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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불안불안한 인간

사진은 10년 전 쯤에 춘천 용화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안개 속에서 잠깐 드러나는 자연의 모습은 그야말로 세상만물이 꿈틀거리며 탄생되는 황홀하고 기묘한 순간이었다. 그때 기억이 너무 좋아서 이후 몇 번 다시 찾았지만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요즘은 뉴스를 잘 보지 않지만 그래도 듣게 되는 세상 이야기에 마음은 불안하고 불편하다.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의 미래가 암울하다. 이 지구촌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지금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으니 더욱 깜깜하기만 하다. 앞으로 우리 인간이 나아질 가능성도 없다. 미국조차 팔십이 넘은 노인밖에 대통령할 인재가 없다니... 팔십이 넘어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자는 그 생각만으로 무책임하고 탐욕으로 가득 찬 노욕이다. 인간은 점점 더 이기적이고 눈앞의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로 진화하고 있다. 인간은 본성과 습성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본성은 타고난 성품이고 습성은 사회와 스스로의 수련으로 만들어진 성품이다. 본성은 다른 동물들과 같이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도록 작동하지만, 인간은 이성으로 그것 통제하고 조절한다. 그것을 공자는 仁이라 했고 仁을 이성의 씨앗으로 생각했다. 敬은 仁한 마음의 실천이다. 敬은 나와 관계하는 모든 타인, 사물에 대한 공감이고 존중이고 공경이며, 사랑이고 겸손함이며, 집중이며 두려움이며 조심함이다.
 
이것을 깨달아 성실하게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 모든 철학, 인문학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육체를 뒤집어 씌고 살아가는 한 지켜야 하는 진실이다. 하지만 인간이 실천하기 결코 쉽지 않은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을 君子라 했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小人이라 하고, 나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군자라 한다. 우리는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을 지도자라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군자君子라야 한다.
 
다음 내용은 책을 통해 친구가 된(나 혼자 생각) 채운 선생의 ‘예술을 묻다’라는 책에서 현재 우리와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본 것이다.
 
‘코로나는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며 확산되다가 수그러들기를 반복하면서서 끝이 아닌 끝을 향해 가고 있고,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은 코로나는 감기라는 최면을 걸며 애써 두려움을 감추려 한다. 이 와중에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난민이 속출하고 있다. 변한 것은 변했고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코로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름을 달리하며 반복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프랭크 스노든에 따르면 역병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비춰주는 일종의 거울이라고 했다. 장티푸스와 콜레라가 19세기 산업화된 환경의 맞춤 질병이었다면, 코로나는 지구화된 현대사회의 맞춤 전염병이다. 지구화는 환경을 파괴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무한한 경제성장이라는 신화, 엄청난 인구성장, 거대도시, 이 모두를 연결해주는 인터넷, 고속항공수송 등을 의미한다. 코로나는 이 지구화를 발판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자본주의의 속성인 무한성장의 신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제 2, 제3의 코로나가 재출현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 맺기에 더 균열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그 전에 이미 사회적 관계는 파탄 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사실로 말하자면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가 이렇게까지 서로 연결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확진자 한 사람이 순식간에 클러스터를 만들고 지구 저편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삽시간에 그 반대편으로 퍼지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지구촌이니 세계화라는 말을 실감했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같은 짓을 되풀이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음’이라고. 지금 인간이 하는 짓이 그러하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을 멈춰서 숙고할 수 없다면, 그저 이 경험을 악몽으로만 여기고 하루 빨리 악몽에서 깨어나길 바랄 뿐이라면,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릴 준비를 하면서 과거의 회귀로 꿈꾼다면, 그건 우리 자신과 일어난 사건을 부정하는 것이다. 지금은 멈춰 서서 근본적으로 묻고 생각해야 할 때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일말의 성찰도 없이 쾌락을 향해 오로지 밖으로만 치닫던 우리에게 팬데믹은 재앙이다.
 
모든 감각적 쾌락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만족을 채우고 나면 다시 갈애渴愛가 솟아오르고 탐하면 탐할수록 허기는 더해지는 법이다. 가장 근본적인 불교교리를 쉬운 비유를 통해 설명하는 비유경譬喩經에 나오는 나그네 꼴이 딱 이렇다. 사막을 횡단하는 나그네를 맹수가 추격해 온다. 사력을 다해 도망치다가 우물가에 도달한 그는 드리워진 칡넝쿨을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제는 살았다고 생각한 순간, 바닥을 보니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아닌가. 설상가상 두 마리 쥐가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고 우물 벽에서는 독사들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이 와중에 칡넝쿨 줄기에 매달린 벌집에서는 꿀이 떨어진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나그네가 맹수고, 독사고, 쥐고 간에 그 꿀을 탐닉하려는 모습이 영락없이 우리 자신 모습 아닌가? 코앞의 죽음 잊게 만들 정도로 감각적인 쾌락의 힘은 막강하다. 핥고 문지르며 쾌락에 취한 사이, 어느새 우리는 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왜 악착같이 돈을 벌고 싶은가 물으면 참 별거 없는 답이 돌아온다. 맛있는 거 먹고 예쁜 옷 사 입고 좋은데 구경하고 더 넓은 집에서 살려고, 그게 전부다. 개처럼 벌어서 하는 일이라는 게 고작 먹고 마시는 게 전부인가? 고작 이러려고 사람들은 노동에 자신을 바친다. 현재의 젊은이들은 자기 앞 세대에게서 어떤 비전도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가 불행한 건 앞 세대 때문이다. 좋은 것은 그들이 다 가져가 버렸고 우리 미래를 망쳐놓았고 우리는 여기에 낙오되어버렸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부모세대는 그들의 삶, 신념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지금의 이 풍요로움을 만끽하려면 몇몇 사회문제쯤은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길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자식세대는 그럴 수 없다. 평생 일해 봐야 도심에서 만만한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렵고 돌아오는 것은 늘어난 빚과 병, 항상 불안하고 고통스런 삶의 연속이다. 가족들과 대화 나눌 시간도 친구와 우정을 나눌 여유도 없다. 이런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참고 견디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면 된다고??
 
