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들과 동물들은 생물학적 지능의 메커니즘 때문에 각자의 울타리 안에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이 고립은 지향적인 존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그 큰 물질세계의 극히 작은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편린에 대한 이해만으로도 인간이 삶은 아무 탈 없이 돌아갈 수 있다. 우리는 그 편린들과 화해해가면서 스스로를 형성해 간다. 그렇다고 그 편린들을 우리 안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다. 가설을 내놓고 그것에 대한 시험을 통해 그 편린들에 동화해가는 것이다. 우리가 의미를 알고 전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가설들 모두와 그 가설들을 대상으로 한 테스트의 결과일 뿐이다. 지난 50만년 동안 일어난 생물학적 진화 중에서 가장 명백한 사실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뇌는 신체의 형태와 동역학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과 상호작용을 통해 점점 더 커지면서 환경에 적응을 잘 해왔다. 우리 인간이 의미의 표현을 위해 환경에 적응한 예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얼굴과 후두, 혀, 설골, 손 그리고 필요한 몸짓과 얼굴 표현과 발성을 만들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뇌 시스템들이 그런 적응의 흔적들이다.
각각의 뉴런들은 자율을 유지하되 환경에 따라 속박을 받아들인다. 개인적으로 보면 자율의 실패는 냉담과 침체로 이어진다. 반면에 속박의 실패는 아나키(무정부상태)와 분열로 이어진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들은 서로에게서 의미를 받아들이며 동화해 간다. 사회의 각 구성원은 지향적인 행위와 학습을 통해서 끊임없이 배운다. 그렇게 때문에 구성원의 행동은 점점 더 예측 가능해지고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상호 협력적으로 바뀌어간다. 사적인 의미와 공적인 지식사이의 구분은 의미의 내용물이 아니라 의미의 원천과 관계가 있다. 개인적인 의미와 지식을 통하여 얻은 동화된 의미는 뇌 속에 패턴으로 존재한다. 한 개인의 사적인 의미는 그 사람의 과거 경험 모두를 통합한다. 그렇다면 그런 개인적인 의미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의미로 동화될 수 있단 말인가?
각각의 뇌는 몸을 통하여 이 세상으로 내보낼 행동을 끊임없이 구성함으로써 저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각 개인의 과거 삶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사연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의 잠재력은 저마다 다르고 독특하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뇌에서 저 뇌로 의미를 주입하거나 집어넣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동화가 정상적인 방법이다. 동화가 이뤄지지 않을 때 개인들은 융통성을 잃게 되고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반복적인 행동을 보이게 된다. 변덕스럽게 여러 개의 인격을 보이는 다중장애도 이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해를 받고 싶어하는 치열한 욕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 욕망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어간다. 이것이 동화인 것이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나타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형태가 에밀 뒤르캠과 다른 문화인류학자들에 의해 관찰되었다. 한쪽 극단에는 구성원들 사이의 생각과 행동이 지나칠 정도로 일치되어 있다. 이와 정반대의 극단에는 각 개인들이 무정부의 수준으로까지 자유권을 누리는 사회가 자리 잡고 있다. 지향적인 행위는 무엇이든 뇌와 신체 안에 잇는 의미의 상태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의 행동은 그것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향할 때에 내면상태의 표현이 된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의 내면에다가 자기와 비슷한 상태를 형성시키려는 의도가 있음에 틀림없다. 지향적인 행동 각각은 뇌와 몸속의 의미상태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의 행동은 그것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향할 때, 그 사람의 내면 상태에 대한 표현이 된다. 그 사람의 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와 비슷한 의미의 상태가 형성되도록 만들려는 의도가 있음에 틀림없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의미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은 상대방의 지향적인 행동으로 확인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개념을 빌리면 의미는 오직 마음에만 존재한다. 대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조상이 남긴 예술품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의미의 창조를 유발하는데 이용한 도구이다. 그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이 행동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우리의 기대에 아주 가깝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더욱 고립되게 만든다. 그 이유는 갈수록 촉진되게 마련인 일화적인 의미구조들이 시간과 경험이 쌓임에 따라 더욱 더 복잡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독특한 역사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고립되어 간다.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전문화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도 더 떨어진다. 어린이에서 능력 있는 성인과 부모의 단계로 넘어갈 때의 통과도 그런 사건에 속한다. 이 과도기는 너무나 친숙하고 인간의 경험 깊숙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그즈음에 이르러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 조망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 과도기에는 애착이 부모에서 새로운 파트너나 지식에게로 옮겨가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 변천은 우리의 낡은 습관과 가치, 기술, 믿음이 새로운 곳을 위해 자리를 내줘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면 어린이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의미의 지향적인 구조에 대규모이 전환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기존의 의미 구조를 해체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의미 구조가 뿌리내리게 하는 독특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과정은 포유류의 생존에 요구되는 사회적 유대의 필요성을 만족시켜주어야 한다. 나는 그 과정을 ‘폐기학습’이라고 부른다. 훌륭한 망각이 훌륭한 기억보다 훨씬 낫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기억을 잘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잘 잊지 못해서 정신질환을 앓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폐기학습의 과정은 망각보다는 용서에 가깝다. 실험실의 개들을 심한 스트레스에 노출 시켰다. 엄청나게 힘든 운동을 시키고 감각적인 자극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가하고, 잠을 재우지 않고 격한 두려움의 감정상태에 놓이게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실험실의 개들은 극한 상황에 이르렀고, 급기야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파블로프는 이 상태를 한계를 넘어선 억제라고 불렀다. 쓰러진 상태에서 회복된 직후 그 개들은 그 전에 가졌던 행동패턴을 모조리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개들은 예전학습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주변을 두러보면 옛날의 전제군주들이 휘두른 만큼 극단적이지 않을 뿐이지, 그런 세뇌는 조금 누그러진 형태로 어디서나 존재한다. 법조계나 의료계, 과학계의 진출을 노려 훈련을 받는 학생들에게도 약한 수준의 세뇌가 요구되고 있다. 부모와 형제로부터 단절되어 지내는 청년들도 타인과의 제휴를 추구한다. 공동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삶에서 목표와 의미,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이다. 일반적인 지식과 개인적인 역사, 언어와 운동기술들의 경우에는 비록 실신의 상태에서 잠깐 망각될지라도 곧 회복되지만, 사회적 태도와 가치와 목표는 해체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지향성의 구조가 성장할 길을 열어준다. 세뇌를 시킨 사람들이 사회적 안내와 지원을 제공하기만 하면, 새로운 사회적 태도의 형성이 가능한 것이다. 개인이 겪는 시련은 외부에서 가해진 스트레스가 될 수 있고, 뇌와 몸 안에서 일어나는 발달상의 변화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다. 그 변화 중에서는 사춘기가 가장 중요한 예이다.
