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 성장과 성인으로서의 생리적 기능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저절로 심리적, 정서적 성숙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세계는 취학 전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동증후군이 그 연령을 훨씬 지난 많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십대와 어른들에게서 조차 그런 증후군이 발견되기도 한다. 많은 어른들이 성숙에 도달하지 못했다. 자신의 정서적 욕구를 가꿀 줄 알고 다른 이들의 욕구를 존중할 줄 알며,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자신이 되는 법을 완전히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성숙이 일반적으로 자리 잡지 못하는 것에는 또래지향성이 주된 원인이다.
미성숙과 또래지향성은 서로 협력관계이다. 아이의 일생에서 또래지향성이 일찍 시작될수록, 또래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영원히 철없는 어린애로 살아갈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가 성숙해짐에 따라 우리 뇌는 여러 가지를 잘 조화시킬 줄 알게 된다.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다양한 인식, 감각, 생각, 느낌, 충동을 수용할 줄 아는 사고능력을 발달시킨다. 이것이 내가 앞에서 취학 전 아동증후군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통합적 기능’이라고 부르는 능력이다. 발달 단계에서 이 지점에 도달하면 충동성이나 자기중심주의 같은 어린아이의 속성은 사라지고, 훨씬 균형 잡힌 인격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말이나 책으로 이것을 가르칠 수는 없다. 통합적 기능은 성숙하면서 발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아이는 어떻게 성숙하는가? 1950년대 과학자들이 성숙의 과정에는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별견함으로써, 발달이론에서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일종의 ‘분리’ 혹은 차별화가 일어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분리된 요소들이 끊임없이 ‘통합’한다. 이런 순서는 유기체가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든 심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든, 그 존재가 단세포이든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복합적 실체이든 똑같이 적용된다. 발달하는 뇌의 영역은 처음에는 생리적, 물리적으로 서로 독립적으로 기능하다가 점차 통합된다. 심리적인 성숙은 의식의 요소를 즉 생각, 느낌, 충동, 가치, 기호, 관심, 의도, 열망을 구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의식의 요소가 혼합되고 알맞게 조절된 경험과 표현을 창출할 수 있게 되기 전에 구별의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관계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먼저 개성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존재가 되어야 성숙해질 수 있다. 차별화 과정을 잘 거치면 그만큼 자기감각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일 수가 있다. 그들의 느낌과 생각이 혼합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한 번에 하나의 감정이나 충동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감정이든 내부에서 일어나는 대로 즉각적으로 행동한다. 내적으로 삭일 수 있는 감정들이었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모른다. 이런 무능력이 아이들을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반동적이고 참을성 없고 조급하게 만드는 것이다. 좌절이 보살핌과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용서할 줄 모른다. 좌절이 공포 혹은 애착과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쉽게 화를 낸다. 요컨대 아이들에게는 성숙이 부족하다.
부모와 교사들은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철 좀 들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명령한다고 아이들이 성숙해지는 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성숙, 그 자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미성숙한 아이들을 다룰 때 행동의 모범을 보여주고 허용이 가능한 행동의 경계를 그어주고,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이야기해줄 필요가 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응일 수 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개별화의 과정을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행동을 지시하고 강요할 수 있는 있지만 성숙은 마음과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부모로서 도전할 만한 진정한 과제는 아이가 그저 외양만 어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 참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우린 어떻게 아이들의 성숙을 도울 수 있을까? 성숙의 비밀도 애착에서 시작된다. 식물이 성장을 하려면 먼저 뿌리가 내려야하고, 그리고 나서야 열매를 맺는 것이 가능해진다. 아이들은 애착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서야, 분리된 존재로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궁극적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다.
