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출한 군주인 명 태조는 자신의 사후에 대비했다. 원래 건국자가 죽으면 후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법이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태조는 아들들을 모두 변방 요지를 지키는 번왕藩王으로 만들어버렸다. 태자가 일찍 죽은 탓에 태조는 손자를 태자로 책봉해 두었다. 태조가 죽자 손자가 건문제로 즉위했다. 호랑이 같은 태조가 죽자 건문제의 삼촌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가장 강력한 삼촌인 연경의 번왕이 군대를 이끌고 난징으로 쳐들어와 조카를 손쉽게 제압하고 제위를 차지하였다. 그가 영락제 성조이다. 영락제가 즉위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수도를 난징에서 북쪽 연경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자신의 세력근거지를 전국의 중심지로 만든 것이다. 영락제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베이징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영락제는 한 무제, 당 태종에 버금가는 중국 역사상 걸출한 군주였다. 그는 명을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영락제 이후로는 명의 황제들은 모두 쭉정들 이었다. 영락제는 1410년부터 15년에 걸쳐 북방을 평정했다. 베트남 지역도 복속시키고 정화에게 역사적인 남해원정을 명했다. 원정 효과는 컸다. 남방의 여러 나라와 국제관계(조공관계)를 맺었으며 동남아 지역에 관한 정보가 강남지방의 중국인들에게 전해져 이들이 남방으로 진출했다. 오늘날 동남아 여러 나라에 살고 있는 화교들은 이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영락제는 탁월한 군주였으나 대내적으로 장차 제국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씨앗을 뿌려놓았다. 그것은 바로 환관이었다. 영락제는 절대권력 유지를 위해 동창이라는 특수경찰조직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로 환관을 임명했다. 동창은 황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을 감시할 권리를 지닌 막강한 권력체였다. 동창은 영락제 같은 강력한 군주시절에는 황제의 권력 강화에 도움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환관의 강력한 무기로 작용해 환관의 적수인 사대부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내각에서 올라오는 문서를 황제에게 전달하는 일은 환관들이 하는 게 역대 전통이었다. 명대에는 사례감이라는 환관들의 기구가 그 일을 맡고 있었다. 점차 권한이 커진 사례태감은 국가기밀 내용까지 알게 되었고, 내각에서 오는 문서를 제멋대로 제단하고 결제까지 하게 되었다. 감히 환관권력에 도전하는 내각의 사대부들은 걸핏하면 동창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다.
역대 왕조들이 그러했듯이 명제국도 전성기는 짧았고 퇴조기는 길었다. 294년의 사직 중에서 100년도 채 못 되는 시점부터 정치가 부패하기 시작했다.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생산력도 증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명대는 특히 농업과 산업생산력이 크게 발달했다. 상업 역시 농업 못지 않았다. 산업과 도시가 발달하면서 원거리 상품의 유통을 담당하던 객상들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정치 불안에 시달리던 정부는 민간에서부터 급성장하는 경제를 감당하지 못했다. 경제규모의 성장으로 화폐사용량이 급증하자 정부는 지폐를 마구 찌어내어 지폐가치가 급락해 종이 조각과 다를 바 없었다. 정부는 비로소 은銀의 유통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관리들의 녹봉도 은으로 주기 시작하자 정부는 많은 양의 은이 필요했다. 결국 정부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은으로 내는 은납제를 사행했다. 농민들은 곡식을 팔아 은을 구입해야 하니 결과적으로 세금이 더 무거워지게 되었다. 봉건제의 유럽에서는 민간영역에서 이뤄지는 산업과 상업의 성장에 정치권력이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거의 모든 게 관의 지배아래 있었으며 민간영역이란 게 없었다. 이 차이는 서양에서 시민사회가 역사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장한 데 반해 동양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세력이 생겨나지 못한 이유를 말해준다.
한족 왕족 명은 개국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중화적 세계관을 주변에 강요했다. 영락제 남해원정때도 그 작업의 일환이었다. 정화원정은 활발한 대외무역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중국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의 역사가 오랜 곳에서는 민간주도를 기본으로 하는 무역이 활성화되기 어려웠다. 그리고 원대부터 중국과 한반도 인근 해상을 무대로 활동하던 왜구는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해안지방 주민들과 무역을 하기도 했지만 노략질과 약탈을 일삼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주원장은 사무역과 해외출항을 금지하는 해금령을 내렸다. 송과 원을 거치면서 활발했던 민간 대외무역은 해금령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중화사상으로 보면 천하의 중심인 중국과 대등한 국가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명은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나라만을 대상으로 무역을 허가했다. 이것이 조공무역이다.
