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인 마우리아왕조는 기원전 322년부터 기원전 187년까지 불과 150년밖에 존재하지 못했다. 마우리아를 비롯해 인도의 역대 통일왕조들은 중국이나 유럽의 제국에 비해 그다지 강력한 힘을 지니지 못했다. 남인도까지 포함한 인도대륙 전체를 강역疆域으로 하는 국가가 출현한 것도 근대에 와서이다. 인도의 역사에서 중국처럼 대륙전체를 통일하려 애쓴 제국이 없었다. 여기에는 지리적 요인이 크다. 중국대륙에는 중원이라는 중심이 있으나 인도대륙 한복판에는 중원 같은 곳은 없고 거대한 데칸고원이 교통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인도는 고대부터 해안을 중심으로 많은 소국가가 발달했다. 인도 역사를 지역으로 구분하면 북인도와 남인도 그리고 데칸고원이 자리 잡은 소국가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중세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역대 통일제국이나 큰 세력을 떨친 왕조들은 주로 북인도를 지배했고, 남인도는 독립적인 역사를 꾸렸다. 데칸고원을 활동무대로 하는 소국가들은 북인도와 남인도의 완충지대역할을 했다.
건국자 찬드라굽타에 이어 그 손자 아소카왕의 치세에 마우리아는 최전성기를 맞았다. 인도역사에서 걸출한 영웅으로 꼽히는 아소카는 젊은 시절 군사력을 앞세워 정복전쟁을 많이 벌였다. 그러나 칼링가전투에서 무수한 인명이 살상 당하는 비국을 겪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 후 종교사절단을 만들어 비폭력과 자비에 의한 정치를 펼쳤다. 왕국의 영토만 황제의 직할지로 두고 나머지 영토는 총독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었다. 중앙의 황제와 지방총독 간 연락 시스템을 통해 국가조직이 운영되는 일종의 종주국-속국 같은 봉건제였다. 마우리아는 서쪽으로 펀자브, 동쪽으로 벵골을 넘어 지금이 미얀마에 이르는 강역을 구축해 오늘날 인도보다 넓었다. 중국의 통일제국과 달리 문자나 화폐의 전국적인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중앙집권이 미약했으므로 황제의 능력에 따라 제국의 운명이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아소카 왕이 죽자 마우리아 제국은 여러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다. 인도의 왕조들은 대체로 시작과 끝이 중국처럼 분명하지 않다. 인도의 역대왕조들은 바통 터치가 없다. 인도역사는 어느 왕조가 멸망했다기보다 쇠퇴, 분열, 해체 같은 표현이 더 어울린다.
마우리아가 멸망한 뒤 4세기에 굽타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인도는 500년간 분열기를 겪게 된다. 이 시기에 이민족의 침략도 잦았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알렉산드로스 원정이다. 그는 잠시 펀자브 지방을 장악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인들 일부가 인도에 눌러앉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일찍이 아소카왕조 시절에 인도의 서북부에는 그리스계의 박트리아와 파르티아(안식국)가 발흥하고 있었다. 중국 한 무제의 압박정책으로 중국에서 밀려난 흉노가 서쪽으로 진출해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대월지를 밀어낸 것이다. 대월지는 아프가니스탄에 자리 잡고 있던 이란계 유목민족인 사카족을 밀어냈다. 터전을 잃은 사카족은 인도 쪽으로 남하하여 그곳에 있던 박트리아를 멸망시켰다. 이런 도미노 현상으로 사카와 파트리아는 지금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손에 넣었다. 멸망한 박트리아에서 쿠샨족이 일어났다. 쿠샨의 카드피세스 1세는 인근부족들을 통합해 펀자브지방을 중심으로 쿠샨왕조를 열었다. 이리하여 1세기 무렵에 인도의 서쪽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지방에는 파르티아가 자리 잡고 인도 서북부와 북인도에는 쿠샨이 지배하는 형국이었다.
쿠샨왕조는 2세기 중반 카니슈카 치세에 전성기를 맞았다. 동쪽으로 갠지스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히고 남인도의 상당부분까지 장악해 거의 통일왕조를 구축했다. 쿠샨왕조는 통일제국이라 할 수는 없어도 마우리아 제국보다 한층 확고한 기반을 갖추고 인도를 대외적으로 알린 나라였다. 그는 정복사업뿐만 아니라 학문 활동을 적극 후원하고 불교진흥도 열심이었다. 특히 수도인 페샤와르가 있는 간다라 지방은 동서문명이 융합하는 중심지였다. 불교는 원래 무신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나 아소카 시절에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되면서부터 정식교단이 필요했다. 개인적 수양을 강조하는 무신론으로 교세를 확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부처를 신의 화신으로 섬기는 대승불교가 발달했다. 쿠샨왕조가 지속적으로 발달했더라면 마우리아를 능가하는 제국으로 면모를 갖추었을 것이다. 동서 문물의 활발한 교류는 쿠샨에 약도 되었지만 병도 가져왔다. 지리적 요충지에 있다는 자체가 힘이 강할 때는 중심이 되지만 약할 때는 먹잇감이 된다. 3세기 초반 쿠샨왕조는 파르티아를 대신해 일어난 강국 사산왕조 페르시아에 멸망당하고 만다. 이후 인도는 다시 100년 동안 수많은 소국가로 분열되었다가 굽타왕조에 의해 재통일된다.
