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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손을 놓지 마라 (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 지음, 이승희 옮김)

배우려 들지 않는 학생들

 

 

요즘 아이들은 능력은 있지만 동기가 없고 영리하지만 지루해 한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교육은 한 두 세대 전보다 훨씬 더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 되었다. 오늘날 많은 교사들이 증언하듯이 가르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지고, 학생들은 옛날보다 배움을 존중하거나 수용하지 않는다. 최근 많은 학교들이 읽고 쓰기 실력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학생들의 읽기 능력은 저하되는 것 같다. 사실 오늘날 교사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고, 교과과정은 최고로 발달했고, 기술은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하다. 무엇이 변했을까? 비교적 최근까지도 교사들은 문화와 사회가 낳은 아이들의 강한 어른 지향성의 덕을 볼 수 있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났다.

 

어떤 학생의 학습능력은 배움과 이해에 대한 욕구,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관심,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 영향 받고 교정 받는 일에 대한 개방성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의 산물이다. 또한 교사와의 결합,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 기꺼이 도움을 부탁하는 마음, 기대에 부합하고 성취하려는 열망, 특히 일에 대한 성향이 작용한다. 이런 모든 요소들은 애착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애착의 영향을 받는다. 아이의 학습능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질엔 네 가지가 있다. 타고난 호기심, 통합적인 마음, 교정敎正을 통해 유익함을 얻는 능력, 교사와의 관계이다. 건강한 애착은 이 네 가지 자질을 향상시키지만 또래지향성은 이 모든 것을 갉아 먹는다.

 

아이를 배움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보다 세계에 대한 열린 호기심이다. 아이는 답을 얻기 전까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고, 진리를 발견하기 전까지 탐구해야 하고 확실한 결론을 얻기 전까지 실험해야 한다. 창발적創發的(자발적으로 무엇이 떠오르는 현상)인 아이들은 남달리 관심을 두는 분야가 있고 본질적으로 배움에 대한 동기가 강하다. 그들은 통찰을 획득하거나 세상이치를 이해하는 데서 큰 만족을 얻는다. 그들은 배움에 대해 자기만의 목표를 만든다. 독창적인 것을 좋아하고 힘든 일을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창발적인 학생들은 책임지는 일을 즐거워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는다. 호기심의 가치를 알고 질문을 유도하고, 아이의 관심을 우선시하는 교사에게 창발적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큰 기쁨이다. 아이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고 흥미를 자극하고 열정에 불을 붙이고, 자신의 학습을 스스로 하게끔 만드는 교사가 가장 좋은 선생이다. 아이들은 안전하고 튼튼한 애착에서 에너지가 생겨날 때까지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통합적 마음이란 상반되는 충동이나 생각을 처리할 수 있는 마음이다. 잘 발달된 통합적인 능력을 지닌 아이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생각은 결석에 대한 염려를 일으키고,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지각에 대한 걱정을 불러낸다. 선생님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싫은 마음은 잘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스리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싫은 마음은 불복종에 따르는 불쾌한 결과를 떠올리며 가라앉힌다. 아이가 어른이 생각하는 바를 신경 쓰고 그들의 기대를 신경 쓰고 그들의 화를 돋우지 않거나 멀리하지 않은 일에 신경 쓰려면, 충분히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배움에 정서적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하고, 무언가를 생각해내는 일에 흥미를 느껴야 한다. 무심한 태도는 배움을 마비시키고 학습능력을 파괴한다.

 

거리감각은 두 개의 눈을 필요로 하듯이 깊이 있는 학습은 적어도 두 개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눈이 하나뿐이면 깊이나 원근감이 없고 종합하거나 걸러내지도 못하고, 보다 깊은 의미와 진리에 대한 통찰력도 없다. 맥락을 고려하지 못하고 인물과 배경을 구별하지 못한다. 우리 교수법과 교과과정은 아이들이 당연히 통합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한다. 오늘날 우리가 교실에서 부딪히는 많은 학생들에게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통합적인 지성이 결여된 아이들은 이런 형식의 가르침으로는 다룰 수 없으므로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순응을 통해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배운다. 새로운 과제를 시도하고 실수를 하고 장애에 부딪히고 일을 망친다. 그러고 나서 적절한 결론을 도출하거나 결론을 도출해줄 누군가에 의지한다. 실패는 배움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고 교정은 가르침의 주요 도구다. 실수에서 배우려면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인식하고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잘못을 통해 발전하려면 책임을 져야하고 도움, 조언, 정정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취약성에 대해 너무 방어적이어서, 실수를 인정하거나 실패에 책임지지 못한다. 자신의 취약성에 대해 방어적인 아이들의 뇌는 그런 것을 느끼게 하는 모든 일을 무시하게 만든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뇌가 이해하려면, 좌절감이 부질없음의 느낌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부질없음을 뇌리에 새기는 것은 순응적(수용적) 배움의 정수이다.

