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645년 다이카 개신으로 고대국가 기틀을 갖추고 당대의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중국의 당제국은 동북아시아의 패자 일뿐 아니라 세계적 선진국으로 일본이 모방모델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한반도가 고대 삼국으로 분리되어 있을 때 백제로부터 당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섬이란 양면적 조건이다. 외부의 침략을 막기에 더 없이 좋지만 폐쇄적일 수 있게 때문이다. 곧 일본민족은 열도에 갇혀 지내려하지 않고 외부의 영향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뒤 일본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당의 문물과 제도를 직수입하기 시작했다. 당의 제도를 모방해 율령을 만들고 당의 수도인 장안을 모방해 헤이조를 건설했다. 다이카 개신으로 탄생한 율령체제의 경제적 토대는 모든 토지가 국가 즉 천황의 것이라는 공지제空地制였다. 왕토사상은 동북아시아 문화권에 내재되어 있다. 이전 왕ㆍ조의 경제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제국공신을 비롯한 새 정치세력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좋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라를 접수한 고려, 고려를 타도한 조선은 초기 왕토사상을 표방하고 나섰다. 처음에는 관리들에게 녹봉으로 토지점유권만 인정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소유권을 인정하게 된다. 왕토사상이 이념적으로 유지되지만 현실적으로 무력화되어 버린다.
공지제가 무너지면서 토지 소유자인 묘수가 늘어나자 형식상 토지 소유자인 국가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차라리 토지 소유를 인정하고 조세를 부과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국가는 묘수를 과세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율령체제를 확립한 주체는 다이카개신에서 공을 세운 것은 후지와라 가문이었다. 일본 정치는 귀족지배 체제였다. 천황은 물론 절대적 권위를 가진 존재였지만 상징적 권력자였다. 천황은 실력가문과 결탁하지 않으면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후지와라가문은 천황을 등에 업고 자기들끼리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여러 차례 반란으로 수도를 교토로 옮긴다. 교토는 400년간 정치문화중심이 되는데 이를 헤이안 시대라고 한다. 다이카 개신이후 일본토지제도는 반전제班田制였다. 농민 개개인에게 토지를 할당하는 제도였다. 국가 재정을 충당하고 귀족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였다. 그러나 조용조租庸調의 세금이 지나치게 무거웠다.(조는 토지세, 용은 부역, 호구 세) 특히 가혹한 것은 용, 즉 부역이었고 가장 심한 것은 병역의 폐해였다. 구분전을 경작하는 것은 농민들의 의무였다. 농민들이 도망치자 병역의무제가 사라졌다. 병역의무제가 사라지면서 귀족들의 사병화가 활성화 되었다.
중국 당이 무너지는 과정과 동일하다. 당의 부병제 역시 획기적이었으나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달아나면서 무너졌다. 그 결과로 지방 호족의 군벌인 번진이 생겼고 이 번진들의 반란 때문에 당은 결국 망하게 되었다. 호족들은 자기 장원내의 백성들을 무장시켜 사병조직을 강화했는데 이것을 로도郎當라고 불렀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일본말로 낭인郎人이라고 하는데 일본 발음으로 로닌이다. 실제로 깡패와 다를 바 없었다. 일본의 로닌 집단이 명성황후를 살해 한 것이다. 이렇게 독자적 경제력과 무장력을 합법적으로 갖춘 전통의 씨족세력, 귀족가문들은 자기들끼리 치열한 세력다툼에 나섰다. 일본 특유의 내전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당대 실력가인 후지와라 가문은 자기 딸을 왕후로 넣어 외손을 천황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중앙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후지와라 가문은 폭정으로 내달렸다. 후지와라 가문은 일본 특유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확립한다. 그들이 거느린 사병조직이 사무라이다. 사무라이는 옆에서 받드는 자라는 뜻이다. 이후 무사계급의 대명사가 된다. 1068년 고산조가 천황으로 즉위했다. 후지와라의 심한 견제를 받고 있는 그는 후지와라 가문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산조 뒤를 이은 천황은 시라카와다. 그는 후지와라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실권을 갖게 된다. 후지와라 독재가 끝난 뒤 형세는 후지와라 셋칸(섭관:천황이 어리거나 병약할 때 정무를 대행), 귀족 그리고 유력 사찰들이 조직한 무장승병 집단까지 일어나 오리무중에 빠졌다. 일본전역은 여러 세력의 사병조직 간에 무력충돌이 빈발했다. 혼란의 와중에 후지와라 무사단이었던 미나모토 가문과 천황측의 사병조직인 다이라 가문이 떠올랐다. 귀족들 휘하에서 대리전을 수행하던 무사들이 자기들끼리 패권을 다툰 전쟁이 헤이지의 난이다. 이 전쟁에서 다이라 가문이 이겨 권력을 손에 넣지만, 마나모토 가문의 열세 살 요리모토는 훗날 다이라에게 복수를 하고 최초 쇼군이 되어 바쿠후 세력을 수립했다. 일본에서 무장세력이 집권할 무렵 고려무신 정중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 시대를 열었고, 100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다.
