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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동양사-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1

한족은 북방민족을 미개하게 여겼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최초 유목민족국가가 생긴 것은 한족漢族 최초의 통일국가가 생긴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제국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북방에서는 강력한 흉노제국이 탄생했다. 흉노는 한제국 초기만 해도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성했으나 기원전 2세기 중반 한 무제의 공략에 밀려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그 후 1세기 무렵에 중국주변에서 흉노는 이리저리 갈라져 본래 형체는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유럽에서 사정은 다르다. 동유럽에 자리 잡은 흉노는 신의 재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아틸라의 지휘아래 유럽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당시 로마는 게르만족 일파인 고트족과 반달족 등의 유목민족들의 침략을 받은 사실이 있었지만 동방에서 온 흉노는 막강한 상대였다. 흉노의 최대의 무기는 활과 말이었다. 흉노이후 북방민족들은 516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에는 번갈아 중원을 지배하며 중국 역사의 중요한 일부로 참여했다. 한족의 통일제국 수나라가 들어서면서 중원에서 쫓겨나지만 북방은 여전히 그들의 것이었다. 이 시대에 돌궐이 강성해져 랴오둥과 황허 이북,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돌궐제국을 세웠다. 이후 돌궐은 수문제의 분열정책으로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누어졌고 서돌궐은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해 튀르크 제국을 세웠다. 흉노와 돌궐 등 북방민족들의 성장과 발전은 유럽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세계무대로 활동했다.

 

12세기 후반까지 몽골은 금의 지배아래 여러 부족이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의 힘이 약해지면서 몽골초원에도 통일 바람이 불었다. 1206년 테무진은 몽골부족연맹회의인 쿠릴타이에서 대칸(황제로 추대 되었는데 그가 칭기즈칸이다. 모든 제도를 군대화하고 모든 권력을 대칸에게 결집시킨 칭기즈칸은 정복사업에 나섰다. 칭기즈칸은 왕중왕이라는 뜻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칸, , 한 등은 왕이나 수장을 뜻한다. 하자르, 카자르, 카자흐, 카자크, 바흐, 바크 같은 명칭에서 보듯이 k음과 h음은 원래 서로 통하므로 칸, , 한은 같은 말이다. 우리 고대사에서도 왕이나 수장을 한이라고 불렀다. 신라 초기 마립, 단군왕금의 검도 간과 같은 어원으로 추정된다. 한 족의 역대 중화제국들은 한 무제가 비단길을 개척한 이후 대외적인 관심이 퇴보했다. 그에 비해 북방민족은 서역과 교역했고 중화적 관점에서 벗어나 있었다. 중화제국이 안으로 수그러들수록 그들은 바깥으로 향했다. 그 정점이 몽골제국이다.

 

1219년 칭기즈칸은 직접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을 공략했다. 호라즘은 40만 대군이었으나 용병들이 주축이었다. 수도인 사마르칸트가 함락되었다.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영토를 거느렸던 대국 호라즘을 정복함으로써 몽골제국은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했다. 칭기즈칸은 막내 툴루이에게 몽골 본토를 물려주고 맏아들 주치에게는 카스피해 북쪽의 킵차크, 둘째 차가타이에게는 서요가 있는 지역, 셋째 오고타이에게는 나이만의 영지를 주었다. 칭기즈칸이 죽자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 역시 정복군주였다. 오고타이는 수도로 카라코룸을 정해 그곳에 궁성을 짓고 연결되는 도로망을 건설했다. 예법과 의식을 만들고 화폐제도와 조세제도를 정지整地했다. 오고타이는 고려를 복속시키고 금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이때 몽골의 요청으로 남송이 협력했다. 1235년 오고타이는 유럽원정을 결정했다. 위기에 처한 유럽세계를 구하기 위해 슐레지엔의 왕 하인리히 2세가 독일과 폴란드 연합군을 조직해 맞섰다. 철갑으로 무장한 유럽군은 가벼운 무장으로 능숙하게 말을 몰면서 강력한 활을 다루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폴란드와 헝가리의 함락으로 동유럽이 몽골 손에 들어가자 서유럽마저도 풍전등화의 운명이었다. 당시 유럽은 십자군의 실패로 교황 권위가 실추되어 분열되어 있었으며 몽골의의 공격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서유럽의 구세주는 몽골제국의 내분이었다. 오고타이가 사망한 것이었다. 칸의 계승을 둘러싸고 세력다툼이 일어나자 바투의 유럽원정군은 카라코룸으로 회군했다. 바투의 지지를 얻은 툴루이 아들 몽케가 칸으로 즉위했다. 이로 인해 노고타이와 차가타이 가문이 불만을 품과 자기 영지에서 독립함으로써 몽골제국은 분열 위기를 맞았다.

