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의 패자는 중화세계에서 비중화세계로 바뀌고 있었다. 삼국시대에 겪은 침략은 중국의 한족 왕조가 한반도를 공략해 중화세계로 끌어들이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성공하면 한반도는 중화세계로 편입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거란의 침략을 당하고 중기에 여진 금을 사대하고, 후기에 몽골 속국이 되는 것이 그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노력했다. 조선은 유교왕국을 지향했으므로 때 마침 부활한 명과 죽이 맞았다. 하지만 시대적 조류는 중화세계가 질서의 중심축이 되가 어려운 방향을 가고 있었다. 만주족 왕조가 대륙을 정복한 상황으로 볼 때 조선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명백했다. 그러나 조선이 사대부들이 택한 노선은 시대적 요구와 정반대였다. 그들은 중화질서가 깨졌다는 사실에 분개할 따름이었다. 유라시아대륙 서쪽 끝에서는 영국의 시민혁명이 한창이었고, 30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근대사회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종교개혁이후 동양으로 온 수 많은 가톨릭 선교사를 통해 유럽사정을 어느 정도 인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청난 전란이 조선을 할퀴고 지나갔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조선 사대부들은 전보다 더 강한 수구적 자세와 복고적 태도로 강경한 반동적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신병으로 빠져들어 갔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으로 청의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8여년을 청에 지내면서 조선의 지배층이 얼마나 편협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는 청의 황족들과 두루 사귀면서 두 나라의 외교를 담당했으며, 청의 무리한 요구를 무마시키는 역할도 했다. 인조는 사대부들의 편이었고 사대부들은 그를 비난했다. 그런 상황에서 소현세자가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을 때 국내반응이 어땠을 지는 뻔하다. 인조는 아들이 가져운 서양문물을 혐오했다. 그는 결국 사대부들에게 살해당했다. 인조가 죽자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즉위했다. 인조도 사대부들이 반정으로 즉위했다는 약점 때문에 사대부들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고, 효종도 그들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대부들은 왕을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소현세자 살해보다 더 황당한 음모를 꾸민다. 바로 북벌이다. 반정이후 서인정권이 오래 유지되면서 서인들도 두 파로 갈라졌다. 인조의 치세에는 반정에 가담한 공서파가 주류였고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가 비주류였다. 두 차례 전란에서 주화론자가 다수였던 탓에 공서파는 친청파가 되었고, 청서파는 반청파가 되었다. 송시열은 청서파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봉림대군의 스승이기도 했다. 송시열이 이끄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북벌을 추진하게 된다. 거창하게 시동을 걸었지만 북벌의 구체적인 진행과정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남한산성 방어를 강화하고 중앙군을 기병화하는 정도였다.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죽으면서 북벌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들은 허망한 북벌계획을 포기하고 조선을 중화세계로 만드는 작업으로 선회하게 된다.
아들 현종이 순조롭게 왕위를 이었으나 왕위계승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새로 등장한 논란거리는 장례 예절에 관한 문제였다. 그것을 사대부들이 당쟁거리로 삼았는데 그것이 예송논쟁禮訟論爭 사건이다. 예절에 관한 논쟁이니까 품위가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권력다툼이었다. 그들이 온갖 폼을 잡으면서 엄청난 철학논쟁이라도 벌이듯 옛 문헌을 뒤져가며 엄격하고 치밀하게 예법을 따졌지만, 실제로 승부가 결정한 것은 어느 측의 정치세력이 더 컸느냐 하는 것이다. 예법논쟁에서 승리한 측이 곧바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국상을 치러본 경험도 그동안 숱하게 많았을 터인데 왜 유독 효종 부부 장례절차만 문제가 되었을까? 이제 조선은 사대부들이 왕족의 장례절차까지도 논쟁을 통해 결정할 만큼 완벽한 사대부 국가가 되었다. 유교적 국제질서의 중심이었던 명이 멸망하고 유교문명의 고향인 중원은 오랑캐인 청이 정복했다. 중화세계가 사라진 것이다. 중화세계에 대한 향수를 북벌계획으로 달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조선을 작은 중화로 만든다는 거창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조선은 사대주의를 극복한 것인가? 사대의식을 버리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을 취한 것일까? 사대의 극복이 아니라 사대의 변종이 생겼다. 사대의 대상을 허구적 우상으로 만들어 주체 속으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조선사회에서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조류가 나타났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제 조선만이 문명국이라는 허구적 위기감과 허황한 자부심을 키우며 안으로 웅크리고 있을 무렵 지구상 수많은 지역은 개방되고 있었다. 유럽문명이 세계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진출로 나선 유럽인들 전략은 세 가지다. 첫째 잉카문명처럼 문명권 힘이 약한 것에서는 무력을 동원해 유럽문명을 이식하고, 인도와 같이 기존 문명권의 힘이 어느 정도 강한 곳은 경제적 진출을 통해 원료공급자이자 시장으로 만들고 난 후에 정치, 군사적 침략을 시도한다. 동북아시아처럼 문명과 역사의 전통이 강한 곳은 경제적 진출로 만족한다는 전략이다. 동북아시아 길잡이로 상인과 선교사들이 나섰다. 유럽 상인들과 선교사들은 중국과 일본을 드나들면서 왜 조선만은 오지 않았을까? 당시 서양인들은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여겼을 것이다. 조선은 사양문물을 접하는 것도 중국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외교권과 군사권은 없고 내정의 자치권만 가진 나라였다.
