만 한다. 매일매일 매시간 마다 인생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그저 말이나 생각에 머물러선 안된다. 올바른 행동과 태도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인생이 내게 던져준 상황에서 올바른 답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저마다 감당할 몫을 완수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삶이다.‘ 또 프랭클은  “정신적인 건강은 어느 정도의 긴장 속에서 얻어진다. 우리가 이미 성취한 것과 앞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사이의 간격, 지금의 '나'라는 존재와 앞으로 되어야만 하는 '나' 사이의 간격이 빚어내는 긴장 속에서 우리의 정신은 성장한다.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아무런 긴장도 없는 안락한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가치있는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