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국 초기 100년을 제외하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늘 두 파로 나누어 싸워야 했다. 때로는 다른 왕위 계승권 자를 끼고서 다투었고 때로는 철학적 논쟁으로 갈라서기도 했고, 대외변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싸우기도 했다. 국내의 문제를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로 해결하지 못하고 언제나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이 나라의 해결법이었다. 개화를 주장하고 집권한 민씨 정권은 대원군을 물리쳐준 청나라에 붙어 사대당의 주력이 되었다. 대원군이 역사를 거스르려 한 것도 문제지만 민씨 세력이 내부반란을 진압하기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인 것은 더욱 큰 잘못이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청은 조선에 통상조약을 강요했다. 조약문에 조선을 청의 속국이라고 정식으로 명문화되어 있었다. 수구로 돌아선 민씨 정권은 청의 그런 태도를 환영했다. 사대당은 집권과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나라 전체를 중국에 넘기려 했다.
나라와 당파가 모두 위기에 처하자 개화당 실질세력이 나타났다.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을 다녀오면서 메이지유신의 성과를 시찰하고 일본 정객들과 교류하면서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청의 간섭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청이 간섭하지 않고 민씨정권이 개화노선을 정상적으로 유지했다면 그는 쿠데타를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옥균은 일본측 동의를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권을 장악한 김옥균 일파는 내각을 구성했다. 이튿날 아침 문벌과 신분을 폐지하고 토지제도와 조세제도의 개혁을 기본으로 하는 혁신정강도 발표했다. 하지만
사흘간의 백일몽으로 끝났다. 명성황후 정권은 개화파를 색출해 모조리 처단해버렸다. 청과 일본은 텐진조약을 맺고 양국이 조선에 파병할 경우 사전 통보한다는 자기들끼리 약속을 정했다. 개혁시도가 오히려 안팎으로 화를 불렀다.
동학교주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하고 동학을 탄압하지 말라고 정부에 요구했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정치문제까지 들고 나왔다. 30년 전 민란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방아쇠를 당긴 것은 부패한 관리 전라도 고부의 군수 조병갑이었다. 농민지도자인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은 동학의 전통적 이념인 輔國安民(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을 보호하자)은 물론이고 축멸양왜逐滅洋倭(서양과 일본을 몰아내자)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내세웠다.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명성황후 정권이 청나라에 진압 병력을 요청하자 텐진조약이 발효되었다. 청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아산만에 상륙하였지만 일본군은 아산만이 아닌 인천에 상륙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제 나라 백성이 일으킨 반란에 남의 나라 군대를 스스럼없이 끌어들이는 민씨 정권의 작태는 비난할 가치도 없지만 그 때문에 농민들은 난처해졌다. 그래서 전봉준은 즉각 정부와 화의를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해 외세가 개입할 빌미를 없애버렸다.
위안스카이는 일본과 청군이 조선에서 철군하자고 제안했으나 일본은 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 정권을 해체하고 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일본의 해군과 육군은 청의 함대와 육군을 기습했다. 이렇게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그게 하필 한반도라는 것이 불운이었다. 하지만 조선정부가 자초한 일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청이 항복하자 일본은 대원군에게 조선에 친일정권을 내세우는데 기둥이 되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권력을 남과 나누어 가거나 남의 허수아비가 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주제를 모르고 주체성을 보였던 대원군은 한 달도 못 가 퇴출되고 만다. 일본이 그 다음 인물로 내세운 인물이 김홍집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일본이 짜준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뿐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갑오개혁이라 부른다. 김옥균이 10년 전에 시도한 것이 다시 추진된 것에 불과했다. 어쩔 수 없이 친일로 선회하게 된 조선정부도 갑오개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백성들은 정부의 모든 조치를 불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외세가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내정간섭에 대해 전봉준이 다시 봉기에 나섰다. 하지만 공주성 공략에 실패한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의 조직력과 화력에 버티지 못하고 잔혹한 패배를 당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를 받았다.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랴오뚱반도와 대만 등을 빼앗고 막대한 배상금도 받았고, 조선은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제1항으로 채택되었다.
일본의 의도는 조선에서 종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민씨정권은 발 딛고 설 곳 조차 없어졌다. 중국의 영향력이 한반도에서 사라졌다는 것도 해방감을 주기는커녕 커다란 불안 요소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래서 찾은 새로운 파트너가 러시아였다. 조선정부는 박영효를 내쫓고 친러파를 내세워 김홍집내각을 성립시켰다. 친일-친청- 친러로 이어지는 노선변화는 명성황후 정권의 철저한 무원칙이다. 이러한 민씨정권의 변신은 자체 이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적에 대한 반대에서 취해졌다. 대원군에 반대해서 친일했고, 급진개화파에 반대해서 친청으로 돌아섰고, 그 다음은 일본이 청을 제압하자 친러를 택했으니 그 변화는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보겠다는 안간힘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군대를 편성하여 조폭을 만들어 경복궁을 기습하였다. 그들은 궁녀와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에 태우고 재마저 흩뜨려 놓아 찾을 수 없게 했다. 허수아비 남편을 주무르며 20년간 권세를 누리고 조선의 몰락을 재촉한 명성황후는 을미사변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조선전역에서 일본에 반대하는 의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종은 20년 동안 자신을 이끌어준 정신적 지주가 사라졌다. 이러한 고종의 곁에 친러파인 이범진과 이완용이 있었다. 그들은 고종에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 피난살림이 1년 동안 지속되었다. 친일내각은 다시 친러내각으로 바뀌었고 대원군은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래도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했다. 그때 최초의 민간조직인 독립협회가 발족하였다.
갑신정변때 일본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가 갑오개혁의 물결이 한창이던 시기에 귀국해 언론인이 되었다. 그는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뒤이어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수구의 기둥이었던 명성황후도 죽었고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는 자유적이었다. 독립협회의 주된 활동은 민중에게 애국계몽의 이념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고종이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 제국의 황제가 되는데, 이것은 독립협회와 친러파정부의 합작품이었다. 대한제국 성립은 주체적인 체제 전환이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가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선언적인 정치적인 활동에 불과했다.
무늬만 제국이었기 때문에 그 작업을 주도한 세력은 의견이 엇갈렸다. 독립협회는 재야 세력인 만큼 입헌군주제를, 친러 수구파 정부는 집권세력이었으므로 전제 군주제를 주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러시아 요구에 따라 부산 영도를 조차해 주려 하자 조선국민 전체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서울 한복판에서 1만 명이 넘는 군중이 대규모 규탄대회를 열었는데 이것을 만인공동회라고 부른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무리가 의회를 구성한다면 고종은 허수아비가 될 것이 뻔했다. 고종은 그를 황제로 만들어준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간부들을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평소에 무능으로 일관하다가 오로지 수구적인 목적에만 왕권을 행사하여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린 고종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친러노선을 취한 이상 조선정부는 러시아의 운명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동북아시아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한 지역은 만주와 한반도였다. 러시아와 앙숙이었던 영국이 나섰다. 영국의 동북아시아 파트너가 일본이었다. 영국과 동맹으로 일본은 러시아만 물리친다면 다른 유럽열강의 간섭 없이 동북아시아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먼저 조선의 인천과 만주의 뤼순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이 조선쟁탈 결승전에 해당하는 러일전쟁이었다.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미국까지 전쟁비용을 지원했다. 군국주의 일본의 성장보다 러시아혁명에 위협을 느낀 서양열강은 미국 대통령 주선으로 강화를 유도했다.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담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권리를 일본에게 양도한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난 러시아혁명으로 일본은 러시아를 물리치고 조선을 전리품으로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