 

우리의 감정이 너무 굳어서 성공하지 못한 어떤 일에 대한 슬픔이나 실망감을 용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시행착오 통해 배우는 게 아니라 좌절감을 분출하는 반응만 하게 된다. 습관은 바뀌지 않고 학습전략도 바뀌지 않으면 장애는 극복되지 않는다. 이런 양식에 갇힌 아이들은 실패나 교정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갇힌다.

 

애착은 배움의 가장 강력한 과정이다. 애착은 호기심이 부족하거나 교정을 통해 배우는 능력이 없다고 할지라도, 학업을 해내기에 충분한 조건이 된다. 순응적이고 창발적이고 통합적인 기능이 부족한 학생들은 항상 있어왔다. 문제는 아이들이 애착에 기반을 둔 배움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어른들보다 또래들의 애착에 매달릴 때 발생한다.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에게 역사, 문화, 사회의 현상/모순, 혹은 자연의 신비는 전혀 흥미 없는 일이다. 과학이 친구를 사귀는 일에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생물학이 또래들과의 일을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애착과 관련된 일에 수학, 문학, 사회공부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을 중시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일이다.

 

애착은 아이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존중을 이끌어내고 순응하게 만듦으로써 부모와 교사에게 도움이 된다. 어른지향적인 아이들은 어른을 나침반 방위로 삼아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찾는다. 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현대의 계몽된 교수접근법이 무질서, 무례, 불복종이 씨를 뿌리고 있는 실패한 접근법이라고 주장한다. 또 많은 이들은 권위적이고 구조적인 접근법을 지지하기도 한다. 이런 전통적인 교육제도도 상대적으로 어른 애착이 아직도 남아있는 사회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 사회의 어른들이 정당성과 힘을 갖는다. 하지만 이런 교육제도 역시 전체적인 위계의 애착이 무너지면서 약점을 드러낸다. 더 이상 아이교육을 학교 교육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부모가 아이 교육에 집중할 여유도 없다. 사회가 문화보다 경제에 가치를 두기 시작하면서 애착 마을은 해체되기 시작했고애착 형성의 몰락은 피할 수 없다.

 

실제로 아이들은 또래에게서 가장 잘 배운다. 또래들이 어른들보다 모방하기 쉽기 때문이고 아이들이 그만큼 또래 지향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배우는 것은 생각의 가치, 개성의 중요성, 자연의 신비, 과학의 비밀, 인간 존재의 주제, 역사의 교훈, 수학의 논리가 아니다. 왜 인간이 특별한지,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지, 왜 법이 필요한지, 품위를 갖춘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이 또래들에게서 배우는 것은 또래들처럼 말하는 법, 또래들처럼 걷는 법, 또래들처럼 입는 법, 또래들처럼 행동하는 법, 또래들처럼 보이는 법이다. 요컨대 그들이 배우는 것은 또래들과 같아지고 모방하는 방법뿐이다.

 

교사라는 말의 어원은 지도자이다. 특히 아이들을 지도하는 사람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따를 때에만 이끌 수 있고, 학생들은 자신이 애착을 형성한 사람들만 따른다. 학생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이 교사로서 직무를 다하는 일이다. 학생들의 마음을 열려면 우리는 먼저 그들의 애정을 얻어야 한다. 교육에 대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이런 특수화와 전문가의 시대에 우리는 가르치는 일이 교사들의 유일한 임무라곤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배움을 촉진하고 또래지향성을 방지하는 애착의 역할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아이들의 교육을 부모와 교사, 아이들과 접촉하는 모든 어른들이 똑같이 나누어야 할 사회적 책임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