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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동양사- 중국2

기원전 221년 최초로 중국대륙을 통일한 진의 왕인 정은 과거 제후들의 호칭인 이나 은 적절 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황제皇帝로 바꾸었다. 진시황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하였다. 각 지방을 독립국처럼 다스리던 제후들이 사라졌으니 통치할 행정기구가 필요했다. 황제를 권력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성립되었다. 행정기구만 갖추었다고 통일제국 기틀이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정치행정만이 아니라 사회경제 측면에서도 지역마다 달리 쓰던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하고, 문자도 예전부터 진이 사영하던 전서체篆書體만 사용하게 하였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은 단지 물리적 용도만이 아니라 중화세계의 범위를 한정하는 상징적 의미도 있다.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 지방순례 중 급사하자 권력을 차지한 사람이 환관인 조고였다. 그는 황제 아들을 끼고 권력을 독점했다. 진시황이 죽은 뒤 불과 1년 만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주동자인 진승과 오광은 하급장교 출신이었다. 진승과 오광의 반란으로 통일 이전의 6국 세력들이 각자 자기 지방에서 옛 제국의 계승을 표방했다.

 

옛 초의 귀족 출신 항량은 초의 왕족을 왕으로 옹립하고 백성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세를 떨쳤다. 항량이 전사하자 전권을 인수받은 항우는 관군의 핵심인 장한의 군대를 물리치고 진을 멸망시켰다. 항우와 달리 왕족 혈통도 아니고 변방 하급관리에 불과한 유방이라는 복병을 만나게 된다. 진이 멸망하자 두 사람은 치열한 결전을 벌였고 결과는 유방의 대역전승이었다. 중국을 재통일한 유방은 기원전 202년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한의 고조로 즉위했다. 춘추전국시대 수백 년간의 분열기를 극복하는 첫 단추는 이미 진의 군현제가 제시한 바가 있었다. 평민출신 한고조는 진시황보다 권위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군현제와 옛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君國制를 시행했다. 군현제는 전국을 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 현을 두고 중앙집권을 도모하기에 우리했으나, 군국제는 군의 편제만 그대로 두고 지역에 나라의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었으나 중앙집권을 반쯤은 포기한 것이었다. 군국제는 수도인 장안 부근만 중앙집권제로 통치하고 각 지방에서는 봉건제를 실시하는 절충책이었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초, , 월 등 남중국의 이민족들도 중화질서 속에 편입되었고, 때마침 통일제국이 들어서면 중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세계가 완성되었다. 중국대륙이 분열기에 있을 때는 북방민족에 대한 견제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통일제국이 들어서자 그들이 중원문화의 적으로 변했다. 중국이 역대 통일 왕조는 예외 없이 개국 초 북변을 정리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때로는 그 여파가 한반도에까지 미쳤다. 7세기 수와 당이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며 14세기말 신생국 명이 한반도의 신생국인 조선을 경계한 것도, 17세기초 청이 대륙정복을 눈앞에 두고 후방 다지기 일환으로 조선을 정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대에도 중화세계가 완성되면서 남방의 이민족들은 모두 한족으로 통합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중화의 외부 즉 비중화 세계 오랑케가 된 것이다. 당시 북방민족 가운데 최대 세력을 떨친 민족은 흉노匈奴였다. 농경사회의 수호자인 중원의 통일 제국과 유목사회의 대표자인 북방의 흉노와의 대치는 갈수록 첨예해졌다. 고조가 신생제국 한을 건국했다면 무제는 오랜 통치기간 동안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업그레이드 한 군주였다. 무제는 즉위하자마자 연호부터 제정했다. 역사상 첫 연호답게 기원을 세우다라는 의미인 建元이었다. 연호가 통일되니 자연히 역법曆法도 통일 될 수밖에 없었다. 중화사상에 따르면 하늘의 뜻, 천리를 받은 천자는 중국의 황제 한 명 뿐이므로 아무나 함부로 달력을 만들 수가 없었다. 또한 무제는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공식 선포했다. 사회 전반적으로는 진의 법가사상이 싫증이 난 지식인들은 法家道家 사상을 결합해 黃老사상(황제와 노자 사상 결합)이 팽배해 있었다. 주나라 전통을 계승하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사회질서를 대변하면서도,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있지 않은 신흥학문 유학이 새 질서를 만들어 줄 사상적 무기였다.

 

무제는 고조 때부터 이어오던 화친정책을 버리고 강공으로 나아갔다. 고비사막을 넘어 흉노의 근거지인 몽골초원까지 공략하였다. 흉노정벌로 서역원정을 하게 되었고 장건에게 군사를 주어 서역으로 파견했다. 장건은 지금의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대월지(고대 박트리아)까지 가서 안식국(파르티아)과 페르시아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들어왔다. 장건이 개척한 동서교통로는 당 시대의 비단길이라는 중요한 무역로가 된다. 중국북방에서 밀려난 흉노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도미노처럼 거대한 민족 이동이 빚어진 것이다. 흉노가 중앙아시아로 이동하면서 대월지 부목들이 남쪽으로 밀려나 인도에서 쿠샨왕조를 열었다. 또한 서쪽으로 진출한 흉노의 한 갈래는 소아시와 발칸반도 북쪽을 거쳐 중부유럽까지 갔다. 중부유럽 게르만족은 그들을 훈족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흉노의 압박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켰다. 게르만 이탈리아족은 로마국경을 자주 넘었고 결국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게르만족의 다른 일파인 루마니아의 고트족은 동유럽 끝에서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해 서고트왕국을 건설했으며, 독일의 반달족은 에스파냐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넘어갔다. 중부유럽에 자리 잡은 흉노의 일파인 마자르는 수백 년 뒤 헝가리를 건설하게 된다. 결국 한 무제의 흉노 정벌은 중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셈이다.