세상은 부모가 자식을 하나하나 다 가르치고 만들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애정을 듬뿍 주기만 하면,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독립성을 키우려면 먼저 의존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개별화를 위해서는 먼저 소속감과 일체감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아이가 독립하는 것을 도우려면 아이와의 친밀감을 유지해야 한다. 의존과 애착이 독립과 진정한 분리를 양성한다. 애착이 성숙을 낳는다. 생물학적으로 자궁이 신체적인 의미에서 분리된 존재를 낳듯이, 애착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분리된 존재를 낳는다. 아이의 탄생 후, 발달단계상 필요한 것은 아이에게 정서적 애착의 자궁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거기서 아이는 애착충동에 지배받지 않고 자기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적인 개인으로 다시 한번 태어난다.
인간은 절대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욕구를 무시한 채 성장할 수 없다. 독립적인 개체가 되기 위해 아동기 전체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부모의 도움으로 아동기를 잘 보내야 비로소 진짜 성인이 될 수 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아동기가 중요하고 부모가 가장 필요한 시기다. 어떤 뛰어난 외부 전문가라도 이것을 대신 해줄 수는 없다.
아이들은 애착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의 에너지가 진정한 독립적인 개인이 되는 과정으로 전환된다. 그랬을 때에만 아이는 마음껏 앞으로 나아가고 정서적으로 자라난다. 애착에 대한 굶주림은 신체적 굶주림과 매우 유사하다. 애착에 대한 욕구가 없어지지 않듯이 음식에 대한 욕구는 절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의 애착 허기를 충족시키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부모로서의 의무를 이처럼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보살핌이란 소유욕이 아니며 만족시켜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네가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면 너를 보살피겠다가 아니라 그냥 돌보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은 아이의 건강한 정서적 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영양분이다. 부모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부모가 원하고 사랑하는 바로 그런 존재’라는 확신이 심어져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아이의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에너지의 확보를 위해 아이는 충분한 안정감, 충분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깊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 안에서 충분한 안정감을 느끼면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또래지향성은 아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보살핌이 통하지 않게 만든다. 식탁에 앉아있지 않는 사람에게 음식을 먹일 수는 없다. 영양분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탯줄이 연결되어야한다. 아이의 애착욕구를 기꺼이 채워주는, 또 채워줄 수 있는 사람과 활발한 애착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아이의 애착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래들은 끊임없이 인정과 사랑을 찾아 헤매는 아이에게 안정을 주지 못한다. 또래지향성은 안정 대신 동요를 일으킨다, 아이의 또래지향성이 강할수록 그 밑에 깔린 불안감은 그만큼 더 깊이 스며들고 만성화된다. 어른들과 관계가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아이는 또래와의 우정에서도 만족감을 얻는다.
아이를 움직이는 것은 정서다. 에너지를 하나의 발달 현안에서 다음 현안으로, 애착에서 개별화로 전환시키는 것도 정서이다. 문제는 만족이 충분히 스며들려면 아이는 깊게 그리고 민감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스스로 민감하게 느끼는 감각을 차단한다. 아이가 충만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공허함을 느껴야 하고, 도움을 받는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도움을 필요로 해야 하고, 완전함을 느끼려면 먼저 불완전함을 느껴야 한다. 재회의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별의 아픔을 경험해야 하고 위로받기 위해서는 먼저 상처받아야 한다. 충분한 만족감은 매우 기분 좋은 경험이지만 필수전제 조건으로 상처받기 쉬운 예민한 감성이 있어야 한다. 아이가 애착결핍 상태를 느낄 줄 모르면 보살핌 받고 충족되는 느낌을 모른다. 내가 아이들을 평가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점은 ‘상실감을 느낄 줄 아는가’이다. 아이들이 상실감을 느낄 줄 알고 그 공허함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건강함을 나타낸다.
