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은 유달리 많이 힘들었다. 불볕더위도 힘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답답함과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일상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해졌지만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걷는 새벽 산책길도, 문득문득 일어나는 불편한 감정으로 우울하다. 무엇을 해도 항상 마음이 편치 않고 일상이 무기력하다. 박완서의 산문집 ‘살아있는 날의 소망’의 내용을 빌어 답답한 마음을 정리해 본다.
일제 36년이라는 민족적인 치욕을 비롯해서 그 후에도 수많은 난국을 겪고 비리에 시달렸으면서도, 우리는 그 원흉을 한번이라도 정당하게 심판해 본적이 있었던가? 추상같은 단죄가 내려질 듯 서슬이 시퍼렇다가도, 어느 틈에 꽁무니를 빼고 흐지부지 되고 만 것의 좋은 본보기가 아마 ‘반민특위’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꼭 가혹한 보복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묵은 시대를 심판하지 않고서는 새 시대는 열리지 않는다. 지금도 우리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힘든 이유도 그래서이다. 이조 5백 년 동안의 당파싸움에서 비롯된 정적에 대한 숙청 보복은 끊임없이 있어 왔지만, 민중이 주체가 된 정당한 심판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독립운동이나 그 밖의 옳은 일에 몸을 바친 사람은 일신의 궁핍은 물론 자손까지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해 대대로 지지리 못살고, 나라를 팔든 그 밖에 무슨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든 간에 돈만 벌어 놓으면 권력층의 언저리에서 맴돌게 되고, 자자손손 번영을 누리는 식의 뒤바뀐 현상을, 우린 너무도 많이 보아왔고 지금도 보고 있다. 바로 이런 본보기가 어떤 비리를 저지르든지 권력을 잡고 돈만 벌어놓고 보자는 사람들, 그들이 두려움을 모르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놓았대도 우리의 관용과 망각이 미덕일까?
우리는 지금도 그들이 어떤 비리를 저질러도 추상같은 법의 심판이 내려지리라는 것을 아무도 믿고 있지 않다.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방법으로 나와서 우리보다 훨씬 잘 살 거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심판이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법의 심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체가 된 민중의 심판이다. 오늘날의 작태는 어떠한가? 어떤 추악한 방법으로든지 그저 돈만 벌었다 하면, 권력만 잡았다하면 엘리트라는 인사들이 모여들어 갖은 아양을 다 떤다. 그리고 함께 작당하여 서로의 비리를 도와주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막강한 힘으로 간섭하는 권력, 밥 먹듯이 당하는 비리, 날마다 쏟아지는 각종 법령, 그런 것들에 대해 옳고 그르다 정식으로 따지는 소리가, 이다지도 숨죽이고 있어도 되는 걸까? 우리는 피차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무지한가? 점점 우리는 비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실로 수많은 약속과 계약 속에 살고 있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는 애인들끼리 약속도 약속이지만, 몇 시라는 시간도 어디라는 곳도 알고 보면 약속이다. 우리가 일용하는 물건에 붙어있는 상표도 약속이다. 상표를 건 약속의 소리를 우리는 날마다 달콤하게 또는 시끄럽게 듣고 보면서 산다. 계약서라는 게 얼마나 갑의 편의와 이익만을 편들게 꾸며졌고, 설사 갑의 횡포를 견제하는 조목이 한두 가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게 사실은 유명무실한 거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계약이나 약속에서 늘 불리한 처지에만 놓이는 이름 없는 사람들일수록, 자기가 지킬 계약이나 약속엔 그렇게 성실할 수가 없다.
그래도 그들이 폭넓게 사회저변층을 차지하고 있음으로써, 우리 사회가 혼란한 것 같으면서 기본질서는 흔들림 없이 지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약속에 성실한 것은 결코 무력하거나 고발을 하거나 당하는 게 두려워서만은 아니다. 양심의 가책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 꼬투리 잡힐 일 없고 문서도 없는 약속이라도, 지키지 못했을 때에 몇 날 며칠 단잠을 설치고, 양심을 앓은 경험을 이름 없는 사람도 누구나 한두 번쯤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혼잡한 지하철이나 버스 속에서 여학생이 악한이나 잔혹한 손에 위험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위험을 막아주려다 말고 식구들과의 평안을 위해 참는다. 도망할 수 있으면 그 자리에서 멀리 도망친다. 그리고 자기와의 약속, 자식과의 약속, 사회와의 약속을 어긴 것 같은 양심의 가책으로 번민한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 여학생이 부당하게 박대 받는 것을 못 본체했음을, 전생의 약속인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는 각성과 가책이 이름 없는 사람의 잠을 좀 설치게 했기로서니, 그게 그리 대단한 일이 못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살아있는 양심이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서 허구한 날 소금 노릇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점차 그런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중을 이끌어줄 사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고 오히려 당당하다. ‘그래서 니들이 어쩔건데?’ 그런 자들을 지금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일상으로 보고 있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가 주체가 되는 사회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지금 주체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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