현종은 그저 15년 동안이나 무위도식하며 지내다가 죽었다. 다음 왕인 숙종도 현종이 외아들이니 예송논쟁 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현종 말기에 집권한 남인은 권력을 다지기 위해 새로운 논쟁거리가 필요했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사람이 송시열이었다. 위기에 빠진 그를 구해준 것은 남인의 분열이었다. 사건의 실체가 없어도 모함만으로 반대파를 제거하는 말만의 역모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 식을 집권한 서인의 권력도 몰락하는 과정이 남인과 닮은 꼴이었다. 예송에서 승리한 뒤 처벌문제를 놓고 남인이 두 파로 갈라졌듯이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도 남인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남인에게 죽을 뻔한 송시열이 강경파였고, 그의 제자이면서 사적으로 원한사이로 벌어진 윤증 등이 온건파였다. 연배 차이가 나기 때문에 노론, 소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숙종의 치세는 당쟁의 정점이라 할 만큼 극심한 정쟁으로 조정이 얼룩졌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극복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 무렵 동북아시아 전체가 번영을 맞은 시기였다. 동북아시아 질서의 중심인 중국에서 청淸제국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비중화 세계인 일본도 17세기 초부터 에도 바쿠후 집권 이래 착실하게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정치가 안정되자 상인들은 대외무역에 손길을 돌려 동남아시아 여러 섬과 인도차이나 방면으로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왕정복고의 빛과 그림자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은 뒤 곧바로 사약을 받았다. 숙종의 세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도 아이를 낳지 못한 탓에 왕위계승이 순조롭지 않았다. 숙종에게 후궁인 숙빈 최씨가 아들을 연잉군을 낳았다.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와 연잉군 둘다 서자에다 하자가 있었으므로, 세자였던 장희빈 아들이 왕으로 즉위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즉위한 경종은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았다, 조정의 색깔이 소론 일색으로 바뀌자 연잉군은 생명의 위험을 느꼈다. 수많은 사람이 간단한 음모 하나로 숙청되는 분위기라 왕세자라해도 안전할 수 없었다. 그러다 경종이 죽었다. 연잉군은 조선 21대 왕인 영조로 즉위했다. 무수리 아들로 왕위로 오른 영조는 신분 콤플렉스가 있었으니 그래서 오히려 사대부 체제와 당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이 청제국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중화사상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영조는 소론세력을 처단했다. 영조는 왕세자 시절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당쟁을 놔두었다가는 나라가 망하리라는 위기의식이다.
사대부 정치를 보편적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과두정치라 할 수 있다. 과두정치의 장점은 권력을 어누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표적인 사례가 고대 로마의 원로원 정치다. 결정적인 단점은 한 시대를 이끌만한 지도자가 등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질을 갖춘 정치가가 출현한다 해도 견제를 받아 희생될 공산이 크다. 과두정치는 개인의 권력장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파벌을 이루어 정권다툼을 벌이기 마련이다. 로마 과두정치의 권력다툼이 그다지 극렬하지 않았던 이유는 원로원 이외 평민들 회의 기구인 민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동장치가 없는 체제가 중종반정이후 200여 년 동안 사대부 정치가 판을 친 조선이다. 그동안 조광조, 유성룡, 정여립 등 개혁적 성향의 사대부들에서부터 광해군, 소현세자 등 왕족에 이르기까지 건강한 정치무대였다면 자신의 역량을 꽃피울 수 있었을 인재들이 조잡한 모략과 책동으로 스러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