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자운봉에서 우이능선으로 가는 길은 도봉산의 진달래 능선이다. 개나리, 벚꽃, 진달래 등 모든 봄꽃이 이번 생은 망쳤다. 밤낮 기온 차이가 심해 피어나자마자 늙어버렸다. 제대로 피기도 전에 떨어져 버린 꽃잎이 애처롭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봄은 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봄이 내년을 위해 오늘 힘을 아껴둘까? 봄은 지금 이 순간 최선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자연은 후회를 모른다. 존재가 곧 능력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금 하고 있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전부이다. 이 말은 지금 바로 자신을 실험하라는 의미다. 아마도 실패하고 넘어질 것이다. 그게 바로 삶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성실함, 성誠이다. 동양철학에서 인간이 주어진 여러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이 誠, 敬, 信이다. 그것을 주역에서는 한마디로 부孚로 표현한다.
내가 하는 일은 공부다. 할 일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했던, 어쨌든 공부를 하게 되었고 공부를 하게 되면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된다. 공부가 일이 되고 공부가 놀이가 되고 놀이가 공부가 되었다. 나의 공부란 책을 읽고 내용을 요약해보고 생각하고 글을 써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엇을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기억하려 해도 기억되지도 않는다. 나의 공부방식은 훈습薰習이다. 향이 옷에 베듯이, 읽고 요약하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내 몸에 베이게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면서 아쉬운 것은 함께 공부할 도반이 아이들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깨우치게 하는 책이 있으면 그 저자를 내 스승으로 모시기도 하고 친구로 삼는다. 그가 쓴 책을 친구로 삼는다. 올해 들어 내 곁에 있으면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가 ‘예술을 묻다?’의 저자 채운선생이다. 인생, 마음, 자아, 사랑, 예술 등에 대해 쉽게 설명해주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채운선생이다. 다음 내용은 채운 선생이 ‘철학을 담은 그림’에서 하는 이야기 중에서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을 정리해본 것이다.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실패를 패배와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패배는 맞서 싸운 적에게 무릎을 끊는 것이다. 즉 타인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는 누구에게도 지는 게 아니다. 그저 시도와 실험의 일부일 뿐이다. 도전, 시도에 따르는 실패를 거치지 않고 완성에 이르는 예술가는 없다. 실패하지 않고 완성에 이르기를 바라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작품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생에는 건너뜀이 없다. 그 시기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즉 실패를 건너뛰고 혹은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단번에 완성에 이르는 길은 없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벗어난 경이와 기적을 통해 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경이로운 게 있다면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뜬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기적이 있다면 앙상한 나무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잎을 피운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자연은 단 하루도 건너뛰거나 비약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위대하고 그래서 경이롭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들은 자연을 닮았다. 아니 자연의 성실함을 지닌 모든 이들은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노년에 공부하는 삶을 살면서 무슨 사회적 지위나 학위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때로는 주저하고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 뒤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간다. 내 공부의 시작은 내 밑바닥을 보고 난 후였다. 자신의 밑바닥을 본다는 것은 참 쉽지 않는 일이다. 자신의 밑바닥을 볼 때 비로소 지금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을 떠나 새로운 관점을 갖기란 힘든 일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지금의 그 모습으로 현재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 할 수 없다면 할 수 없는 그 모습이 자신의 최대치다. 지금 당신의 모습 외에 따로 완성의 ‘나’는 없다. 지금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능력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유일하게 삶을 긍정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성공은 외부에서 주어진 결과일 뿐 내게 속한 것이 아닌 반면, 실패는 오로지 내 것이다. 거기에 나의 머뭇거림과 시도와 환희와 눈물이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말한다. ‘또 실패했는가? 괜찮다. 다시 시도해라. 다시 실패해라. 더 멋지게 실패하라.’ 자신이 원하는 완전한 삶을 꿈꾸는가? 그건 지금 여기 없다. 언젠가는 올지도 모르지만 오더라도 언제 어떻게 올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므로 중요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고 우리에게 중요한 건 하루하루 비약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바로 그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미완성으로서의 이 순간을 성심성의껏 살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유토피아는 상당히 이념적이었다. 모두가 평등한 계급이 없는 사회, 모두 생각이 같은 정치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사회, 뭐 그런 것이었다. 250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시대를 무도無道한 시대’라고 개탄한다. 그래서 道가 있는 시대를 꿈꾼다. 하지만 인간이 사는 세상은 단 한 번도 유토피아이었던 적이 없다. ‘유토피아’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장소’라는 뜻이고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더 풍요로운 사회, 더 안전한 사회 등의 유토피아를.
아직도 우리는 지금 그 유토피아를 꿈꾸며, 나와 다른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몰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낯선 자, 이방인, 괴물,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가해지는 맹렬한 비난, 자신과 다른 집단에 대한 폭력적 증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에 대한 잔인한 단죄, 사람들은 그렇게 다름을 배척하면서 패거리를 짓고, 자신들의 신념과 가치로 무장된 무균질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런 공간에서만 안전하게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타자가 배제된 ‘나’들만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우리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런 세상에 살면 행복할까? 그런 사회, 그런 종種이 유지될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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