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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사회는 진화하는가?

이른 아침 남양주 ‘물의 정원’을 걷는다. 손자와도 몇 번 찾아갔던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고요한 강가를 걷는 아침 산책길에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고 햇살은 푸른 풀잎에 부드럽게 비친다. 물의 정원은 산책하기 정말 좋은 곳이지만, 주말이나 한 낮에는 교통도 혼잡하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붐비는 곳이다.
 
학창시절 나는 별로 책을 읽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아했던 책들은 단편소설이었다.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전성기는 해방전후라 나는 생각한다. 일본식민지로 너무 비참한 삶을 살아왔던 이 나라 백성들은 해방이 되면 좀 나아질 줄 알았지만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 시절의 사회상황은 어떤 역사책이나 다큐보다 그 시절 단편소설을 읽으면 더 절절하게 잘 이해할 수 있다. 김성한 작가의 ‘바비도’와 ‘개구리-원제 제우스의 자살’은 지금 우리 사회상황과도 비슷한 것 같다.
 
사회학 창시자 콩트는 사회는 그리스로마 시대, 중세 암흑시대, 르네상스 시대, 과학시대로 진보한다고 했지만, 어쩌면 인간사는 사회는 계속 돌고 도는 것만 같다. 한참 왔나하고 뒤돌아보면 또 그 자리다. 인간을 중심으로 세상만물이 얽히고설킨 우리 사회는 결국 인간이 문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인간이 변했을까?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나아지지 않았다. 물질이 풍요로워진 만큼 더 탐욕적이고 더 사악해졌다.
 
...영역英譯 복음서 비밀독회에서 돌아온 재봉직공 바비도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가끔 무서운 소름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할수록 못된 세상에 태어난 것 같다. 순회 재판소는 교구마다 돌아다니면서 차례차례로 이단을 숙청하고 있다. 성경만이 진리요, 그 밖의 모든 것은 성직자들의 허구라고 일변을 토하던 경애하던 지도자들도 대부분 재판장에서는 영역 성경을 읽는 것이 잘못이요,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시인하고, 전비前非(이전의 잘못)를 눈물로써 회개하였다.
 
바비도와 나란히 앉아 같은 지도자의 혁신적 성서 강의를 듣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목숨으로써 지키기를 맹세하던 같은 재봉직공이나 가죽직공들도 모두 맹세를 깨뜨리고 회개함으로써 목숨을 구하였다. 온 영국을 휩쓸고 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구차한 생명들이 풀잎같이 떨고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권력 보존에 양심과 양식이 마비되어 이 폭풍에 장단을 맞추고, 힘없는 백성들은 생명의 보전이라는 동물의 본능에 다른 것을 돌아볼 여지가 없다.
 
어제까지 옳았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리 보아도 틀림없이 옳던 것이 하루아침에 정반대인 극악으로 변하는 법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비위에 맞으면 옳고, 비위에 거슬리면 그르단 말인가? 가난한 자, 괴로워하는 자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의일진데, 선천적으로 결정된 운명의 밧줄에 묶여서 라틴말을 배우지 못한 그들이 쉬운 자기 말로 복음의 혜택을 받는 것이 어째서 사형을 받아야만 하는 극악무도한 짓이란 말이냐?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분신이니 신성하다지만 아무리 보아도 빵은 빵이요, 먹어도 빵이다. 포도주 역시 다를 것이 없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거짓이 확실한 것을... 어찌 인정할 도리가 있을 것이냐? 무슨 까닭에 벽을 문이라고 내미는 것이냐? 절대적으로 보면 같은 수평선상에 서 있는 사람이 제멋대로 꾸며 낸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의 똑바른 마음을 속이지 않을 권리가 이 천하의 어느 한구석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현실에서는 망상이다. 이런 조건하에서도 흑백을 똑바로 말해야 하는가? 나같이 천한 놈이 양심적으로 산다고 별 수 있을 것도 아닌데.. 되는대로 대답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이렇게 변명하면 할수록 마음속은 더욱더 께름직하고 가슴이 답답하였다.
 
사형의 선풍이 전국을 휩쓸자 거짓 회개와 거짓 눈물을 방패로 앙달박달 이것을 막아내는 짓밟힌 백성들의 눈물겨운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불행의 시초는 도대체 인간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에 있다. 이 놈은 이 소리하고 저 놈은 저 소리하다가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도끼질 할 권리를 어디서 얻었단 말인가? 너희들은 자기가 옳다는 것, 아니 자기에게 이익 되는 것을 창을 들고 남에게 강요할 권리가 있고, 나는 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 자신만의 행할 권리, 가슴에 간직할 권리조차 없단 말인가?...
 
사형수 바비도를 실은 마차가 사형장으로 들어왔다. 온 몸은 볼모양 없이 되었다. 옷은 찢기고 얼굴에서는 피가 흘렀다. 거리로 끌려 다니면서 믿음이 두텁고 나라에 충성하는 백성들로부터 받은 모멸의 흔적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군중은 앞을 다투어 덤벼들었다. 아기 업은 중년 부인은 앞장서서 침을 뱉었다. 돌멩이도 수없이 날아왔다. 진흙을 뭉쳐 바비도 얼굴에 명중시킨 용사도 있었다. 가장 용감한 친구는 마차에 뛰어올라 발길로 한 대 차고, 침을 뱉고 나서 춤추듯이 뛰어내렸다. 멀리 서 있는 사람들도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서 애써 침을 뱉고, 노파들은 주먹질 하고 젊은 여자들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나무 꼬챙이를 휘두르면서 처음부터 이 사형수의 뒤를 따르던 아이들은 행렬이 걸음을 멈추자, 손에 든 것으로 마차의 꽁무니를 갈기고 발길로 치면서 외쳤다. 인간 세상의 증오라는 증오는 모조리 바비도를 향하고 두터운 신앙과 충성은 뜨거운 물같이 들끓고 있다. ... (김성한 ‘바비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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