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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우리 아이 인생은?

2014년 4월 해남 두륜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금 이 사진을 보면 엊그제 같기만 한데, 벌써 10년 전이다. 그리고 앞으로 10년후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나는 거의 상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내 인생의 시간은 더 빨라질 것이다. 살만큼 살다가 삶의 종점에 다다랐을 때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 내 주위에 모든 것들, 물질이든 명예든 그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잠시 머무는 동안 그림자처럼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일 뿐이다. 만일 해야할 일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다. 이 다음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누구도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인간 개인이 가진 시간, 열정, 에너지는 한계가 있다. 그 시간, 열정,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 것인가는 삶의 환경에 따라 다르다. 이제 칠십을 눈앞에 두고 지금 이 순간, 삶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잘 살아 왔는가? 잘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만약에 다시 삶을 산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의 시간, 에너지, 열정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겠는가? 대부분의 인간은 자본주의 상황에서 물질적 탐욕으로 경제적 가치에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
 
모든 생명체의 본능적인 욕망은 생존과 번식이다. 이 본능을 충족하기 위해 진화한다. 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기반이 사랑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다. 가정에서 배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함께 살고자 스스로를 조절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특별한 것은 대규모로 무리지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파충류와 포유류의 모든 성질을 가진 인간이 대규모로 함께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사랑이다. 우리는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삶의 힘든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운다. 아이도 그런 환경에서 사랑을 배운다. 그 아이가 또 성장하여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문화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이 무리지어 함께 살아가게 한다.
 
지금 내 삶을 되돌아보면 운運이 좋아 대체로 지금까지 잘 생존해 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 힘들었던 시기의 절망적인 환경을 잘 버티어낸 부모님 덕분이라 생각한다. 삶의 시련들이 변곡점이 되어 나를 변하게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나는 사회생활에서 은퇴한 이후 거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태어나 세상을 인식하면서부터 오로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회적으로 좀 더 높은 지위를 위해, 어린이 집, 유치원, 학교를 거치면서, 그 생존기술과 방법 등을 익히기 위해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는 지원을 받지만, 일찍부터 생존수단을 익혀 전사戰士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 삶이 가엽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기반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가정에서 배운다. 그 사랑을 몸에 익혀 이웃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베푸는 것을 배우고 나누는 것을 배운다. 사랑은 체험하면서 몸으로 배워야 한다.
 
딸이 결혼하여 인근에 살고 있는 나는 외손자를 일주일에 두 번 방과후에 돌본다. 아이는 출근을 위해 서두르는 아빠 엄마와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 근처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넘겨진다. 9시반까지 근처 어린이집으로 간다. 오후 3시반쯤에 친가나 외가에서 데려가 아빠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4시간정도 돌보게 된다. 가끔은 내가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데려다 줄 때도 있다. 한 동안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며 계속 징징거리고 울기도 했지만, 이제 그냥 포기하고 어린이집 선생님 손을 잡고 어린이집 문안으로 들어가며 뒤돌아보는 아이를 보면, 안쓰럽고 마음이 짠하다. 또 한편으로는 아이 보는 일에서 벗어났다는 편안함을 즐긴다.
 
손자를 돌보는 게 힘들어 어린이집에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도 있다. 혹시 손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인생에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 가능하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한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하루에도 수십번도 더 들으면서 모든 것을 아이 수준에 맞추려 애쓴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를 노인이 상대하기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대상에 몰입할 때가 가장 행복할 때라고 한다. 나이 들어 사회에서 은퇴하여 몰입할 만한 것이 없을 때 세상은 참으로 쓸쓸하고 우울하다. 노인에게 손자는 삶에 몰입하게 하고 삶의 의미가 되고 즐거움이 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불교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말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의미다.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행동하게 하는 것도 마음이다. 그 마음이 곧 ‘나’이다. 공부란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마음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저절로 만들어진다. ‘내’가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을 통해 인정받기 위해서이다. 그 일을 잘하기 위해 기술을 배우고 재능을 익힌다. 요즘 아이들이 태어나서부터 해야 하는 공부는 후자이다.
 
하지만 그 일을 잘하기 위해서 먼저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삶을 고해라 한다. 어떻게 살아도 누구든지 항상 나름의 걱정을 안고 살아가며 시련은 끝없이 이어진다. 완전한 삶도, 사랑도, 두려움도, 슬픔도, 분노도, 절망도, 구속도, 자유도 삶의 고난이다. 이것을 극복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련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
 
이제 25개월 된 손자는 조금씩 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손자는 항상 세상을 배우기 위해 어떤 일에 열중해 있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으며 말을 익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알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말이 통했다고 생각되면 즐거워한다. 아이를 무시하고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 지금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할까? 자신이 버림받아 여기저기로 떠 맡겨지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런 가여운 마음에 손자를 돌보는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이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들어가면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학원에서 생존에 필요한 영어, 수학, 음악, 미술, 체육, 컴퓨터 등을 배울 것이다. 가끔 휴일이면 문화탐사, 현장체험학습을 하고 방학이면 해외로 체험학습을 떠난다. 그러한 것들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장하면 어떤 어른이 될까?
 
이러한 환경에서 아이들의 인생은 없다. 가축들이 오로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사육되듯이, 성공한 소수의 아이는 사회의 필요에 적합한, 부모의 욕구에 맞는 무엇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아이들의 삶 어디에서 언제 사랑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기위한 마음을 익히겠는가?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벌써 영어로 말을 하고 들을 수 있고 읽고 쓸 수 있으며, 미적분을 문제를 풀 수 있고,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고 AI를 이용할 줄 아는, 이런 똑똑한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이런 아이들의 삶이 행복할까? 공동체로 무리지어 서로를 공감하고 함께 협력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때는 어떤 욕구를 일으키며 어떻게 충족하며 살아갈까? 그런 아이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때 아이들은 무엇을 위해 살까? 어떤 가치관 어떤 신념으로 살까? 아마 그때 아이들은 우리와는 다른 종種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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