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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마음

이번 겨울은 눈이 자주 온 편이지만, 제대로 눈 산행을 해보질 못했다. 이번 주 일요일에 눈이 온다는 예보를 믿고 무조건 도봉산을 찾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니 부슬부슬 비만 내린다. 도봉산역에서 내려 멀리 도봉산을 바라보니 정상이 하얗게 덮였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이른 아침 산속은 고요하고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쌓여, 세상은 이미 겨울왕국이 되어 있다. 안개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절경이다. 이런 눈꽃 산행이 몇 년 만이든가? 사진은 안개 속에서 잠깐 그 모습을 드러낸 도봉산 정상 봉우리들이다.
 
이제 칠십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등학교 동창생 둘이 전번 주에 죽었다. 산을 오르면서 나는 내 건강을 체크해 본다. 내가 느끼는 세월의 속도만큼이나 내 몸도 빠르게 늙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아름답고 황홀한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돌아보면 힘든 날도 많았고 좋았던 날도 많았다. 무사히 여기까지 와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책으로 맺어진 친구들이다. 그중에 한 명이 정신분석학자 이무석 박사님이다. 삶이 힘들어 정신치료가 필요할 때 나는 그의 자존감에 관한 책을 읽었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번에 다시 ‘마음’에 관한 그의 책을 읽었다. 그 내용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한 일부분이다.
 
행복은 목적지에 도달한 후에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오해다. 돈을 몇 억 모으면 그때부터 행복해질 거라고 믿고 올인한다. 기업의 임원이 되면 그때부터는 기를 펴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밤낮으로 회사에 충성한다. 자녀가 일류대학만 가면 행복할거라고 믿고 유치원 때부터 아이를 토끼몰이 하는 부모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소위 출세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한다. 허망하고 우울하다. 행복은 목적지에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삶의 과정에서 느끼는 것일 뿐이다. 행복의 순간을 놓치면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성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러나 출근길 가로수에 부서지는 햇살도 보고 사랑하는 자식들의 웃음을 보고, 늘 곁에서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들도 느껴보며 달려야 한다. 어느 시인은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고 했다. 너무 빨리 달리지만 말고 속도를 조금 늦춰 주변에 시선을 돌려보자. 무심결에 지나치던 모든 사물들이 우리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을 말한다면 인생은 고해와 같다. 가난, 배고픔과 추위는 현실적인 고통이다. 배고파 본 사람만이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는 병도 많다. 병으로 인한 육체적 통증은 지독하다. 어떤 통증은 너무 아파서 기가 팍 죽는다. 암에 걸린 사람들은 생명이 언제 끝날 것인지 늘 초조하게 살날을 계산한다. 남은 생명의 길이에 대해서 잊고 사는 사람들은 이들의 심정을 모른다. 이런 무서운 병이 누구에게 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사건사고는 또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자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식들 걱정으로 날을 샌다. 대학 넣어놓으면 취직이 걱정이고 취직시켜 놓으면 결혼이 걱정이다. 결혼시켜 놓으면 사네 못사네 하며 바람 잘 날이 없다. 이런 현실적 걱정 외에도 심리적 고통이 우리를 시시때때로 공격한다. 열등감, 패배감, 배신감과 외로움은 만나기도 두렵고 아프다. 이걸 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한다. 인생은 위험과 걱정의 바다와 같다.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인생은 근심의 연속이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 힘들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출세한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모두 나름대로 문제를 안고 걱정하며 산다. 모두 자기 몫의 불행을 안고 산다. 자기 불행만 가장 크고 비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심성 때문일 것이다.
 
인생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힘들다. 힘든 것이 인생이다. 그런 줄 알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인생은 행복한 것인데 나만 재수가 없어서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힘든 인생을 극복하며 살기 힘들다. 또 인생이 행복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고통에 봉착했을 때 견뎌내기 힘들다. 그러나 인생은 본래 힘든 것인데 자기 몫의 고통을 안고 견디며 사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사막에 던져 놓아도 물을 찾아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는 식물과 같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힘들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처럼 소소한 행복이 우리를 찾아올 때 그 행복은 놓치지 말자.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으로 2차대전 때 나치에서 잡혀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갇혔다. 어떻게 프랭클은 극한 상황을 이겨 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살아야 할 이유, 즉 삶의 의미 때문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만나야 해.’ 이것이 그가 살아야 할 이유였다. 참혹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신체가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몸은 약하지만 이루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있고, 삶의 의미를 갖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병들지도 않았고 자살하지도 않았고 지독한 상황을 초인적으로 이겨냈다. 프랭클은 ‘인간이 삶의 의미를 상실할 때 정신질환에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의미를 회복하면 치유가 일어난다. 의미를 상실한 상태를 실존적 진공상태라 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이것이다. 삶의 이유를 잃고 허겁지겁 살다가 마음은 건조한 실존적 진공상태에 빠질 수가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바쁜거지? 마음의 대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삶의 의미를 찾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프랭클린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의미요법logotherapy이라는 이론을 정립했다. 의미를 찾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의미를 상실하면 무력해진다는 학설이다. 그래서 치료자는 환자가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철학자 니체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고 말했다. 삶의 의미가 행복하고 화려한 것일 필요는 없다. 고통도 보는 시각에 따라서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사람마다 살 이유를 갖고 있다.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삶이 힘들고 무기력해질 때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무얼 위해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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