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숙한 사람들은 아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개성을 짓밟는 경향이 있다.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는 창발創發적인 아이는 자발적이고 또래와의 접촉요구에 휘둘리지 않으며, 이례적이고 변칙적이고 좀 별난 것처럼 보인다.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이 그런 아이를 지칭할 때 쓰는 단어들은 괴짜, 멍청이, 지진아, 변종, 얼간이처럼 매우 비판적이다. 아이의 또래지향성이 강할수록 더 강한 분노를 보이고 공격을 퍼붓는다. 또래애착은 개성을 압박한다. 스스로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자기만의 기호를 갖고, 자신만이 의견을 이야기하고 자기 판단을 표현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아이를 또래지향적인 관계에서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아이들이 점점 더 성숙하기에 불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또래지향적인 세상은 아이의 성숙 과정에 더욱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래지향적인 세상에서 성숙과 개별화는 애착의 적으로 취급당한다. 독특함과 개성은 또래문화에서는 방해물이 된다. 아이들과의 애착을 돈독히 함으로써 개별화의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 부모로써 우리의 임무이다. 따뜻함과 친밀감을 얻기 위해 아이가 자기 개성을 희생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이들끼리는 서로 줄 수 없는 것을 아이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깃든 수용 속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이다.
가족 구성원들을 공격하는 것은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로 인해 부모와 형제들이 상처 입는다.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의 감정적 적개심은 상대를 지치게 하고 관계를 소원하게 하고 상처를 입힌다. 많은 어른들은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잘 모르는 청소년집단과 맞서는 것을 주저한다. 십대들이 또래들 사이에 가하는 폭력적인 잔학행위들도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한다. 하지만 우울한 통계치와 잔학한 폭력행위에 관한 언론의 기사들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아이들의 공격성의 영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공격성과 폭력성의 여파에 관한 가장 분명한 징후는 기사 표제에 있는 게 아니라 또래 문화 속에 있다. 청소년 범죄들은 빙산의 일각을 뿐이다. 한 보고서에서 연구자들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왕따와 공격성을 수동적으로 응원하거나 적극적으로 부추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폭력의 문화와 심리가 너무나도 깊이 배어 있어서 또래들은 대개 피해자들보다는 왕따를 주도하는 아이들을 존중하고 좋아했다.
공격성과 폭력은 그 시초부터 인류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공격성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해결하기 힘든 인간문제들 중 하나이다. 또래지향성은 공격성의 불을 강력히 지피고, 공격성이 폭력으로 표출되게끔 조장한다. 사람을 공격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좌절감이다. 좌절감은 공격성의 원료이다. 좌절감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이 없을 때에 공격성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좌절감은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느끼는 정서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일수록 그것은 뜻대로 돼야 하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만큼 더 감정적으로 동요된다. 좌절감을 유발하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이들에게 좌절감의 최대 원천은 뜻대로 되지 않는 애착이다. 즉 혼자 버려진 느낌, 부모의 대화 부재, 무시 등이다. 또래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좌절감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부재중 전화에 대한 응답전화를 받지 못했거나 간과되거나 혹은 무시당하거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 비난당할 때마다 좌절한다. 또래관계에는 안전한 근거지도 스트레스에 대한 방패도 관대한 사랑도 기댈 수 있는 헌신도 마음속 깊이 알아주는 느낌도 없다. 거부나 배척이라도 당하면 좌절감은 극도에 달한다. 부모가 강요하는 제한과 구속은 공격적인 언어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행동의 폭발적인 분출을 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좌절감은 반드시 공격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좌절감에 대한 건강한 대응은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아니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상황에 자신이 순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능력 밖의 많은 좌절감을 맛본다. 우리는 시간을 바꿀 수 없고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고 이미 한 일을 돌이킬 수도 없다.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좋은 경험을 영원히 지속 시킬 수도 없고, 현실을 뒤집을 수도 없고 되지 않는 일을 되게 만들 수도 없고, 그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을 내 뜻에 맞게 움직이도록 할 수도 없다. 이 모든 피할 수 없는 좌절감 중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스스로에게 안정감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아직 준비되지도 않은 도전 과제에 직면하게 해서는 안된다. 아이들은 사태를 변화시키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애착을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아이는 무자비한 애착, 좌절 속에서 지속적인 위안을 얻을 수 없고 이런 불가능의 벽을 향해 끊임없이 부딪힘으로써 좌절감만 더해간다.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에 부딪히며 느끼는 좌절감을 결국 부질없음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이 좌절감에서 부질없음에 이르는 역학은 걸음마 단계의 유아들에게서 가장 뚜렷이 볼 수 있다. 유아는 대개 부모가 타당한 이유 때문에 들어주려 하지 않는 혹은 들어줄 수 없는 욕구들을 한다. 사태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하다가 실패한 유아는 부질없음의 눈물을 흘리는 단계로 넘어간다. 이런 반응은 바람직하다. 에너지가 사태를 변화시키려는 쪽에서 포기하는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일단 부질없는 느낌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면 아이는 안정된다. 좌절감이 이렇게 변환되지 않으면 아이는 바라던 것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순응(받아들임)은 대뇌피질의 정서 담당기관인 변연계가 관장하는 매우 무의식적이고 정서적인 과정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순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파도처럼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부질없음의 정서를 느낌으로써 그런 사실에 길들여져야 한다. 오직 부질없음의 정서가 깊이 새겨지고 누군가와의 평생, 영원히, 신체적, 감정적 접촉을 유지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에만 눈물이 터져 나오고 순응이 시작된다. 부질없음의 가장 공통된 느낌은 슬픔, 실망, 비탄이다. 부질없음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또래지향적인 아이에게 부질없음의 느낌은 가장 먼저 억눌러야 하는 감정이다. 초연함의 문화에서 부질없음의 눈물은 치욕이다. 갈수록 많은 아이들이 또래들과의 관계에서 부질없음과 부딪히지만, 그 감정이 스며들기에는 너무 굳어진 나머지 결국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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