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으로 인간의 공격충동을 억제하는 것은 남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의향,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보복에 대한 두려움, 결과에 대한 걱정들이다. 또한 공격성을 가라앉히는 것은 우리가 애착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과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자기조절의 욕망들이다. 하지만 공격의 충동이 일어났을 때 자기조절 의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공격의 충동이 작동되면 부적절한 행동으로 분출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아이가 또래에게서 애착을 형성한 경우 실질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애착대상의 관심밖에 없는 다른 또래들도 공격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공격성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험담하기, 조롱하기, 무시하기, 헐뜯기, 정서적 적대감, 말대꾸하기, 적대하기, 경멸하기 등이 그것이다.
많은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두려움의 느낌을 잃어버린다. 이들은 더 이상 놀라움이나 초조함,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래 지향성이 강해질수록 대담하고 조심성 없는 아이가 되기 쉽다. 술을 마시면 용기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두려움이 사라진 것뿐이다. 하지만 뇌는 알코올이나 다른 약물의 보조가 전혀 없어도 우리의 경보감각을 완전히 마비시킬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마비시키는 것은 많은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의 목표이다. 아이들의 또래지향성이 강해질수록 아이들은 더욱 더 공격성을 드러내기 쉬워지고, 우리의 훈육에 그만큼 더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더 공격적으로 변할수록 우리는 더욱 더 아이들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이고, 여전히 채워지지 못한 결핍은 또래들에 의해 채워질 것이다. 그런 상황 아래서 우리 부모들은 자동적으로 밑바탕에 깔린 문제보다는 공격성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 문제가 아무리 혼란스럽고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공격성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된다. 사태를 회복시키는 유일한 희망은 그들의 애착을 되찾는 것이다.
아동발달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중등학교 아이들의 약 4분의 1이 심각하고 만성적인 왕따의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이다. 왕따는 위협, 조롱, 험담, 때리기, 야유, 조소 등을 포함하는 행위다. 요크대학교의 연구자들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교내폭력이 일어나는 현장 53건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분석했는데, 이중 절반이 넘는 경우가 아이들이 피해자를 조소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방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구경하는 아이들 4분의 1은 피해자를 괴롭히는 일에 동참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더 이상 부모에게 기대하지 않을 때 본능과 충동의 노예로 전락한다. 지배하려는 본능은 적절한 애착을 상실했을 때 일어난다. 학교에서 만연한 학교폭력에서 가해행동이 도덕성 상실 때문이라거나, 학대 또는 훈육의 부재, 대중매체의 폭력성에 노출되었기 때문이 발생한다는 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어떤 측면은 그런 원인들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애착 형성의 실패 때문이다.
왜 어긋난 애착이 아이로 하여금 왕따 가해자 혹은 드물게는 피해자가 되기 쉽게 만드는 것일까? 애착의 중요한 역할은 성숙한 어른이 미성숙한 아이를 보살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애착관계든 첫째 임무는 효과적인 위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아이는 의존하는 역할, 어른은 지배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지배적이거나 의존적인 역할을 취하는 본능은 어떤 애착관계에서든 작용한다. 의존적인 쪽은 상대편에게 보살핌을 바라며 존경하는 한편, 지배적인 쪽은 상대편의 안녕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다. 그런데 의존하는 쪽도 지배하는 쪽도 모두가 아이들일 때 그 결과는 어떨까? 지배하려는 아이들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지배력을 행사하는 한편, 상대 아이들은 자신을 보살필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복종한다. 서로 대등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미성숙한 아이들에게서 지배와 복종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위계를 강요하게 된다. 지배하는 아이들 중에는 실제로 어미닭이 되어 더 어린 아이들을 지키고, 결핍된 아이들을 보살피고, 상처입기 쉬운 자를 방어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서열에서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을 책임감 없이 지배하게 될 때는 괴롭히는 사람이 된다. 다른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보다는 짓밟고 예민함을 악용하고 약점을 놀리고 장애를 조롱한다.
왕따 가해자들은 자신의 약점과 실수는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초연함이 최고의 미덕이다. 지배자는 상대에게 신경을 써야 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무엇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혹은 누군가에게 정서적으로 공功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부당함과 잘못의 감정을 느낄 줄 아는 것이다. ‘상관 안해’와 ‘내 잘못이 아니야’ 같은 무신경, 무책임한 말은 왕따 가해자가 즐겨 외우는 주문이다. 부모나 양육자가 아이 위에 군림하며 아이의 존엄성을 짓밟고 상처를 줌으로써 아이를 책임지고 있는 자신의 지위를 남용했을 때, 아이가 적대적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는 자율성을 얻으려 애쓰는 만큼, 강하고 현명한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하기를 갈망한다. 현대에 부모들이 이러한 부모역할이나 관습에 대해 평가 절하함으로써 부모로서 애착의 지배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아이와의 관계에 걸맞는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면, 아이들의 뇌는 자연적으로 지배적인 양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들은 또래들을 왕따시키는 가해자가 된다.