우리는 이제 스마트폰과 유튜브, 넷플릭스가 사라진 시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마음을 빼앗기는 영역이 다르고 정도가 다를 뿐 이쯤이면 집단중독이다. 스티브잡스를 비롯한 실리콘밸리의 엘리트들이 자기자식에게는 아이패드, 아이폰 등의 기기사용을 제한하고 직원들에게 트위터 활동을 자제시키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감각과 사고능력을 마비시키는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 중독된 우리 눈앞에 닥친 크고 작은 문제들, 사고와 결단을 요하는 사소한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달아난다.
 
몸이 통증을 느끼면 습관적으로 진통제를 복용함으로써 통증을 소거해버리듯이 마음의 통증을 느낄 때, 우리는 문제를 직시하기보다는 문제상황 자체를 잊게 만들어주는 무언가에 자신을 내어준다. 중독은 기억이고 반사적 반응이다. 중독은 자기에게 해로운 어떤 대상으로 자기 뇌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도취에 의한 쾌락과 중독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이 시대를 변연계 자본주의로 규정한다. 뇌의 변연계가 쾌락, 정서적 기능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쾌락과 중독의 순환에 기반한 자본주의의 속성을 규정한 것이다. 물질의 소비시스템에 의존하는 수동적 쾌락은 우리의 사고를 반응적인 차원에 머물게 하고, 이는 자기 파괴적인 습관을 형성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기를 중단하면 자극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고, 자극에 취약하다는 것은 반응이 무개념적이고 자동적이라는 뜻이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후 도출한 개념은 惡의 평범성banality civil이었다. 아이히만이 차라리 악마성을 보여주었더라면 덜 섬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목격한 것은 남다른 악마성이 아니라 남다른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간,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뻔해서 도무지 아무것도 달리 사유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아이히만은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라 오로지 상투어로밖에 말할 수 없는 자, 생각의 무능,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을 보여주는 자였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삶을, 이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자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 같은 소인들이야 대충 살지만 그들은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신이 퍼뜩 드는 듯하다.
 
아이히만의 행위는 악은 사유할 수 없는 자들 즉, 오로지 상투어로밖에 말할 수 없는 자들의 행위다. 상투어와 관용구로 밖에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은 생성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감각의 통로를 닫아버림을 뜻한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상, 문도 없고 창도 없는 폐쇄적 세상이다. 자신은 그 세상을 안전하고 아름답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바깥에서 보기에 그는 유폐幽閉된 자다. 누구도 가두지 않았건만 스스로 갇힌 자다. 아이히만이 악행을 저지른 것은 그가 악하거나 병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하지 못하는 정상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어요, 나는 몰라요, 내가 뭘 잘못한 거죠? 내 책임이 아니예요 ...’ 자신이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전혀 사유할 수 없는 어리석음, 이것이 천박함이고 惡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타자와 세계에 대한 무감각함의 시작이다.
 
자기 삶의 안전성 외에는 시종일관한 무관심, 타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함, 자기 욕망과 행위의 맥락에 대한 무지, 자신의 판단에 대한 성찰의 부재,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게 하고, 느끼던 대로 느끼게 한다. 관성의 노예들인 우리, 무감각하다는 것은 느끼지 못한다기보다 습관적인 방식으로밖에는 느끼지 못함을 뜻한다. 관성 역시 자연의 법칙이니만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이 관성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힘 또한 내재해 있다. 관성에 따라 사는 데는 힘이 덜 드는데 비해, 관성에 제동을 걸기위해 위해서는 얼마간의 충격내지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지도자들, 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이러해야 한다. 인간은 남보다 더 많이 갖거나 남보다 우월한 재능을 갖거나 권력을 가지면, 타인을 위하기보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사용한다. 인간의 속성이다. 그래서 공자는 그렇게 仁을 이야기하고 敬을 이야기하고 誠을 이야기 한다. 이것은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익혀지는 것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많은 수련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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