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이면서도 지속적인 인간 활동의 하나가 바로 의미의 추구이다. 사람들은 의미 있는 관계와 경험, 명분을 추구한다. 그런 것들을 의미 없는 상황이나 우연한 조우, 허약한 명분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리는 유익한 선택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나타날 전망이 있고, 우리의 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의미가 형성되는 방식은 독특하다. 우선 우리의 행동과 선택을 통해 의미가 형성된다. 우리는 처음에는 부모나 또래 혹은 동료들을 통해 각자의 믿음 체계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모든 선택은 우리 모두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 중에서도, 우리가 얽혀있는 부분을 우리의 독특한 경험에 맞춰 우리 자신의 언어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쏟는 노력과 에너지의 상당부분이 다른 사람의 의미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설득하는데 들어간다. 함께 모여 일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미들이 서로 비슷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화된 의미들은 가족을 시작으로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집단이 공유하는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된다. 우리가 서로 의미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배우들이 하는 것처럼 말과 얼굴표정과 몸짓이 있고 예술가들이 하는 것처럼 글과 그림 등이 있다. 의미의 동화가 이뤄지는 한 방법은 연속적인 대화를 통해 의견의 접근을 확보하는 것이다. 행동을 함께 하다보면 일치를 넘어 동화가 이뤄진다. 말들은 단지 인지작용에 의해 나오는 것일 뿐이어서 신뢰감까지 엮어내지 못한다. 신뢰감은 어디까지나 의미의 깊은 동화와 함께 생기는 것이다. 연대활동이야말로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진짜 접척제가 아닌가. 연대활동은 유아기의 사회화로 시작하여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는 의미의 산파로 전 생애로 이어진다.
뇌는 서로 연결된 뉴런들로 이루어져 있다. 뉴런의 해부학적 구조와 물리적 특성, 화학적 성격 등에 대한 정보는 엄청나게 많이 확인되었다. 의미들이 성장하고 작동하는 그 과정이 바로 지향성이다. 대부분이 사람들은 의도를 목표 지향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으로 이해한다. 사람들이 처음 댄스를 배우거나 운동을 배운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그들은 자신이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 의식적으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달리기와 같이 우리 모두가 이미 배운 기술은 무의식에 맡긴다. 이제 뇌와 신체의 훈련이 점점 더 강화된다. 그러면 몸이 정교하게 움직이는데 대한 의식적인 숙고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흔히 경기나 댄스에 대한 육감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을 확보함으로써 더 과감히 나설 수 있다. 이제 그것은 제2의 본성이 된다. 대부분의 시림들은 행위에 완전히 몰입할 때가 가장 위대한 성취의 즐거움을 이루는 순간으로 여긴다. 그래야 자기 인식마저 어디론가 바람으로 흩어져가고 몸과 마음 모두가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상태로 빠져든다. 그 사람들의 뇌와 마음은 인풋을 예상하거나 인풋이 들어오면 지각하거나, 그런 뒤에 숙고하거나 할 필요도 없이 바로 몸동작에 들어 갈 것이다. 지행성이라는 개념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지각활동에 나타나는 이런 종류의 무의식적 기술이다. 행위가 이뤄지는 순간마다 삶의 경험이 몽땅 동원되는 것이다.
뉴런은 활동 전위라 불리는 전기펄스를 보내 다른 세포에 영향을 주는 세포이다. 이 세상에서 감각기관의 미시적 뉴런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 뉴런들이 개별적으로 뇌에 활동 전위를 보낸다. 그러면 뇌는 근육세포에 활동 전위를 보내는 미시적 운동 뉴런을 통하여 이 세상에 반응을 한다. 지각은 감각들을 조직화하여 의미들을 구축하는 일이다. 뉴런 집단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감각뉴런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속의 언어나 물건을 대표하는 신호를 전달한다. 그러면 그것을 받은 뉴런이 훗날 사용하기 위해 그 신호를 저장한다. 새로운 자극이 도달하면 뉴런들의 네트워크가 네트워크 안에 이미 저장된 신호들과 그 자극을 비교한다.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신호를 찾기 위해서이다. 이 작업을 인지라고 부른다.
뇌는 호르몬과 같은 물질과 에너지를 교묘하게 조종함으로써 정보를 처리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오로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종합적으로 처리되는 표현의 차원에서만 알 수 있다. 뉴런의 활동전위는 더 이상 전류로 해석되지 않았다. 정보단위로 on이나 off, yes나 no 혹은 1이나 0으로 표현되는 이진수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이는 프로그램이 가능한 디지털컴퓨터의 개발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은 뉴런이 작동하는 방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보는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활동전위 안에 비트들로 기호화 되어 들어있다. 이때 바트는 그 자극의 특성이나 형세 혹은 특징들을 대표한다. 이런 특징들은 뇌에 이르는 경로의 역할을 맡은 축삭들에 의해 전달된다. 뇌에서는 그 특징들이 시냅스로 연결된 뉴런들이 네트워크에 의해 자극을 나타내는 표현들로 바뀐다.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 이 접근법을 따르던 인지주의자들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 있다. 그들이 만드는 기계 속에 들어있는 상징적 표현에 의미를 결합할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고와 표현에는 자각에 내재되어 있다. 일부 생물계에는 의식이 있다. 그러나 독일의 철학자 프란츠 브렌타노가 지적했듯이 무생물인 기계에는 의식이 없다. 기계는 지향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식의 본질은 무엇일까? 의식은 뇌에서 어떻게 만들어질까? 인공지능 뇌에서도 의식이 작동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여 그 기계의 부품이나 전체 시스템의 작용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유기체는 세상을 향한 행동을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해 배우고 이 세상의 잠재력을 깨닫는다. 아퀴나스는 의도와 의지를 구분함으로써 이 개념에 변화를 주었다. 의지는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선과 악, 혹은 옳고 그른 것에 관한 윤리적 선택을 자발적으로 한다. 반면에 의도는 그 유기체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메커니즘으로 다른 동물에도 있는 것이다. 어원학적으로 보면 의도intend라는 단어는 라틴어 intendere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라틴어에는 ‘앞으로 뻗는다’는 뜻뿐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의 결과로 뭔가를 배움으로써 자아를 바꿔나간다는 뜻도 들어있다.
