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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무석)

누구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먼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열등감이 왜 생기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에 대한 관점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나는 무능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현실이다. 열등감이 아니다. 열등감은 자신의 능력을 실제보다 더 낮게 보는 관점의 문제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 문제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부정적인 관점을 먼저 인식하고 바꾸는 것이 숙제다. 열등감은 자신의 외모나 능력이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그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심리다. 그러나 이런 열등감은 외적조건에 상관없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때 사라진다. 그래서 무조건적 경험이 필수다. 무조건적 경험이란 말 그대로 조건없이 인정하고 받아주는 경험이다. 좋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주는 대우다. 조건없이 나를 좋아해 주고 인정받는 경험이다. 이런 좋은 대우를 진심으로 받으면 나를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한 인간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경험을 하면 유년기에 잘못 형성된 자기인식이 변한다. 이런 경험은 치유적 경험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상대를 인정하고 사랑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외모나 사회적인 지위 능력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받아주고, 가치를 인정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정받기 위해서 잘난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다시 열등감에 빠지는 것이다. 외모도 지위도 성공도 다 일시적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내면적 자존감이다이런 자존감은 대개 유년기에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부모만이 무조건적으로 자식을 인정하고 받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아이는 자기가 한 인간으로서 사랑받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부모의 눈밖에 난 아이들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아이들, 우울한 부모의 아이들이나 너무나 바쁜 부모의 아이들은 무조건적인 자기 수용경험을 하지 못한다. 낮은 자존감이 대물림 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자신감이 없는 부모는 자녀를 자신감이 없는 아이로 기른다. 어머니가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능력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아이를 지나치게 걱정한다. 이런 걱정 때문에 과도한 간섭을 하게된다. 자기생각대로 아이를 몰고 가는 것이다. 아이를 과잉보호한다. 아이의 자율성을 허용해 주지 않는다. 

 

자존감은 자신감이다. 예컨대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아이는 자꾸 넘어지지만 스스로 일어나는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마침내 한걸음을 걸었을 때 아이는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이때 아이는 거의 유포리아(euporia, 행복과 도취) 수준의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성취감이 모여서 자신감이 된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성취감을 느끼고 성취감을 통해서 자신감이 생긴다.

아이를 믿어주고 자율적으로 놀게 해주는 엄마가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좋은 엄마다. 

 

병적인 자기애가 특권의식을 갖고 남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자기애라면, 건강한 자기애는 남의 인격도 존중하는 자기애다. 코허트 박사는 갓난 아이때 건강한 자기애가 생긴다고 했다. 간난아이는 자아상이 없다. 그래서 자기가 예쁜 아이인지, 미운아이인지 모른다. 다만 엄마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를 보고 비로소 자기를 확인한다. 엄마는 아이의 거울이다. 그래서 엄마를 반사 자기대상이라고 부른다. 엄마가 아이를 예뻐하고 좋아하면, 아이는 자기가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라는 자존감이 생긴다. 반대로 아이가 사랑받지 못하고 천대받으면,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이라는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 인간에게 진정 중요한 사람은 엄마라는 존재다. 엄마와 살면서 아이들은 수백 번도 넘게 긍정적 경험과 부정적 경험을 반복한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서 자존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아이를 천대하고 구박하는 엄마도 문제지만, 불안하고 조급한 엄마도 문제다. 조급한 엄마는 아이가 문제를 풀때까지 여유있게 기다려 주지 못한다. '아이구 답답해' 하고 비난하거나 대신해 버린다. 이건 과잉보호다. 이런 부모를 둔 아이는 스스로 문제를 풀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 자존감의 중요한 요소가 자기능력에 대한 자신감인데, 이런 아이는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 점점 의존적으로 된다. 문제에 부딪히면 엄마 눈치만 본다. 아이가 이러면 엄마는 더 조급해진다.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스스로 부딪혀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두려워 한다. 문제를 직면하기보다 회피를 배우고, 아버지가 대신 싸워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비열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한탄한다.

 

 자존감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자기에 대한 신뢰에서 온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본 경험에서 온다. 부모의 과잉보호는 아이가 자신감을 가질 기회를 박탈한다. 아이가 마땅히 당해야 할 고통리라면 당해야 한다. 안쓰럽고 위험해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면 아이를 무능력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성장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인정해야 한다. 위험에 노출되어 보지 않고는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없다. 위험은 인생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란 세상에 없다. 위험한 문제에 직면하고 괴로워하면서 아이는 성장한다. 원망하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열등감쪽 반응을 선택한 것은 당신 자신이다. 내 말을 기분 나쁘게 듣지 말기 바란다. 열등감을 치유할 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물론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열등감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의 탓하는 것만으로는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엄마의 위로를 듣고 아이는 만족한다. 이런 엄마의 위로는 아이의 심리내부에 저장된다. 정신분석에서 '내재화'라한다. 갓난 아이가 울때 엄마들은 아이를 안고 등을 다독거려준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곤한 잠에 빠진다. 아이가 배가 아파서 울면 엄마들은 약손으로 배를 쓰다듬어 준다. 또한 아이가 앓아누우면 엄마는 밤새워 아이를 간호해 준다. 이런 엄마의 위로는 내재화 된다.  인간은 누구나 공사중이다. 그리고 죽을 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죽는 그 순간은 공사중이던 일을 놓고 가는 순간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다가 갈 것이고, 사업하던 사람은 사업을 하다가 갈 것이다. 우리가 하던 일은 미완성인 채로 남겨질 것이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매일매일 일상을 살 뿐이다. 그래서 세상은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불완전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