 

무제는 남쪽으로는 월남을 복속시키고 동북방면에서 한반도를 공략했다. 한반도의 요동일대의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4군은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 4군 가운데 세 곳은 랴오뚱지역으로 물러났고 낙랑군만 남아있다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점령지를 군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만들고 물러나는 전략은 둔전제라는 중요한 제도를 낳았다. 둔전제는 이후 역대 왕조에서 변방을 수비하는 기본 방침이 되었다. 둔전제는 춘추전국시대 도시국가 체재에서 영토국가 체제로 발전하는데 따른 필연적 제도이다. 거대한 통일제국을 모두 관장하는 기구가 없어서 실무를 담당하는 행정기구 내조內助를 두었다. 내조는 황제 명령을 전달하고 시행하는 중요한 역을 하므로 가족들 외척이 담당했다. 무제 사후 한의 황제들은 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외척의 입김이 거셌다. 내조정치는 외척정치가 된다. 원제 이후부터 왕씨 가문이 외척으로 실권을 잡는다. 그 집안의 왕망이 어린 황제를 마음대로 옹립하다가 요순시대 선양의 향식을 빌어 황위를 빼앗고 신을 건국한다. 외척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나라까지 빼앗는 것을 본 유씨 황실은 각지에서 반란이 속출하면서 다시 나라를 되찾는다.

 

진시황의 분서사건으로 유가의 경전과 주석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런데 한 무제가 유학을 국학으로 장려하지만 교과서가 없었다. 유학자들은 기억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유학경전들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학문 금문학을 정립하였다. 민간에서는 옛날 경전과 주석서들이 나왔다. 이것을 금문학과 대비하여 고문학이라 한다.

 

2세기 초반부터 어린황제들이 즉위하면서 전한을 멸망시킨 경계심도 약해지면서 어린 황제는 섭정이 필요했고 섭정은 외척이 맡았다. 어릴 때 즉위한 황제는 나이가 들면서 친정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외척의 힘을 물리치려면 황제 개인세력 왕당파가 필요했다. 황제가 선택한 것은 환관宦官이었다. 후한은 호족연합정권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지방에서 경제적인 실권자가 된 대지주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넘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느새 중앙정부 힘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커진 지방의 호족들은 본격적인 권력집단으로 성장하면서 문벌귀족으로 발전해갔다. 부패한 외척, 환관 정치에 호족들의 등쌀이 더해지고 게다가 그 영향으로 탐관오리들이 들끓게 되자 농민들이 삶은 갈수록 농민들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후한 중기부터 농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농민반란은 중국전역에서 엄청난 수의 농민들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이 반란군을 황건적이라 부르는데 장각을 우두머리로 치밀한 모의 끝에 거사한 것이었다. 장각이 죽자 황건적 난의 주류는 어느 정도 진압되었으나, 사병조직을 거느리고 있던 지방호족들이 일어났다. 220년 후한의 황실은 지방호족 출신의 신흥귀족인 위나라의 문제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나라를 넘겼다.

 

권력 정통성이 취약했던 위는 삼국을 통일하고도 오래가지 못했다. 강적 촉한을 물리치는데 빛나는 공적을 세운 사마씨가 실력자로 떠올랐다. 그 가문의 사마염이 265년 위의 원제에게 다시 선양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진을 세우고 무제가 되었다. 건국자 무제가 죽자 팔왕이 난을 일으켰다. 4세기 초반 북방민족들 중에 강성했던 흉노匈奴와 선비鮮卑, , , 의 다섯 민족을 중국 역사서에 5(다섯 오랑케)라고 불렀다. 팔왕의 난을 일으킨 진의 어느 제후가 흉노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유연을 끌어들였다. 그는 군대를 몰고 와 진을 접수하고 한 제국 뒤를 이었노라 선포한다. 흉노의 뒤를 이어 북방민족들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는 439년까지 100여년 동안 서로 다투면서 10여개의 나라를 세운다. 다섯 오랑캐가 열여섯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이시대를 516국 시대라고 부른다. 중원이 북방민족의 놀이터가 되자 중원 명문세가와 호족들은 남하하였다. 이때부터 진을 동진東晋이라고 부르고 그 이전까지 진을 서진이라 기록한다. 동진은 항상 지배층이 불안정했다. 이주민 출신의 북방 귀족층과 오나라 이후 거의 토착민이 된 남방 귀족층이 수시로 대립했다. 끊임없는 남침 위협에 시달리자 동진 북부 국경요충지 군벌들의 발언권이 점체 강해졌다. 북방 군벌휘하에서 여러 차례 무공을 세운 바 있는 무장인 유유가 반란을 진압하고, 420년 진 황실의 선양을 이어받아 을 건국한다. 더 유명한 송 제국은 10세기에 건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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