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에 진출한 북방민족들은 유연이 한漢을 부활시킨 것을 필두로 전통적인 국호들은 총동원해 나라를 세웠다. 조趙, 연燕, 진晉, 진秦 등 춘추전국시대 유명한 국호들이 부활했다. 이 10여개 나라들 원조와 구분하기 위해 후대 역사학자들은 국호 앞에 전, 후, 동, 서, 남, 북 등의 접두사를 붙었다. 이후 50년간 분열이 이어진 끝에 마침내 439년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북중국 거의 전역을 통합하였다.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 왕조는 아니라 해도 남중국과 북중국에 각각 통일왕조가 들어선다. 약 150년 동안 중국은 중원의 북위와 강남의 송이 공존하는 남북조 시대를 겪게 된다. 북부의 이민족 정권들은 5호 16국 시대부터 기본적으로 중국화 정책을 추구했다. 둔전제는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둔전제를 보완한 것이 균전제이다. 균전제는 모든 토지는 국가 소유이며 국가가 토지를 농민에게 지급하고 경작 시켜 일정한 비율의 세금을 받는 방식이다. 규전제 시행으로 국가는 농민들을 정착시킬 수 있었고 안정적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균전제는 수, 당과 같은 통일제국에 계승되었다.
남조의 네 나라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은 평균 수명이 40년 밖에 안된다. 중원의 호족들과 지식인들이 이민족을 피해 대거 남하하면서 강남지역의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삼국시대의 오吳와 동진東晋, 그리고 남조의 네 나라를 합쳐 6朝라고 부른다. 수많은 문장가와 화가가 출현해 창작과 비평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예술이론을 정립했다.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왕희지, 회화의 사조인 고개지, 시인 도연명 등이 모두 이 시대 활동한 예술가들이다. 6조시대 문학과 예술의 기본골격은 당 제국에 계승되어 당을 중국 시문학의 최고봉으로 올려놓는데 기여했다. 이 시대 문화현상 중 주목할 것은 사상의 발달이었다. 유가에 대한 반발로 성행한 것이 도가, 즉 노장 사상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노자와 장자를 원조로 하는 도가사상은 유가처럼 국가를 중심으로 보지 않고 개인을 위주로 여긴다는 점에서 6조 귀족들의 체질에 맞았다. 사회불안이 가중되고 전란이 잦은 시대였기 때문에 귀족들은 어지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도가사상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이 시대의 중요한 사상적 변화는 불교가 도입된 것이다. 당시 귀족들은 노장 사상에 심취했었기 때문에 도가적 관점에서 불교를 보았다. 불교의 空을 도가의 無로 해석했다. 불교는 도가보다 체계적이고 조직화 가능성이 컸다. 덕분에 불교는 노장사상을 누르고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불교의 도입으로 중국인인들은 육신만이 아닌 영혼과 영원의 문제를 고찰하게 되었다. 불교는 동진 시대에 크게 성행했고 이어 남북조시대에 접어들면서 귀족만이 아니라 서인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중국의 불교는 이 시기에 한반도로 전래되었다.
후한이 멸망한 때부터 6세기 말까지 수백 년간의 분열기에는 하나의 왕조가 오래 지배하지 못했다. 북조의 마지막 나라인 북주北周의 귀족 양견이 새로이 통일제국 수隋를 세웠다. 수제국은 40년도 채 못 되어 당국으로 교체된다. 800년 전의 진, 한 교체와 같다. 수제국은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기 위해 대운하를 건설하여 명실상부한 통일제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운하 건설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중국의 분열기에 북방의 오랑캐도 힘을 쌓아 강성해졌다. 한 무제 이후 흉노가 사라진 북방에 돌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 문제는 이간책을 구사해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시켜 세력을 약화시켰다. 흉노의 경우도 그랬지만 수제국이 돌궐을 압박한 것은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민족 대이동을 낳았다. 서돌궐은 흉노처럼 비단길을 거쳐 중앙아시아로 갔다. 명칭이 돌궐에서 음차 되어 튀르크로 바뀌었다. 투르크는 서아시아 이슬람과 융화되어 족장의 이름을 따라 셀주크, 오스만 같은 명칭을 달게 되었다. 오스만 튀르크는 서쪽 동유럽의 동로마제국을 정복했다. 1000년 전의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과정이 비슷하다. 결국 한과 수의 북방 이민족의 압박정책으로 두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역사는 이처럼 어떤 행위가 무의식작인 결과를 낳는다.
