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죽자 규장각은 본래 기능인 도서관을 돌아갔고 장용영도 해체되었다. 그보다 더 명백한 과거로의 회귀는 노론 벽파가 권력의 일선에 등장한 것이다. 벽파가 권좌에 복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나 인물이 영조계비 정순왕후이다. 정조의 열 살짜리 둘째 아들 순조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맡게 된다. 시파 인물을 숙청하고 노론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조정에 남아있는 시파 등의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전국이 그리스도교를 색출해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린다. 그렇게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집권사대부들은 사상 처음으로 당쟁에서 벗어나 단일한 색깔을 띠게 되었다. 그렇게 최후에 남은 사대부 세력은 결국 성리학적 이념의 농도가 짙은 노론의 일색이었다. 이것은 한반도에 내려진 저주였다. 이상적인 사대부체제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국왕을 상징이자 하수아비로 만들고 사대부들이 실권의 담당자로서 역할을 하면서 국정을 담당하는 체제다. 왕이 상징적이니 권력자라면 사대부 수장은 현실적 권력자이다. 이런 배경에서 떠오른 인물이 김조순이다. 그는 영조 초기 노론 4대신의 하나였던 김창집 후손이었고 그의 딸이 순조의 아내가 되었으니 왕실의 외척이었다. 정조의 신임을 받았고 순조를 도와달라는 정조의 유언까지 받았으므로 권좌에 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게 조선의 새로운 사대부체제는 완성되었다. 오랜 사대부체제의 전통이 낳은 최종적인 결론, 성리학적 세계관이 빚어낸 최후의 산물, 역사상 가장 완벽한 사대부 체제 아울러 한반도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야만적인 체제, 그것이 바로 세도정치다.
지금까지 보았듯 중종반정 이후 사대부 체제는 사실상 그런 정치를 지향해 왔으므로, 세도정치는 결코 19세기 초반에 갑자기 출현한 체제라고 볼 수 없다. 특정한 개인 또는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은 세도정치만의 특징이라 해도 그것은 사실 사대부 지배체제의 연장이며 최종적인 결과이다. 세도정치는 정부 요직을 일가붙이로 독차지 하였다. 나랏일보다 그 일을 더 열심히 한 탓에 안동김씨 가문이 자기들끼리 사이좋게 주고받으며 자리를 나눠가졌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한 가문이 장악했다. 지방행정을 장악하기 위해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아먹는 것이었다. 자파 인물들은 지방관에 임명하고 나라의 행정조직을 그들의 입맛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중앙과 지방정치가 문란해지면서 대동법과 균역법 기능도 마비되었다. 조세제도가 붕괴되자 지방관들의 탐욕이 절정에 달했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의 이른바 삼정이 무너지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백성들이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전정은 토지에서 나오는 조세를 수취하는 것이고 군정은 군역을 가르킨다. 환정이란 춘궁기에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갚도록 하는 조치를 말한다. 조선은 엄청나게 운이 좋거나 아니면 억세게도 명이 질긴 왕조였다. 망국적인 당쟁으로 늘 지배층이 분열되어 있었고 대규모 외침을 수차례나 받았고, 민중이 조직적으로 들고일어나도 좀처럼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사실상 멸망했다고 봐야 한다. 왕실이 명맥만 유지할 뿐 국가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세제도가 미비 되면서 국가재정도 거덜났다. 백성들은 자영농에서 소작농으로 소작농에서 화전민으로 화전민에서 유랑민으로 바뀌면서 국가의 관할에서 벗어나있었다.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남긴 학문적 업적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당대 현안에 대한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이론이다. 사상가들은 당대 관심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과 이론을 구성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거기서 통시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내용을 추출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 그 결과물을 고전이라 한다. 당대 현안에 관한 내용 정약용의 사상은 주로 경제학 영역에 속하다. 그 동안 실학자 진영에서 제출한 대표적 토지개혁론은 유형원의 균전론과 이익의 한전론이었다.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하고 토지관리를 경작자의 재량에 맡기자는 내용이었다. 대지주들의 겸병이나 소작농의 증가 등 그간 토지제도의 모든 문제는 경작자와 소유자가 분리된 현상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으므로,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원칙에 충실하자는 것이었다.