거의 모든 인간사회는 젊은이들이 그 집단의 성인구성원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돕기 위하여 통과의식을 두고 있다. 인류학자들이 묘사하는 각 부족들의 통과의례를 보면 그 행동들이 수세기 동안 사회적 전형과 종교적 개종에 동원되었던 그것들과 매우 비슷하다. 통과의례들은 몇 시간 혹은 몇날 며칠 밤낮으로 공동으로 벌이는 행동인 춤과 노래, 손뼉 치기, 몸 흔들기에 크게 의존한다. 이런 의례들을 보면 율동적인 북소리와 음악이 거의 보편적이다. 사람들은 지각을 잃고 의식상태의 변화를 이끌어내려 할 때 북소리와 음악을 자주 이용한다. 참가자 모두가 다음 장단이 언제 시작되는지 그리고 그 장단이 약해졌다가 다시 강해지는 때가 언제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을 휘어잡으면서 완전히 하나로 묶는다. 그 효과는 그 어떤 언어와도 비교할 바가 아니다. 행동을 함께 하는 것은 서로를 믿는 기초이다. 공동행동으로서는 같은 장단에 맞춰 함께 춤추는 것보다 더 강력하고 더 친밀한 것은 없다. 새로운 의미가 형성될 수 있기 전에 옛날 의미의 폐기학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폐기학습의 절차를 가능하게 만드는 신경계의 조직은 아마도 포유동물의 유전자에서 나올 것이다. 그 동물들이라면 새끼를 낳았다하면 오랜 시간 돌보아야 하지 않은가. 어미와 애비는 둘 사이에서만 아니라 새끼들과도 강한 연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암수 1:1 관계는 새끼가 태어날 때와 수유기간, 성적 자극과 성적 결합이 이뤄질 때 형성된다. 이런 과정들은 뇌와 신체의 행위와 지각, 경험, 학습과 성숙에 지향성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들이다. 인간도 그와 같은 신경계의 조직을 갖고 태어난다. 남녀가 서로에게 애정을 느낌과 동시에 아이들에게도 연대를 느끼게 하는 오묘한 조직이 있는 것이다. 사회화와 문화적 적응은 평생에 걸쳐 일어난다, 그러나 인간이나 동물이 태어나고 몇 년 혹은 며칠 동안에 특별히 치열하게 전개된다. 폐기학습은 우리의 일상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그런 만큼 폐기학습에 대한 학문적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우리 모두가 매일 밤잠을 자는 동안에 그 작업에 필요한 신경조절물질이 배출되어 폐기학습이 이뤄질 것이라고 짐작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몇 년을 주기로 일어난 소멸과 재생의 사이클을 통해 길러지고 다듬어진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각 개인이 가진 지향성의 지휘아래 일어나는 이 사이클의 시작과 끝을 일으키는 뇌의 동역학, 또 뇌가 최근에 배운 것들을 놓고 저장할 것과 통합시킬 것 혹은 버리릴 것을 선택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턱없이 부족하다. 인간의 지향성은 오랜 교육의 과정을 통해 문화적으로 적응될 때까지는 그렇게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지 못하다. 바로 그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높은 수준의 공통된 인식과 이해 혹은 지식에 바탕을 둔 협력적인 사회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비로소 생겨난다. 세뇌는 정치와 종교계에서 실존의 문제와 관련한 중년의 위기를 다루는 데 적절한 성숙한 형태의 변모이다.
우리의 뇌들은 새로운 의미들을 다듬어내는 주물공장이다. 그 의미들이 우리의 자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조직될 때이다. 그런 뒤에 우리들은 그 의미들을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지식으로 공유하는 수단으로 책이나 시 혹은 영화와 같은 표현을 빌려 발표한다.
뉴런 집단의 활동을 강조하면서 프리먼은 합창단을 예로 든다. 우리가 합창단의 노래를 들을 때에는 단원 한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차례로 들으려 해서는 곤란하다. 단원들의 노래를 하나로 들어야 한다. 그때 단원들 모두는 서로 교류하면서 목소리와 타이밍을 조절하게 되는 것이다. 뉴런 집단이 합창단이고 뉴런 개체가 합창단원이라는 설명이다. 또 달리 표현하면 뉴런에는 미시적인 활동이 있고 거시적인 활동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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