돌궐보다 더 변방에 더 막강한 상대가 있었다. 한반도의 고구려였다. 수 문제는 한 차례 고구려 정벌을 나섰다가 실패한 뒤로 포기했지만, 양제는 대운하를 믿고 어마어마한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 침공하기 위해 나섰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참패했다. 복수에 불탄 양제는 제3차 고구려원정을 준비했지만 민심이 등을 돌리고, 전국 각지에서 무수한 반란이 일어나자 포기했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변방을 담당하던 수의 장수 이연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唐 제국을 세웠다. 당고조 이연은 수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했다. 당을 건국한 이연과 그의 아들 이세민은 한반도에서 조선을 건국한 이씨 부자와 여러모로 닮았다. 이방원이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연의 아들 이세민 역시 황태자로 책봉된 형과 아우를 죽이고 황위를 물려받았다. 신생국을 반석에 앉힌 태종은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걸출한 군주였다. 그의 재위 시절 23년간은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불리는 번영기였다.
당시 장안은 비잔티움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세계 최대의 도시국가였다. 당 태종에게도 숙제가 있었다. 고구려 정복이었다. 고구려원정 때 안시성 주인인 양만춘의 저항에 막혀 물러나고 말았으며 화살에 맞아 한쪽 눈까지 실명하고 말았다. 그 원한을 그의 아들 고종이 푼다. 고종은 고구려와 직접 맞붙지 않고 신라와 손을 잡고 먼저 백제부터 공략했다. 백제를 멸망 시킨 뒤 667년에 고구려를 정복했다. 하지만 고종은 무기력한 인물이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은 무조라는 후궁이었다. 그 여성은 당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태종이 죽을 무렵 고종의 애첩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여제 측천무후다. 그녀는 아들을 내세워 중종과 예종을 황제로 삼았다가 폐위하고 690년 직접 제위에 올랐다. 예종의 아들 이융기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복위시킨다. 태자의 지위를 찾은 이융기는 아버지가 죽자 제위에 오른다. 당의 6대 황제 현종이다. 현종의 치세를 개원開元의 치라고 부른다. 이 무렵 당은 정치도 안정되고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 전성기를 맞았다. 치세 40년이 되자 현종은 며느리인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등한시한다. 양귀비 6촌 오빠 양국충을 중용한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을 부른다. 양국충과 사시가 좋지 않던 절도사 안녹산은 755년에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이 장안을 함락시키자 현종은 쓰촨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당 초기에는 변방에 도호부를 설치했지만 이민족 침입이 잦아지자 감당할 수가 없어 더 강력한 경비체제로 절도사를 두었다. 절도사는 군사권만이 아니라 행정권과 재정권도 가지고 있어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절도사 안녹산은 손쉽게 장안을 함락할 수 있었다. 중앙이 튼튼하다면 절도사는 좋은 수비형태다. 하지만 안녹산의 난 이후 중앙정부가 힘을 잃자 절도사들은 국경을 수비하는 게 아니라 중원을 위협하게 된다. 절도사는 점차 번진으로 성장했고 가장 힘이 센 절도사가 당 제국을 접수하게 된다.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 불안요소는 외척과 환관이었다. 원래 환관은 개국 초부터 황실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는 집단이었는데 현종 때부터 직접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세력이 정점에 오르게 되면 자기들끼리 다투기 마련이다. 환관들은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당쟁을 벌였다. 9세기 초반 덕종이후 당 제국이 문을 닫는 901년까지 100년 동안 열한명의 황제들 중 한명만 제외하고 전부 환관들이 옹립했다.
정부 재정이 악화되자 재정을 늘리기 위해 소금 전매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소금을 전매한다는 방침에 소금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제국에 결정타를 가한 것은 황소라는 소금장수의 난이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희종이 쓰촨으로 달아났다. 당시 당에 유학중이던 신라의 최치원은 ‘토황소격문’이라는 명문으로 당의 조정을 감격시켰다. 절도사 이극용이 군대를 몰고와 황소 세력을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공을 세운 자가 황소 휘하에서 투항한 주전충이었다. 정부는 주전충을 절도사로 임명해 이극용을 견제하려 했다. 여기서 승리한 주전충은 황궁으로 쳐들어가 환관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허수아비 황제는 주전충에게 제위를 선양할 수밖에 없었다.