조공무역 골자는 ‘貢(공물)이 있으면 사賜(하사품)가 있다’라는 것이다. 이런 무역은 조선도 그대로 답습하였다. 조선은 일본이나 주변국 여진에 대해서 조공을 받치면 그 대가를 하사한다는 식으로 무역에 임했다. 여기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조선은 중국을 사대하는 처지였으므로 그 자신도 조공을 받치는 처지였다. 일본과 여진은 조선을 상국으로 받들지 않았다. 중국에 바치고 아래 일본과 여진에는 베푸는 조선 무역은 만성적자에 시달렸다. 명의 국력이 강력할 무렵에는 조공무역도 그런대로 무역구실을 했다. 그러나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중대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국력이 약화되고 조공무역이 유명무실해지자 밀무역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명대에는 농업과 공업. 상업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했음에도 무능한 황제와 무능한 정부, 무능한 정치에 발목이 잡혀 사회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송에 왕안석이 있었다면 명에는 장거정이 있다. 장거정은 1572년 신종이 열 살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 전권을 위임받았다. 수십 년간 정치문란을 경험하면서 개혁의 뜻을 품고 있었던 장거정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강력한 혁신정치를 폈다.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을 축출하고 관료제의 기강을 확립한 다음, 황하일대에서 대규모 수리사업을 전개하였다. 그의 가장 탁월한 업적은 토지측량을 실시한 것이다. 정부가 제구실을 하려면 무엇보다 제정이 튼튼해야하고 그러자면 토지조사가 급선무였다. 장거정의 개혁은 결실을 맺기에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 개혁정치 10년 만에 장거정이 죽었다. 수구세력의 배척을 받아 개혁은 실패했다. 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낳았다. 북송 당쟁은 신법당 구법당으로 나뉘었고 명의 당쟁은 동림당과 비동림당이 맞섰다.
일찍이 당쟁이 극성을 부렸던 송대 유학자 구양수는 ‘대도를 논하는 군자의 붕당과 눈앞의 이익을 따지는 소인배의 붕당을 구별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소인배들은 서로 이해관계를 따라 붕당을 이루어 다투다가 군자의 붕당이 출현하면 이에 대항해 일치단결하는 생존 본능을 보여준다. 신종은 맏아들이 있는데도 애첩의 소생을 마음에 두고 책봉을 미루었다. 강직한 관료였던 고헌성은 이에 항의하다 파직된 뒤 낙향하여 동림서원을 세우고 학문과 시국에 관한 토의를 벌였는데, 여기에 기원을 둔 게 동림당이다. 재야 동림당이 조정에 영향을 미치자 기존 붕당들이 한데 뭉친 것이 비동림당이다. 시정잡배 출신의 위충현은 출세를 위해 환관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황제 휘종의 신뢰를 얻어 동림당 세력을 제거하고 당쟁을 종식시켰다. 다음 황제이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은 즉위하자마자 위충현을 처형하고 동림당 인물들을 등용해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려 애썼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몽골제국의 원제국은 동서양교류의 관심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세계 각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명대는 해외무역과 교역에 가의 단절 되었으며 송대에 비해서도 상업과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세계는 오랜 중세가 끝나고 대항해 르네상스, 종교개혁, 자본주의 발생 등 세계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세계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양의 질서는 수천년 동안 중국이라는 고정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서양 질서는 중심이 이동하면서 다원적인 중심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오리엔트에서 발생한 문명이 서쪽으로 이동해 소아시아로 전달되었고 소아시아 문명은 다시 크레타를 거치고 그리스반도에서 에게문명시대를 열었다. 그리스가 몰락한 뒤 역사의 중심은 로마로 이동해 지중해 시대를 열었으며 로마가 멸망한 뒤 서양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동양의 역사에서는 중국대륙이라는 불변의 중심인 한족과 북방민족들이 각축을 벌이는 방식으로 역사가 전개되었다. 오랜 내전을 끝내고 처음으로 전국을 통일하게 된 일본은 16세기말 중국을 상대로 임진왜란을 벌였으나 패배하게 된다.
명대후기 생겨난 일전양주제一田兩主制는 토지소유권과 경작권을 분리해 경작권도 하나의 권리임을 명백히 하고 있었다. 이렇게 신분이 개선되고 의식이 깨인 농민들은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주가 가혹한 소작료나 불합리한 신분적 예속을 강요할 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맞서 싸웠다. 이러한 변화에 눈감고 있는 것은 지배층뿐이었다. 이들은 환관정치와 당쟁으로만 일관했을 뿐 대내외적 변화를 제대로 인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외교류 움직임이 완전 단절된 데다 중화사상이라는 허풍과 오만으로 명의 지배층은 우물안 개구리였다. 역대 통일왕조가 그랬듯이 명제국도 외부침략이 아닌 내부에서 자멸했다. 마지막 황제 의종이 즉위하던 해부터 발발한 농민반란은 전국규모로 확산되어갔다.
지방관이었던 이자성은 농민반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팽개치고 반란군을 규합했다. 그는 시안에서 대순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고 베이징을 공략했다. 의종이 자살하는 것으로 명제국은 명이 끊어졌다. 이자성이 계속 권력을 유지했더라면 명제국 대신 순제국이 한족 왕조를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사실 수당시대 이래 중국은 만주를 정복하려고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원이 멸명하자 만주는 다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만주는 고려시대까지도 한반도와 인연이 있었다. 원 황실은 고려의 왕에게 출가시켜 고려를 부마국으로 복속시켰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모든 왕들은 원황제의 사위다. 원은 고려 왕족을 심양왕으로 봉해 고려에 만주의 관할권을 맡겼다. 그때 만주를 잘 관리하고 그곳 여러 부족을 잘 관리하고 복속시켰으면 만주는 그때부터 한반도와 한 몸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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