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에 가까운 고려의 치열한 항쟁을 물리치고 1258년에 고려를 정복한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자고 했다. 바쿠후는 거부했다. 1274년 몽골과 고려연합군은 900척의 함선과 3만3천명의 병력으로 원정을 출발했다. 원정군은 쓰시마와 이키를 순식간에 정복하고 규슈에 상륙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태풍은 산더미 같은 해일을 동반하면서 정박해 있던 몽골군의 선박을 궤멸시켜버렸다. 군대는 남은 함선을 추슬러 간신히 귀환했다. 하지만 원세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남송을 정복한 뒤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일본에서는 사신을 참수해 버렸다. 2차원정이 결정되었고 원정을 담당하는 조직을 구성했다. 정동행성이다. 4만 명의 몽골군과 고려연합군이 선발대였고 남송군 10만여명이 후발대로 편성되었다. 이번에도 태풍이 도와주었다. 하늘의 도움으로 강적을 물리친 바쿠후는 그 태풍을 신풍이라 불렀다. 신품은 일본 발음으로 가미가제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을 공격한 자살특공대의 명칭이기도 하다.
반전제가 무너지면서 탄생한 소규모 자영농, 즉 백성 묘슈들은 정치상황이 격동하는 동안 꾸준히 성장해 왔다. 장원의 다이묘들도 예전처럼 촌민들을 자기 수족 부리듯 대하지 못하고 타협해야 했다.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순진한 무사들이 지역에서 자리 잡기 어려워졌다. 바쿠후의 물리적 토대인 고케닌(무사)들은 전쟁이 끊기면서 본업이 사라지자 각자 알아서 활로를 찾아야 했다. 전쟁이 끝나면서 할 일이 없어진데다 궁핍해지고 피폐해진 무사들은 집단을 이루어 깡패집단을 변해갔다. 다이묘들은 이런 무사들의 집단과 농민들이 조직한 저항체인 소를 아쿠토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했다. 당시 천황인 고다이고는 바쿠후들을 타도하려는 뜻을 품고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지방호족과 다이묘들의 봉기, 농민들의 소所와 몰락한 무사들의 아쿠토 등도 들고 일어나서 전국은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졌다.
각고의 노력 끝에 권력을 잡은 고다이고 천황은 연호를 건무로 고치고 천황정치를 부활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쿠후 타도에 앞장섰던 무사들의 논공행상에서 실패하여 불만을 샀다.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위해 대규모 건축사업을 일으킨 것도 실책이었다. 이런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인물은 아시카가 가문의 수장인 다카우지였다. 다카우지는 천황세력의 호족들을 제압하고 교토를 점령해 고다이고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1336년 교토에서 다시 바쿠후를 수립했다. 가마쿠라에 이어 두 번째 무사정권 무로마치 바쿠후다. 고다이고는 교토를 탈출해 남쪽 요시노에 틀을 잡고 새 조정을 구성했다. 일본조정은 다카우지가 옹립한 고묘천황과 고다이고 천황으로 나누어졌다. 이때부터 바쿠후가 지원하는 북조와 아시카가를 반대하는 일부 가문들이 뭉친 남조가 대립하게 되는데 이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고다이고가 죽자 무로마치의 3대 쇼군인 요시미쓰의 강요로 남조의 천황이 북조에 제위를 넘기는 형식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요시미쓰의 시대는 무로마치 바쿠후의 전성기였다. 그는 바쿠후 권력을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바쿠후 체제 안정에 필요한 여러 행정기구들을 정비했다. 이 시대에 일본이 전통적인 문화 다도가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무사들을 중심으로 불교의 선종이 크게 유행했다. 명상을 중시하는 선종에서는 졸음을 쫓는 수단으로 차를 마시는 것이 널리 퍼졌다.
12세기부터 동북아시아의 해상에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일본이 남북조시대 동안 중앙정부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 무렵 일본 서부해안 지역주민들의 상당수가 왜구로 변하면서 중국과 한반도의 해안 지대를 수시로 침탈했다.
무로마치 바쿠후는 권력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슈고(무사신분의 지방행정관)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슈고를 휘하에 복속시키면 유사시 군사를 모으기도 쉽고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슈고는 전통 장원의 영주들을 잠식하면서 대영주로 성장했다. 슈고 출신이 다이묘가 되었기에 그들을 슈고 다이묘라 불렀다. 사회적 계층 분화로 성장하였고, 신품종 벼와 삼모작 등 농업기술발달로 부유해진 백성 묘슈(지주)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남북조시대 이래 50여년간 소규모 반란 외에는 비교적 안정을 누린 바쿠후는 1467년 둘로 편을 갈라 치열하게 내전을 벌였다. 쇼군 직의 계승을 둘러싸고 호소카와와 야마나가 맞붙은 것이다. 이것을 ‘오닌의 난’이라고 부른다. 전국 각지의 슈고 다이묘들이 복잡하게 연루되면서 11년간이나 질질 끌었다. 다이묘와 무사들은 천황만이 아니라 쇼군 조차도 이빨 빠진 호랑이로 보았다. 당시 생겨난 말이 하극상이다. 오닌의 난으로 시작된 하극상과 전란의 회오리는 다이묘와 무사들이 영토전쟁으로 바뀌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한 세기동안 일본 전역은 전란으로 얼룩진 센고쿠戰國 시대로 접어든다.
기존 전통이나 서열, 권위는 무시되고 오로지 실력이었다. 슈고, 다이묘, 고쿠시, 백성 묘슈 누구든 경제적 부와 대세를 읽는 눈을 가진 자는 대영주가 될 수 있었다. 하극상시대가 한 동인 지속되면서 점차 세력의 우열이 드러났다. 남은 것은 센고쿠 다이묘들이었고 그들 가운데서도 빛나는 별은 오다 노부나가였다. 노부나가는 세력가문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무로마치 바쿠후 마저 제압하는데 성공했으나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죽임을 당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에도 바쿠후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모두 당시 노부나가 부하였다. 16세기 중엽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에 철포를 전한 덕분에 총과 화약이 당시 전쟁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량의 조총과 탄약을 조달할 수 있는 경제력이 전쟁의 관건이었다. 센고쿠 시대 다이묘들은 대규모 상비군들을 필요로 했으며 군대 지휘관만이 아니라 하급 무사까지도 전문전투 집단으로 충원했다. 조총을 비롯한 무기의 발달, 역사상 최초의 열도통일, 전후 남은 대규모 상비군, 이 세 가지 변수는 향후 일본의 거취를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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