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진주만의기습으로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전까지 모집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제는 노골적으로 강제징발로 대체되었다. 싸울 수 있는 자는 전장으로 징병되었고 일할 수 있는 자는 광산으로 징용되었고, 젊은 여성들마저 위안부로 만들어 전장으로 광산으로 보내면서 일본은 한반도 전쟁 수행을 위한 전면적 수탈체제로 편제했다. 일본제국주의의 광기로 한반도는 식민지를 넘어 캄캄한 암흑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때 항일운동 맥이 끊겨버린 것이었다. 멀리 유럽에서 독일이 강점한 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 유고 같은 나라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치열하게 전게되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는 깊은 침묵으로 대응했다. 유일하게 항일투쟁을 지속한 사람들은 중국홍군에 속한 조선유격대 뿐이었다. 이들도 중국공산당 일원으로 항전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과 거리를 두었다. 1940년 동북항일연군이 해체되자 이듬해 소련으로 가서 소련장교가 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간부훈련을 받으며 지냈다. 모두가 항일투쟁을 벌여야 할 때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해방직후 연합국측이 한반도를 준전범국 취급한 것도 일본에 의해 징병, 징용 당함으로써 일본에 협력했다는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일본이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고 미군이 유황도와 오키나와까지 진출해도 일본이 무너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 패배하고 해방이 오리라 확신한 사람이 있었다. 해방이 오기 전 1944년 건국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을 만들고 대중 지지기반을 만들어 해방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 그룹의 지도자 여운형은 일찍이 임시정부 수립에도 관여하고 공산당에도 가입하고 외교무대에서 국제적 활동도 했다. 준비된 건준의 활동은 신속했다. 해방 후 보름만에 전국적으로 145개 지부를 설피하고 치안대 조직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인천항으로 점령군 자격으로 들어온 남쪽의 새 지배자가 된 미군의 생각은 달랐다. 미군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관점은 단순했다. 그들의 시각으로 볼 때 한반도는 일본과 같은 전범국이었다. 그들은 군정청을 차리고 식민지 지배형식을 취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한반도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서울 온 하지는 조선총독에게 항복문서를 받는 자리에서 식민지시대의 관리들을 모두 그대로 유임시킨다고 약속했다. 이런 미군의 의도를 모른 채 건준은 1945년 9월초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인공과 별도로 미군정은 미군장교들을 각 부처 장관으로 임명하여 내각을 급조하여 남한의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했다. 수권조직이 미군의 말 한마디에 졸지에 불법조직이 된 것이었다. 자체적으로 정부를 구성하려던 건준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한반도 북부에서도 소련군이 진주했지만 사정은 남한과 달랐다.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불과 일주일 전에 동북아시아에 전선에 참전했기 때문에 미국처럼 주인 행세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소련군은 점령군이 아닌 해방군 태도를 취했다. 군정청을 설치하지 않았고 포고문에서도 ‘조선은 해방되었고 조선의 미래는 조선인의 손에 달려 있다’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들이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일성이었다. 미군정청과 갈등을 빚는 남한과 달리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북한을 손쉽게 장악하고 권좌에 올랐다.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함으로써 미군정청은 예상외로 남한의 전략적 가치가 중요해졌다. 미군정은 인공을 거부한 데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구 김구과 김규식 등의 임정요인들은 오랜 망명과 항일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미군정으로서는 미국의 이해를 대변할 꼭두각시를 찾았다. 그런 이유로 급부상한 자가 이승만이다. 이승만의 1919년 임시정부를 출범할 때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직함을 주자 대통령을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임시정부로서는 국제적으로 조선을 알릴 얼굴마담이 필요했기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해외동포의 성금을 횡령하고 외교업무에서 전횡을 일삼아 1925년 탄핵으로 해임되었다.
1942년 12월 미국과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인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를 향후5년간 신탁통치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식탁통치가 시작되면 이승만이 바라던 대통령의 꿈은 사라지게 된다. 이승만은 전국적인 반탁운동을 계획했고 김구를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가세하자 이승만의 반탁운동은 힘을 되었다.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대다수 사람들의 충심인 반탁이 옳으나 아니냐는 생각해봐야 했다. 한반도 공화정 경험이 없는 역사에서 서양식 공화정을 우리 국민들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었을까? 신탁통치는 기한이 정해져 있었고 그 뒤에 독자적 정부 수립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신탁통치는 식민지 지배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임시정부의 명망가들은 이승만에게 놀아난 셈이다. 북한에서는 이미 김일성이 지위를 굳히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이 권좌에 오는데 걸림돌이 될 만한 세력은 북한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좌익라이벌로 남로당과 중국공산당에서 활약한 연안파의 김두봉과 팔로군군단장까지 지낸 무정이었다. 이런 구도였으니 소련이 김일성을 밀지 않았으면 김일성을 집권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 나은 후보들이 즐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결격사유가 크고 권력욕의 화신인 이승만과 김일성이 남한과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은 한반도로 볼 때 불운이 아닐 수 없었고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는 시련을 겪고 있다. 권좌에 오르지 말았어야 할 자들이 남북한의 권력을 장악했으니 조국의 분단은 확정되었고 암울한 현대사가 예고 되었다.
해방이후 남한과 북한에 서로 다른 주둔군이 투입되고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떠오르자 이를 걱정한 것은 국제연합이었다. 두 강대국은 한반도를 무대로 충돌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국제연합은 1948년 1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해 한반도에 파견하여 통일선거를 실시해 분단을 막으려 했다. 위원단은 북한으로부터 입국자체를 거부당했고 이승만도 집요하게 통일을 반대했다. 착잡하고 초조한 사람은 김구와 김규식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북지도자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1948년 2월 국제연합에서 남한만의 선거를 추진한다는 결을 표결로 남북분단이 확정되었다. 이승만은 5월10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해 제헌국회를 구성했고, 7월 17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헌법으로 발표했으며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한반도 역사상 1945년 해방직후상황은 그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때였다. 남의 손으로 해방을 맞았지만 주체적 노력으로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를 장악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국내 정치에 관해 일관적인 방침이란 게 없었으므로 국내정체세력이 현명하게 대처했더라면 분단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족분단을 강대국의 논리에 의한 결과로만 볼 수는 없다. 최소한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이 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만 있었다면 분단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의 전개 과정을 단순히 인물로 치환할 수는 없겠지만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역시 지도자가 중요하기 마련이다. 남한과 북한은 아무런 정통성도 자질도 없는 문제 많은 자를 지도자로 선택해 결국 파멸을 자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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