 

1211년 금을 공략하면서 시작된 몽골 정복은 서유럽의 입성을 눈앞에 두고 끝났다. 몽케 칸은 왜 정복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남송 때문이었다. 몽골제국이 분열되어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그리고 바투의 킵차크 칸국이 사실상 독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몽케 칸은 독자적 영지가 필요했다. 몽케는 먼저 남송 주변국들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아바스왕조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일 칸국을 세우는 것으로 서역원정을 완료했다. 1259년 그가 사망하자 형의 뒤를 이어 칸이 된 쿠빌라이는 맨 먼저 남송을 멸망시켰다. 그 다음 고려를 정복하고 안남과 캄보디아, 타이 등 인도차이나도 복속시켰다. 이로써 몽골제국은 인류역사상 최대 영토를 자랑하게 되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몽골영토가 아닌 곳은 서유럽과 인도, 이집트, 일본, 동남아시아 섬들뿐이었다. 쿠빌라이 즉위는 오고타이 가문의 반발로 내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쿠빌라이는 유목사회와 농경사회가 융합된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오고타이 세력은 유목사회를 중심으로 몽골 전통 지배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으로 고치고 수도를 몽골지역 내 상도와 지금의 베이징인 대도로 정했다. 시호도 중국식으로 고쳐 세조가 된다.

 

방대한 통일제국이 건설된 덕분에 원제국 시절에는 역대 어느 왕조도 실시하지 못했던 단일 통화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다. 단일 통화로 지폐를 매개로 했다. 지폐는 송나라 때 세계최초로 만들었으나 실생활에 널리 사용된 것은 원대에 들어와서였다. 지폐가 발달한 배경에는 송대 발달한 인쇄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을 단일 경제권으로 만드는 데에는 운하도 일익을 담당했다. 이 운하로 인해 몽골지역에 건설되었던 기존도로망과 운하가 연결되었다. 동서교통 양대로인 육로로 서역에서 대도까지와 해로로 아라비아에서 중국의 강남까지 이어짐으로써 동서 문화교류가 활발해진 배경이 된다. 오리엔트 세계와 유럽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기원전 10세기경 그리스에 문명을 전해 준 것도 오리엔트였고, 알렉산드로스원정으로 헬레니즘이 꽃피우게 된 것도 오리엔트였다. 7-8세기에 아프리카와 에스파냐까지 진출한 이슬람제국이 고향도 이곳이었다. 당제국부터 오리엔트는 중국과 유럽문명을 이어주는 중개자 노릇을 했다. 몽골원정 전 십자군 전쟁으로 유렵과 오리엔트 세계와의 접촉이 빈번하였으며 중국과의 직접 교통이 더해져 세계적 교류망이 형성되었다.

 

유럽 역사가들은 몽골이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하면서 국제적 정치질서의 안정을 가져온 13-14세기를 타타르의 평화라고 부른다. 예전부터 활발하게 교류한 유럽과 오리엔트, 여기에 양대 육상로를 통해 오리엔트와 중국이 연결되면서 오리엔트를 매개로 유럽과 중국도 간접교류를 시작했다. 유럽과 오리엔트측은 천문학, 지리학, 수학, 역학, 그리스도교를 중국에 전했고 중국에서는 중세의 3대 발명품인 나침반과 인쇄술, 화약이 아리비아 상인들 손을 거쳐 유럽에 전달되었다. 중국이 유럽에 전한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은 유럽세계에 많은 공헌을 했다. 나침반을 이용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으며 아라비아인은 화약으로 대포를 만들어 중국에 역수출했다. 인쇄술은 훗날 구텐베르크 활자의 발명으로 이어지면서 성서의 대량 보급에 한 몫 함으로써 종고개혁을 뒷받침했다.

 

제위 세습제가 발달한 한족 왕족과 달리 몽골의 관습에는 칸의 계승을 위한 고정제도가 없어 다툼이 심했다. 게다가 경제에 어두운 몽골황실은 국가재정을 제대로 운명하지 못하고 사치를 일삼았다. 오랜 기간의 민족 차별에 불만이 팽배했던 한족들은 제국의 통치가 느슨한 틈을 타서 각지에서 봉기했다. 남송시대 불교정토종의 한 갈래로 출발한 백련교는 혼탁한 시대를 만나 미륵신앙으로 바뀌었다. 백련교는 군대화 되어 중국의 남방에서 일어난 홍건군은 금세 반원항쟁 핵심으로 성장했다. 홍건군 우두머리 주원장이 강남을 장악하고 북벌을 감행했다. 1368년 대도가 함락되면서 원제국은 100여년 간의 지배를 끝내고 몽골 초원으로 쫓겨났다. 몽골을 몰아내고 중국대륙을 한족의 품으로 돌려준 주원장은 1368년 새 제국의 국호를 으로 정했다. 아무 배경 없는 자신의 출신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한족 왕조인 송대의 취약한 황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잘 알고 있는 명태조는 신생제국 안정을 위해 황제 중심의 강력한 독재체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태조는 중앙관제뿐 아니라 지방행정까지도 독재의 원칙을 관철했다. 그래서 만든게 이갑제里甲制. 지역농가들을 갑수호甲首戶라고 부르는 일반농가 100호와 이장호里長戶라는 부유농가 10호로 나누고 이 110호를 묶어 1로 한다. 갑수호는 다시 10갑으로 나누고 이장호가 번갈아 이장을 맡아 각 갑의 대표인 10명의 갑수들을 통해 마을 행정을 담당한다. 이갑제의 이장은 지역의 독재자였으며 중앙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갑제는 황제가 농촌의 지주들과 결탁해 일반농가들까지 지배하기 위한 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