쿠샨왕조가 무너진 후 약 1세기 동안 분열상태를 해소한 사람이 찬드라굽타1세였다. (마우리아 건국자도 이름이 찬드라굽타이다) 신생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사람은 사무드라굽타였다. 그의 정복활동으로 벵골에서 인더스 하류지역까지 북인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직접 지배를 받지 않는 남인도와 데칸지방의 소국들도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받쳤다. 굽타왕조는 제국으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나 중앙집권은 미약했다. 흉노의 남하를 간신히 막은 굽타제국은 쿠샨, 사산 등의 민족에게 국경을 침탈당하면서 100년 동안이나 작은 전쟁이 시달렸다. 굽타는 5세기 중반 이후 급속히 쇠퇴했다. 굽타 멸망한 뒤 100여년 동안 인도는 분열과 정치적 혼란의 시대를 맞았다. 난립하던 소국들을 통합하고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바르다나 가문의 하르샤였다. 그는 606년에 즉위하여 카슈미르와 네팔, 발라비 등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북인도를 평정했다. 굽타 제국 재건을 꿈꾸던 바르다나 왕조는 하르샤가 암살당하면서 급격히 몰락한다. 굽타와 바르다나 시절은 인도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문화가 발달했다. 이민족 침탈이 잦은 시대였기 때문에 만족의식이 크게 성장하고 토착문화가 꽃을 피웠다. 인도의 수학과 천문학은 세계첨단 수준이었다. 세계최초로 0개념을 발견했으며 십진법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숫자체계와 십진법은 인도의 것을 아랍세계에서 도입해 로마에 전달했다. 중앙집권이 미약하고 속국들이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것은 인도의 고유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10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인도를 지배하던 시대에 정통적인 문화유적과 유물이 대거 파괴되었다. 神이 하나라 믿는 일신교 이슬람교는 자칫하면 독선적이고 교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일신교에는 다신교에는 없는 난폭하고 무지한 근본주의 원리주의자가 있다. 일신교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금한다. 그러나 우상의 규정이 모호한 탓에 다른 문화나 종교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배척할 수 있다는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문명을 가장한 야만이다. 역대 제왕들은 불교를 장려하고 포교에 힘썼으나 수천 년에 걸쳐 일반 백성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힌두교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굽타제국이 붕괴한 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중심세력이 형성되지 않고 소국이 공존하는 분열시대였다. 다행이도 이 기간 동안 이민족들의 침입이 거의 없었고 비교적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평화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진통이 없이는 새 생명을 탄생 시킬 수 없듯이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태평성대보다는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 유럽에서는 십자군 전쟁으로 중세사회가 해체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대륙 북방의 몽골족이 유사 이래 최대의 세계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세계사 흐름은 13세기부터 시작되는 몽골의 세계제국과 동서교통, 유럽의 대항해시대라는 일련의 흐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세계사적 분위기는 인도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때마침 찾아온 인도의 평화기에 라지푸트가 북인도 중심 세력으로 발돋움했으므로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인도역사를 라지푸트 시대라고 부른다. 남인도 역시 소국가로 분리된 형태였지만 그중에서 촐라왕조가 주목할 만하다. 원래 남인도 자리는 지리적 여건을 이용해 일찍부터 해상무역이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서쪽으로 아라비아와 지중해권, 동쪽으로 동남아이시아와 중국에 이르는 세계적 항로였다. 남인도 무역상들은 주로 로마제국에 후추와 향료, 진주, 보석 등을 유럽에 수출했다. 8세기부터 서부 말라바르해안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무역활동을 하였는데 촐라왕조는 이들을 쫓아내고 남인도 무역을 독점했다.