당의 멸망 후 907년부터 960년까지 다시 분열기를 맞았다. 그 분열기를 5代10國시대라고 한다. 남북조시대 도입부에 해당하는 5호 16국 시대와 이름도 비슷하고 양상도 많이 닮았다. 5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로 이어지는 북방 이민족들의 다섯 개 중원왕조이며, 10국은 전촉, 후촉, 형남, 초, 오, 남당, 오월, 민閩, 남한, 북한 등 주로 당 말기의 절도사들이 세운 10개 지방왕조를 가리킨다. 그 무렵 한반도는 중국처럼 후자를 붙여 옛 왕조의 계승을 자처하던 시대였다. 신라말기 궁예는 후고구려, 견훤은 후백제를 세워 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를 열었다. 한반도 역사는 중국 상황 특히 한족 왕조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국이 삼국 정립기와 남북조 시대를 거칠 무렵 한반도는 삼국시대였고, 당송 교체기에는 후삼국시대였다. 이후 중국이 남송으로 약화된 시기에 고려에 무신정권이 들어섰고, 원에서 명으로 교체될 때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점차 강한 군벌의 휘하로 작은 군벌이 모여들더니 통일 기운이 무르익었다.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이 황제로 추대되어 宋제국을 세웠다. 당 제국이 귀족 지배체제였다면 송 제국은 관료제 사회였다. 과거제로 관료로 임명된 이들 신흥지배세력을 사대부라고 불렀다. 원래 사대부란 봉건제의 주나라 시절 公(제후), 경卿 아래의 지위인 大夫와 士에서 나온 말이지만, 후대에 오면서 의미가 달라졌다. 과거제는 당 제국시대 효율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당과 송, 두 나라 과거제는 상당히 달랐다. 당 시대에는 과거제에 합격해도 문벌귀족들의 구술시험을 쳐야 했다. 송의 과거제는 지방예선을 거친 합격자들을 황제가 직접 관장하는 전시를 치뤄 초종합격자를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문치주의를 실시한 덕분에 송은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의 제국이 되었다.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은 그 이후까지 포함해 중국 역사상 송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 송의 문치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문화적 현상은 학문의 발달이다.
송대에는 특히 유학이 크게 발전했다. 유학이 불운했던 이유는 고비마다 환관이나 외척 귀족 등 기존정치 세력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대 황제외 기득권층은 유학을 환영하지는 않았다. 유학적 세계관이 천자 중심구조이고 기득권층은 천자를 보필하는 관료세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대 200년에 걸쳐 문벌귀족이 크게 약화되었고 부패한 환관세력이 주전충에게 모조리 도륙 되었다. 그전까지 유학과 달리 송대는 단순한 국가통치이념이 아닌 철학적 체계성도 확보했다. 우주의 본체를 태극으로 보고 음양설과 오행설을 세운 주돈이를 비롯해 소옹, 장재, 정호, 정이 형제는 후대 북송5자로 불린다. 이들이 정초한 유학이론은 남송의 주희朱熹에게서 집대성된다. 주희는 태극을 理를 불변의 이치, 만물의 존재근거로, 음양과 오행을 氣를 가변적 요소로 만물의 운동원리로 보는 이기론理氣論과 성리론性理論을 정립했다. 이것이 성리학 또는 주자학이라고 불리는 송학의 완성판이다. 주희는 나아가 불변의 理를 한족으로 가변의 氣를 이민족을 환치하였다. 한족은 모든 것의 중심이며 이민족은 오랑캐라는 것이다. 주희가 정립한 신유학은 중화사상의 요체였다.