왕따 가해자들은 다른 아이들을 바보, 멍청이로 보이게 만들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일을 즐긴다. 왕따 가해자들은 다른 누군가가 자기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두려움을 일으킴으로써 우위를 차지하고자 한다. 그들은 어른들과의 애착상실과 또래들과의 빈곤한 애착으로 인한 좌절감으로 가득 차 있다. 힘으로 강요한 복종은 충분한 만족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왕따 가해자의 애착에 대한 허기와 좌절감은 더욱 강해질 뿐이다.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 또는 불복종말고도 왕따를 유발시키는 주요한 요인은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핍되어 있고, 뭔가를 갈망하고, 무언가에 열심히 하는 것을 드러내는 아이는 목표물이 된다. 아이들은 두려움을 숨기는 법을 배워야하고 놀랐음을 드러내서도 안 되며 자신의 상처를 부인해야 한다. 자연에서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면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상처 입은 곳은 부드럽게 다뤄야 한다. 하지만 왕따 가해자의 눈에는 그런 노골적 연약함은 황소에게 흔드는 붉은 깃발과 같이 공격의 충동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자신들의 무의식적인 본능을 따르는 것일 뿐이지만, 피해자에게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애착을 향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접근한다. 그는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면서 욕구와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왕따 가해자는 어떤 식으로 애착을 형성할까? 그는 좋아하는 아이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다른 아이들과 그 아이를 멀어지게 한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위해 다른 아이들을 멀리하고, 저쪽과 관계를 맺기 위해 이쪽에다 경멸을 쏟아 붓고 어떤 이들을 외면하고 배척한다. 왕따를 당한 아이들이 어른들과의 강한 애착으로 보호받지 못한다면, 정서적으로 상처받고 감정 활동의 폐쇄나 우울증 혹은 그보다 심한 상태가 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또래 지향적인 아이들이 둘 이상 모이면 그들은 다른 아이들을 배척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애착을 뒤에서 형성한다.
왕따 가해자의 공격적 행동이 그 아이의 진짜 성격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왕따 가해자를 구하려면 먼저 그 아이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애착의 위계 속으로 재통합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그 아이의 정서적 욕구를 돌보는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는 어른들과 애착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왕따 가해자의 거친 외향 아래는 깊이 상처받고 철저히 혼자인 아이가 있다. 그의 단단한 깝질은 진심으로 보살펴주는 어른이 있을 때 저절로 녹아내린다. 모든 왕따 시키기의 특성들은 두 개의 강력한 역학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대체된 애착과 취약성으로부터의 필사적인 도피다. 이 두 역학이 결합했을 때의 산물이 왕따 가해자이다. 거칠고 비열하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고 헐뜯고 놀리고 위협하고 협박하는 것이다. 왕따 가해자는 하찮은 일에 민감하고 쉽게 흥분하고, 두려움을 모르고 눈물이 없고 결점과 취약성을 희생물로 삼는다. 우리는 아이들끼리 어울리게 함으로써 평등한 관계를 키울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다. 우리는 파리대왕과 같은 상황의 무대가 준비된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우리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고 학교는 일일 고아원으로 만들고 있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도 역시 그들을 책임 있는 어른들에게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처받기 쉬운 취약성을 느끼게 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 눈물을 흘리게 해야 한다. 또래지향성이 강해서 어른에게 기대지 못하는 아이들이 가장 위험하다. 피해자들은 너무 또래지향성이 강해서 부모에게 사태를 이야기할 수 없고, 취약성에 대한 방어막이 너무 강해 자신들이 겪었던 정신적 외상에 대해 눈물을 흘릴 수 없다. 그들의 좌절감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도달했다. 이런 아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는 같은 특징을 갖는다. 양쪽 다 보살피는 어른과의 적절한 애착이 부족하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기댈 수 있고 그래서 고민거리에 대처할 수 있고, 적절한 부질없음의 감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한, 아무리 불행한 일을 겪는다 해도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위험한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아이 손을 놓지 마라 (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 지음, 이승희 옮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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