평화와 안정이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변화에 무뎌진다. 11세기부터 북인도에는 그 어느 이민족보다 더 강하고 무자비한 이민족이 쳐들어왔다. 이슬람세력이었다. 이슬람교가 6세기에 생겨나 순식간에 성장한 과정은 수수께끼다. 이슬람교가 급속히 퍼진 데는 활발한 정복전쟁도 큰 몫을 했지만 아라비아 상인들도 무시할 수 없다. 예로부터 동서교역에서 활약을 한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슬람교는 확산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자리 잡은 가즈니왕국의 마흐무드 왕은 북인도에 침입했다. 마흐무드 침략은 서곡에 불과했다. 가즈니를 타도한 구르왕조의 무이즈-웃- 딘무하마드는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암살당하고 말았다. 무하마드의 총애를 받던 쿠트브-웃-아이바크가 술탄에 올랐다. 아이바크는 델리를 수도로 삼고 정식으로 북인도를 지배했다. 북인도는 터키와 아프가니스탄세력이 번갈아가면서 장악하게 된다. 예전처럼 소국가들이 분립한 시대와 달리 서로 같은 시대에 공존한 게 아니라 정복을 통해 맞교대 했다. 그 나라들을 총칭해 술탄왕국이라 부른다. 남인도까지는 통합하지 못하고 남인도는 라지푸트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소국가들이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다.
불교가 인도를 떠난 굽타시대부터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는 힌두교였다. 타지에서 온 이민족 정권인 술탄국 나라들은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다. 지배층은 자기들끼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였다. 술탄은 모두 전제국주였으나 세습되지 않고 주로 무장들이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이슬람의 침입과 지배로 북인도는 수많은 문화재만 잃었을 뿐, 정치나 행정 쇄신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슬람세력이 델리 술탄국으로 인도를 처음 지배한 경험은 후대 인도역사에서 두 가지 커다란 변화를 낳는다. 하나는 16세기에 강력한 무굴제국이 들어선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인도는 이슬람 세력과 힌두세력으로 나라가 갈라진 것이다.
16세기 초반 아프가니스탄계의 로디왕조가 술탄국의 맥을 잇고 있을 때, 우즈벡 출신의 한 영웅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중앙아시아의 칭기스칸 이었던 티무르의 후후손 바부르였다. 티무르는 14세기 중앙아시아 튀르크족의 지배자인데 몽골이 중앙아시아에 수립한 차가타이 칸국이 와해되자, 그는 혼란을 수습하고 몽골제국의 후예로 자처했다. 그는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남러시아 일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손에 넣었다. 그가 병사한 후 제국은 분할하였고 이것을 총칭해 티무르왕조라고 한다. 이시기에 바부르가 등장한 것이다. 바부르는 로디군대를 무찌르고 델리에 입성했다. 인도역사상 최후의 제국인 무굴제국이 탄생했다. 무굴제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간다라를 포함해 데칸고원 일부, 동쪽으로 벵골까지 장악했다. 무굴제국은 인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통일제국일 것이다. 수명도 인도 어느 왕조보다 긴 200여년에 달했다. 무굴제국은 바부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후미윤은 신흥세력 셰르 칸 수르에 패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달아났다. 후미윤이 다시 델리를 수복하였다. 뒤이어 후미윤의 아들 아크바르의 시대에 무굴은 제국의 기틀을 갖추고 장기적인 번영과 안정을 이루게 된다.
아크바르는 라지푸트의 공주와 결혼해 혈연관계를 맺게 된다. 아크바르는 이슬람세력뿐 아니라 모든 인도인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국민을 다른 종교로 개종 시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크바르는 이슬람과 아스터교, 힌두교 등 여러 종교를 절충하는 정책을 폈다. 아크바르가 도입한 관료제는 만사브다르라고 불린다. 만사브다르는 지방관들이 행정과 아울러 지역군사령관을 겸하는 군정일치 성격의 제도였다. 강력한 군주인 아크바르가 죽은 뒤 아들 자한기르의 치세에 제국은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으나, 그의 아들 샤 자한이 즉위하면서 다시 궤도에 올랐다. 샤 자한은 모계가 모두 힌두왕비였기 때문에 힌두의 피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그는 예술을 사랑했고 왕비 뭄타즈 마할을 추모하며 지은 궁전인 타지마할은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건축물이다. 샤 자한 아들인 아우랑제브는 1658년에 제위에 올라 50년 가까이 인도를 지배했다. 그는 무자비한 정복자였고 권력도 강했다.
아우랑제브 무굴제국의 영토는 사상 최대를 자랑했다. 아우랑제브는 이슬람 중심주의로 노선을 전환했다. 공교롭게도 최대가역을 자랑하던 그의 치세에 무굴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데칸지방에서는 마라타가 크게 일어나 델리 근방을 자주 침략했다. 마라타의 대공세에 속수무책이었던 무굴제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도움을 청했다. 덕분에 마리타를 물리쳤지만 마라타와 아프가니스탄이 대치하고 북인도는 서서히 정치적 공백 사태로 빠져들었다. 이후 영국이 힘들이지 않고 무굴제국을 거의 접수한 형식으로 손에 넣게 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