송대에는 학문과 예술만 발달한 게 아니었다. 도시와 상업의 성장으로 시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지고 서민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며 해외무역도 크게 번영하였다. 동양 4대 발명품 가운데 종이는 후한대인 2세기에 발명되었으나 화약과 나침판, 활판인쇄술은 모두 송대에 발명되었다. 문민정부를 토대로 학문, 예술, 산업, 과학기술까지 두루 발달했으나 송은 강국이 되지는 못했다. 당대 이후 중화세계를 둘러싼 비중화세계가 강성해졌다. 송이 건국될 당시 북방민족의 판도는 거란족이 세운 중원 북쪽의 요와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 세운 서북쪽의 서하西夏로 양분된 상태였다. 거란의 요는 문화적으로 결코 후진국이 아니었다. 그들은 거란문자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불교를 발전시켜 대장경도 조판했다.
아직 신생국인 송의 입장에서 북방의 동향은 잠재적 위기 상황이었다. 대외적으로 안정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태조는 요와 무역을 계속하면서 평화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태종은 두 차례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요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송은 국경을 폐쇄하고 통상을 단절하였는데 요는 송의 보복조치에 군사보복으로 대응했다. 그 불똥을 그의 아들 진종이 떠안았다.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양측은 화의를 하였다. 그 결과 송은 요의 상국, 형님나라라는 명분을 얻었고 요에게는 매년, 은 10만냥과 비단 20만 필을 주기로 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송의 대외관계는 서하와의 접촉에서도 되풀이 되었다. 서하의 탕구트족과도 같은 과정을 거쳐 화의정책으로 송은 상국의 명분을 얻고 대신 매년 은 5만냥과 비단 13만 필을, 차 2만근을 주고 무역을 재개하기로 하였다. 송의 이러한 대외정책으로 굴욕감과 더불어 막대한 재정적 피해가 내치에서도 위협요소로 작용하자 제국 내에서 점차 자성의 소리가 높아졌다.
화려한 문화의 선진국인 송이 물리력이 약하게 되어 쇠락衰落의 징후를 보이자 개혁이 필요했고 이때 등장한 것이 왕안석의 신법新法이다. 스무 살 청년 황제 신종은 적극적인 지원으로 발탁된 왕안석은 공격적인 부국강병책을 전개하였다. 혁명으로 누군가 이익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되어있다. 왕안석의 신법에 전통 기득권층이 반발했다. 반발세력은 개혁파와 보수파로 나뉘었다. 개혁파는 신법을 지지하면서 민중의 성장이 부국강병의 요체라 하였고, 보수파는 정치란 사대부를 위한 것이지 서민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으로 팽팽히 맞섰다. 신법으로 더욱 격렬해진 송대의 당쟁은 마침내 송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송제국이 당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요에도 강적이 출현했다. 요에 복속되어 있던 여진족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요의 국세가 약해지는 틈을 타서 아골타는 여진부족을 통합해 금을 세웠다. 송은 금을 반겼다. 1125년 송은 금과 함께 요를 멸할 수 있었지만, 그 결과 더 강적과 마주치게 되었다. 송의 정세를 파악한 금은 카이펑을 포위하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와 황족, 후궁 등 3000여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것을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송은 휘종의 아들과 대신들이 강남으로 도피해 송의 명맥을 유지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때부터 원래 송을 북송이라하고 강남의 송, 남송이라고 부른다. 남송도 북송과 비슷한 153년 동안 존재했지만 영토도 크게 줄었고 민족적 자부심도 더욱 줄어들었다.
송이 한반도와 닮아있다는 것은 당쟁에서도 드러난다. 사대부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 비슷하다. 17세기 조선에서 서인과 남인이 격돌한 예송논쟁과 비슷한 당쟁이 송에서도 있었다. 송과 조선은 대외관계에서도 비슷하다. 송은 요와 서하에 재물을 주고 상국이라는 명분을 유지했다. 조선의 여진과 왜의 외교정책인 교린정책(큰 나라는 섬기고, 이웃 나라는 사귄다)과 비슷하다. 조선은 왜구를 먹이느라 매년 쌀 1만석을 주었고 여진에게는 토지와 가옥, 노비를 주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송에 왕안석의 신법이 있다면, 조선에는 조광조의 개혁이 있었다. 송이 요와 금의 공격을 받았을 때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대결했다면, 조선은 청의 침략을 당했을 때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대신들 의견이 대립했다. 둘 다 주화론을 택했다. 금에 억눌린 남송과 청에 항복한 조선은 실현 가능성 없는 북벌계획을 수립했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