무엇을 상실했는지 느낄 수 있는지 알아야만 끊임없는 애착의 추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또래지향성의 결과로 취약성에 대해 방어적인 아이가 되었을 때, 아이는 부모와이 관계에서도 만족할 줄 모르게 된다. 만족할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충분한 것은 없다. 무슨 일을 해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많은 관심과 인정을 쏟아 부어도 달라지지 못한다. 이는 부모의 입장에서 매우 비판적이고 지치는 일이다. 충분히 만족할 줄 모르는 아이들은 발달의 첫 번째 단계에 갇히고, 미성숙에 갇히고, 기본적인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만족을 위해서는 늘 자신의 외부에 있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지한다. 사람이 정서적 기능이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지배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되면 집착이나 중독이 성숙의 과정을 대체하는데, 이런 경우 또래와의 결합에 집착 혹은 중독된다. 그 결과 대개는 더 잦은 접촉에 대한 참을성 없고 조급한 열망만 남는다. 더 많이 접촉할수록 아이는 더 많은 접촉을 갈망한다.
아이일 때 어른과 풍부한 애착을 맺지 못했으면서도 잘 성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명하자면 거기에는 성숙과정을 진행시키는 두 번째 열쇠가 있다. 이를 성숙으로 향하는 뒷문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아빠의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할머니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하거나, 친구를 사귀지 못하거나, 함께 놀 누군가가 없을 때와 같이 열망이 좌절되었을 때, 아이의 뇌에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인식이 새겨진다. 우리의 감정회로는 애착에 대한 허기가 충족되었을 때뿐만 아니라, 충족을 향한 열망이 부질없다는 것을 통력하게 깨달았을 때에도, 그런 추구를 포기하도록 프로그램화 되었다. 정서적 뇌의 내부 깊숙이 그런 일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깨달음이 새겨지고 나서야 조급한 마음은 풀어지고 집착은 끝이 난다.
에너지의 전환을 위해서는 만족감과 마찬가지로 부질없음에 대한 인식이 새겨져야 한다. 이런 전환이 일어나면 아이들은 수용할 줄 알게 되고, 좌절감을 벗어나 세상에 대한 평온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감정이 예민한 사람만이 부질없음을 느낄 수 있고, 그래야 자신의 한계와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할 수 있다. 부질없음에 대한 감각은 아이가 취약성에 방어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사라진다. 따라서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부질없음을 느끼는 정서가 매우 부족하다. 실제로 또래와의 관계는 절망과 상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실망, 슬픔, 비탄의 느낌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건강한 슬픔을 느끼고 실제로 무언가 끝이 났다는 느낌은 해방감을 가져온다. 세상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도 있으며, 포기해야 하는 일들도 있다는 사실을 뇌가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부질없음을 느꼈을 때 대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울지 않는다는 것은 감정을 처리하는 뇌의 능력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다. 그 결과 뇌는 유연성과 발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부질없음을 느끼지 못하면 만족을 느끼지 못할 때와 마찬가지로 절대 성숙해질 수 없다.
개성은 심리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되는 과정이 열매로서, 개인의 독특함이 만개할 때 절정을 이룬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차별화’ 혹은 ‘개별화’라고 부른다. 한 개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만의 의미, 자신만의 생각과 경계를 가진다는 뜻이다. 자신의 기호, 원칙, 의도, 관점, 목표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점유하지 않은 공간에 서는 일이다. 개성은 진정한 공동체의 토대가 된다. 진정으로 성숙한 개인들만이 다른 사람의 독특함을 존중하고 칭찬하면서 완벽하게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개인의 권익을 공동체의 권리와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철학체계이다. 얄궂게도 또래지향성은 진정한 개성을 훼손시키면서 개인주의를 부추긴다. 우리의 솔직한 진짜 모습을 과감히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완전히 노출되는 셈이다. 그 반응이 너무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일 때 이런 등장은 재빨리 자취를 감춘다. 매우 성숙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른 아이의 이러한 성숙 징후를 환영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개성을 존중하기에는 너무 애착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아이 손을 놓지 마라 ( 고든 뉴펠드. 가보 마테 지음, 이승희 옮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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