몸과 행동들은 운동계를 통해 밖으로 나가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아와 세상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그 다음에는 그 행동에 따른 감각적 결과들이 그 유기체의 신체가 이 세상에 맞춰 바꿔나가도록 한다. 그러나 그 자각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내면에서 경험되는 자아의 변화에 관한 것일 뿐이다. 신체는 자극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형태를 바꿔나간다. 뇌 안에서 생겨난 의도와 관련 있는 자극의 양상과 비슷해지기 위해서이다. 몸과 뇌는 물질과 에너지와 정보를 두루 처리할 수 있는 개방형 시스템이다. 그러나 지각의 단일 방향성이 의미의 구조를 폐쇄형 시스템으로 만든다.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이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의 범위밖에 존재한다. 이 세상을 이루는 세세한 것들은 인간의 접근을 불허한다.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은 인간에게는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지향성이라는 정신작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양만큼만 받아들인다. 그 이상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앞에 어떤 물건이 놓여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 물건과 우리의 관계를 어떤 목적에 즉시적으로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코를 킁킁거리고 눈을 움직이고 귀를 쫑긋하고 손가락을 움직여 그 물건을 만져본다. 메를로 퐁티는 이런 역동적인 행동을 최대한의 이해력 추구라고 불렀다. 우리의 감각 수용기들이 그 물건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자아와 이 세상의 관계를 최대화하는 것이다. 장 피아제가 심리발달을 분석하는 작업의 바탕으로 삼은 개념은 이런 것들이었다. 즉 유아들은 아주 초기단계에 능동적인 탐험을 통하여 자신의 신체와 행동에 대해 배운다는 것이다. 깁슨은 대상들의 어포던스(Affordance)는 (어떤 행동을 유도한다는 뜻)을 강조했다. 깁슨이 처음 사용한 이 표현은 어떤 대상이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의 목적에 기여하는 쓰임새를 뜻한다. 그는 각각의 대상 안에는 그것이 어떻게 쓰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보가 들어있다고 믿었다.
실험쥐의 경우에는 어떤 자극이 주어질 때까지 무기력하게 앉아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 컴퓨터 터미널도 유저의 지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동에 들어간다. 그러나 야생동물들과 어린이들은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환경을 건드린다. 어떤 기대와 속셈을 가지고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다. 타고나는 것 같이 보이는 이런 추구와 관찰의 행동은 뇌의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뇌는 그 행동들을 어떤 식으로 탄생시킬까? 자아는 스스로 조직한다. 진화는 인간에게 의도를 규명하기 전에 그것을 탐지해내는 능력을 부여했다. 우리를 향한 행동은 그것을 보는 즉시 알아차린다.
지각과 대부분 형태의 학습을 포함한 모든 의도적 행동에는 변연계가 필수인 것으로 드러난다. 수술로 뇌간과 반구들 사이의 연결을 끊고 변연계를 고립시켜보라. 그러면 동물은 지향적인 행동을 몽땅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동물은 먹이를 입에 넣어주면 씹고 삼키는 능력과 몇가지 운동하는 능력, 월터 캐넌이 ‘항상성’이라고 부른 다양한 조절기능을 하는 능력은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동물은 지향적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했으며 의도적으로 어떤 곳으로도 가지 못한다. 주변 환경을 향한 행동의 방향을 잡아주는 뇌 부위들이 상실된 것이다. 그리고 운동패턴을 실행할 능력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남는다.
뇌의 각 반구에서 감각피질이 인풋을 받고 운동피질이 행동을 이행하고, 해마가 공간과 시간에서 다감각이 통합을 이루고 방향을 제시한다. 각 부위는 다른 부위들과 서로 호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자극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주의와 기대만으로도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한다. 그런 과정이 있기 때문에 감각피질들이 곧 취해질 행동이 눈과 코, 귀, 손가락과 이 세상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바꿔 놓을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예상할 수 있다. 체지각體知覺 피질은 또한 근육과 관절로 부터도 메시지를 받는다. 그리하여 의도한 행동이 수행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주요 감각피질들은 자체의 활동을 끊임없이 전달한다. 보고할 사항이 전혀 없을 때조차도 각자 하기로 되어있는 활동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면 무엇이든 우리의 변연계로 전달한다.
감각으로 야기된 행동패턴을 해마의 시공간 필드로 보내야 한다. 각 행동으로 예상되는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때문에 뇌의 각 부위는 끊임없이 다른 부위들과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런 절차를 거쳐 나오는 행동은 통일되고 전체적이고 의도적이다. 인간의 진화는 뇌의 크기만 커진 것이 아니다. 연결도 더욱 복잡해졌다. 알츠하이머병은 감각피질과 해마의 연결을 파괴하는 경향을 매우 강하게 보인다. 통일성과 전체성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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