일본이 진통을 겪은 것은 동북아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한동안 국제 질서의 핵심이었던 당제국은 8세기 중반 안사의 난 이후 당말 오대의 말기적 증상에 시달렸다. 통일 신라는 당과 함께 중앙권력이 무너지고 혼란기에 빠졌으나 일본은 당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으로 전환한다. 한동안 중국풍을 모방하였지만 급선회하게 된다. 종전을 당풍이라 하면 새로운 풍조를 국풍國風이라 부른다. 불교는 초창기 국가 지원을 받는 호국불교였다면 다이카개신 이후 귀족지배기를 거치면서 개인적 질병이나 재앙을 막아주는 주술적 용도를 가지게 되었다. 주술과 기도를 특징으로 하는 진언종이 널리 퍼졌고 천태종이 밀교처럼 변질되었다. 훗날 일본의 불교가 무속이나 민간신앙, 혹은 일본 고유의 神社신앙과 뿌리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된 것도 바로 이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일본이 독자노선으로 전환하면서 얻게 되는 귀종한 유산이 일본 문자인 가나假名다.
미나모토를 무찌르고 권력의 핵심세력으로 오른 다이라 기요모리는 순수한 무장이었으니 정치와 행정 경험이 없었다. (고대에는 어느 나라 역사든 근친혼이 잦았다.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는 사로 장인-사위이자 처남-매부였고,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왕건에게 누이를 시집보냈고, 앙건은 그 딸을 경순왕에게 보냈다. 우리 역사에서 근친혼이 사라진 것은 유교문화가 꽃피운 조선기대부터이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기요모리가 능한 것은 권력을 차지할 때까지였다. 힘으로 권좌에 오를 수 있다면 더 힘센 자가 나타나면 권좌를 내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이라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다이라 가문은 독재와 폭정을 일관했다. 자연히 정권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핵심저항 세력이 미나모토 가문이었다. 기요모리가 죽자 다이라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다이라는 안토쿠 천황과 고시라카 상황을 데리고 후퇴했다. 고시라카가 가문에 등을 돌리고 도망쳐 미나모토 측에 붙은 것이다. 그는 상황이라는 자격을 이용해 손자인 고토바를 천황에 올렸다. 두 명의 천황이 공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요리모토 동생인 요시쓰네가 단노우라에서 다이라와 최후의 해전을 벌여 적을 궤멸시켰다. 오랜 전란은 끝났다. 후지와라 시대부터 한 세기에 걸친 내전이었다. 일본의 패자가 된 요리모토는 다이라 기요모리보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생들이자 자신을 권좌에 올려준 일등공신들인 요시쓰네와 노리요리를 죽여 권력 다툼이 싹을 잘랐다. 요리모토는 과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를 시작했다. 바쿠후정치幕府다. 가마쿠라에 최초의 바쿠후를 연 요리모토는 1192년 쇼군이 된다. 초대 바쿠후 지배자인 초대 쇼군이었다. 완전한 바쿠후 시대는 그로부터 200년 뒤의 일이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의 한축과 실권자를 중심으로 하는 또다른 권력의 한 축이 병존하는 이중권력이 성립된 묘한 일이다. 쇼군조차도 한때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권력이 바쿠후 내부에서 과점되었다. 천황은 이후의 역사에서 현실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결집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며, 19세기에 바쿠후가 무너지면서 현실정치에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지도자가 죽게 되면 혼란이 뒤따르는 법이다. 요리모토가 죽자 바쿠후 정권은 위기를 맞게 된다. 쇼군의 가문은 요리모토 사후 20년 만에 대가 끊기고 바쿠후는 완전히 호족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당시 교토에서는 고토바 상황이 원정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는 바쿠후를 제거할 호기가 왔다고 믿었다.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바쿠후와 맞서주기를 기대한 전국의 무사들은 오히려 바쿠후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조큐의 난으로 바쿠후가 천황을 눌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토와 바쿠후로 나뉘었던 이중권력은 사라지고 바쿠후 독재시대가 열렸다. 조큐의 난 이후에도 바쿠후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신적인 권위를 지닌 천황과 달리 바쿠후는 실력을 밑천으로 삼았으므로 천황만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특히 호족들을 비롯한 고케닌들은 바쿠후와 종전과 같은 결집된 충성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런 허점들을 해소하기 위해 무사들은 불교와 신사라는 신앙을 발전시켰다. 12세기 말에 호넨이 창시한 정토종은 종래 정통 불교와 달리 계율과 교의에 집착하지 않고 염불만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폈다. 정토종은 농민들과 무사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졌다. 신사는 천황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무사들을 정신적으로 단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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