조선만 아니라 역대 왕조들, 중국의 왕조들까지 중화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왕조는 예외 없이 토지가 왕 또는 국가소유라는 이념을 토대로 하고 있다. 모든 토지를 왕이 소유한다는 원리는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데 근본적인 걸림돌이 된다. 모든 게 왕의 소유이므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토지사유화가 인정되었고 왕이 최고의 땅 부자이지만, 왕국 내 모든 땅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사유지와 지대 개념이 발달했다. 실학자들과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개혁이나 정책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를 바꾸는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정약론의 왕도론도 국민주권 개념과 비슷하지만 순수한 이념적 산물일 뿐이었다. 서유럽의 자유주의는 시민계급이라는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성장했다. 서유럽의 절대주의시대에는 절대군주와 관료세력만이 아니라 신흥부르주아 계급이 상업과 산업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면서, 미래사회를 주도할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 시민계급이 주창하고 나선 게 자유주의 사상이었으며 정치적으로 참정권과 국민주권개념이었다.
아무 할 일도 없는 자리지만 서른아홉 살의 순조는 귀찮았던 모양인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열여덟 살의 아들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세자가 빨리 죽자 한 일은 없지만 대리청정을 하였으니 죽은 뒤 익종이라는 왕의 시호를 받게 된다. 안동김씨 대신 풍양조씨 아내를 취함으로써 세도정치의 주인공은 풍양조씨로 바뀌게 된다. 아들이 죽자 순조는 할 수없이 국왕자리를 다시 맡게 된다. 순조와 장인 김조순이 죽고 일곱 살의 나이로 헌종이 왕위에 오른다. 어린 왕이 들어설 때면 예외 없이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헌종은 조선역사상 가장 어린 왕이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다. 왕위계승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은 왕위계승이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도정치로 접어들면서 조선은 왕국의 간판을 유지할 뿐 사실상 왕국이 아니었다. 왕은 상징도 아닌 그저 장식물이었다. 왕위 자체가 무의미하므로 어리든 무능하든 아무 차이가 없었다. 왕위계승보다 중요한 것은 세도가문의 계승이었다.
당쟁시대가 끝나고 쟁점으로 등장한 것은 그리스도교였다. 원래 포교종교란 박해가 심할수록 더욱 확산되기 마련이다. 출발할 때부터 로마제국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꾸준히 세를 키워 마침내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었다. 먼저 선교사를 보내 종교를 전파한 뒤 경제적 진출을 도모하는 것이 16세기 유럽열강의 전매특허였다. 19세기 제국주의시대에는 포교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침략구실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 서양인 순교자를 낸 기해박해는 최초로 사양의 군함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구실이 되었다.
순조 부부의 운명은 기구했다. 순조는 아들 익종에게 왕위를 물러주었다가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다시 재위하는 고초를 겪었고 순조 아내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에게 친정을 맡기면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가 헌종이 일찍 죽자 다시 수렴청정을 해야 했다. 헌종은 젊은 나이에 계비까지 들였지만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왕실 족보를 샅샅히 뒤진 결과 장헌세자 후손을 찾았다. 열여덟 살의 강화도 총각 이원범은 영문도 모른 채 헌종의 대를 이었다. 그가 바로 조선의 25대 왕 철종이다. 철종의 아내로 궁에 들어온 인물은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김씨 집안이었다. 이로써 한 동안 풍양 조씨에게 눌려 지냈던 안동김씨가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밖에서는 서양 열강의 군함과 상선들이 돌아다녔고 안에서는 백성들이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조선은 점점 총체적 난국으로 빠져들었다. 조선의 병은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수백 년째 내려오는 체제 모순이 집적된 결과다. 1862년 우려하던 사태가 터졌다.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진주민란이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조선 역사상 변방 장수나 사대부 혹은 산적 두목이 반란을 일으킨 적은 있으나 민중이 학정에 못이겨 들고 일어난 경우는 처음이었다. 애초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왕위에 올랐던 철종은 재위 중에도 자신의 의지와 달리 민란으로 얼룩진 14년 치세를 보내고 죽었다. 그는 익종, 현종과 달리 서른을 넘겨 살았으나 딸 하나만 두었을 뿐 후사를 남기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공식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후손을 찾은 다음 국왕과외를 시키고 대비가 수렴청정하다가 왕을 장가보내 외척을 붙이고 친정하도록 독립시키는 공식이다. 대비의 역할은 과부인 신정왕후다. 그 동안 순원왕후에 가려 있었지만 이제 왕실에서 가장 높은 어른이 되었다. 왕을 캐스팅하는 권한은 신정왕후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