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과도기
1차 세계대전은 모두에게 너무 큰 상처였고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극이었다. 그래서 유럽열강과 미국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국제기구를 탄생시킨다. 국지연맹이다. 17세기 이래 세기마다 한 차례씩 대규모 국제전이 있었다. 왜 20세기에 국제기구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을까? 20세기에 와서 비로소 세계분할이 끝났기 때문이다. 열강은 더 이상 분쟁이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중세이후 처음에는 종교로 30년 전쟁, 그 다음은 유럽영토를 두고 에스파니아와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또 그 다음에는 해외식민지를 두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제부터 분쟁은 조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게 국제연맹을 신설한 열강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자가 당착이요 자기모순이다. 지배자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냥 이렇게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없는 놈 들은 그렇지 못하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그 없는 놈 팔자를 계산하지 못했다. 있는 놈이었다가 졸지에 없는 놈이 된 독일이 그렇다.
독일서 공화제 혁명이 일어나 빌헬름 2세가 쫓겨났다. 혁명을 주도한 바이마르에서 독일연방 국민의회가 소집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다. 공화국은 개혁의지가 충만했다. 보통 선거제를 도입했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했으며 대외적으로 베르사이유 조약을 받아들여 국제사회 속에서 국가의 좌표를 정하려 노력했다. 문제는 경제였다. 천문학적 배상금이 문제였다. 공화국은 돈을 찍어 해결하려 있고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미국 차관으로 독일 경제 복구를 도와주면 번 돈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배상금을 갚아나간다는 계획이었다. 독일 국민들은 외국과 연이은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경제적으로 몰락해가는 정부를 더 이상 신임하지 않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히틀러였다.
파시즘은 결코 몇몇 파시스트들이 선동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니아에서 파시즘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엄연히 파시즘화 된 대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국적으로 보면 파시즘체제는 대단히 효과적인 체제로 여겨진다. 히틀러는 전후에 군대 있다가 독일 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독일 노동당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이것을 줄인 말이 나치Nazi다. 그는 선동적인 연설로 순식간에 독일 국민들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베르사이유조약 폐기를 주장하였다. 세계경제가 호황이었다면 히틀러 집권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29년에 터진 대공황물결이 유럽을 덮치면서 공화국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1932년 선거에서 나치는 독일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듬해 히틀러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독일식 문제해결을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파시즘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데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두 나라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첫째 두 나라는 서유럽국가들에 비해 뒤 늦은 19세기 후반에야 국가통일과 국민국가를 이루었다. 이 두 나라는 서양역사의 주류였음에도 통일과 국가 형성이 늦었다. 둘째 그렇게 출발이 늦은 두 나라는 다른 열강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뒤졌다. 국내 자본주의는 발전하는데 이를 소화할 해외식민지가 부족한 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다. 셋째 시민사회의 전통이 없었다. 국가가 파시즘으로 치달으면 시민사회가 제동을 거는 게 서유럽국가들의 메커니즘이다. 시민혁명 경험으로 시민사회의 전통이 형성되어 있던 영국과 프랑스라면 전쟁 패전국이 되었더라도 파시즘이 자리 잡기 어려울 것이다. 파시즘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후발제국주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또 시민사회의 전통이 없다는 결함을 국가 체제의 힘을 보완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즘으로 무장한 두 나라는 1차 세계대전이후 평화를 모색하던 전후 질서를 다시 한차례의 대형 국제전을 일으키게 된다.
최후의 국제전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체제로 국내를 안정시킨 뒤 단기간에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파시즘과 대척점에 서 있는 사회주의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을 공업을 육성시켰으며 농업의 집단화로 농업생산력에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일본의 성장이다. 대공황여파로 경제난에 봉착한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배에 나섰다. 국제연맹이 항의하자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렸다. 동양 유일의 제국주의로 발돋움하면서 품은 1차 목표는 만주의 정복이었다. 최종목표는 중국대륙을 정복해 대동아공영권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일본이 국제연맹의 체면을 여지없이 구겨버리는 일본을 보면서 히틀러도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베르사이유조약의 군비제한도 파기하고 자체무장에 나섰다. 독일의 움직임을 본받아 무솔리니도 오래전 숙원으로 삼았던 에티오피아 침략에 나섰다. 국제연맹은 침략국이라 비난했지만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나라가 힘을 잃으면 국민이 일찍 자각한다는 역설적인 현상은 에스파냐도 예외가 아니었다. 뒤늦게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노동계급이 성장했다. 이들은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 정치와 교회의 분리 등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수구세력(왕당파와 교회)은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수구세력과 군부가 공생관계가 되었고 지식인과 상인을 대표하는 사회주의자들도 연대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인민전선정부다. 몇 개월간의 극도의 혼란이 휩쓴 끝에 군부지도자 프랑코는 반정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내의 왕당파와 군부, 교회세력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즉시 쿠데타를 지지하고 나섰다. 2차세계대전예고편인 에스파냐 내전이 시작되었다. 에스파냐 내전에 대해 유럽 각국의 정부는 무간섭으로 일관했으나 민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 영국의 조지 오웰 등 수많은 지식인 노동자 사회주의자 들이 개인자격으로 에스파냐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에스파냐 내전은 국제 파시즘 세력에게 정치적 실험장이자 신무기 실험장이기도 했다. 1937년 4월 26일 바스크의 게르니카라는 한적한 마을에 독일 공군의 폭격기들이 사격연습을 하듯 폭탄을 퍼부어 주민 2000명과 가축들이 몰살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당시 독일 총사령과 괴링은 개전 초기부터 이 신무기 실험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조그만 마을에 각종 포탄과 소이탄, 심지어는 어뢰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파시즘의 위협은 생각보다 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파냐에 파시즘 정권을 세운 것으로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더 이상 일정을 늦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과 성격이 달랐다. 1차 세계대전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에 도전한 것이고 정상적인 힘의 대결로 기존의 힘의 대결로 기존 판도를 깨려고 한 것이지만, 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이라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 국제역학의 변화를 꾀한 것이었다. 에스파냐 내전에서 또다시 밀려오는 대규모 국제전의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한 유럽의 지식들은 일찍부터 여러 차례 경고를 보냈지만, 당시 세계 정치의 우두머리인 영국은 평화 유지만을 부르짖으며 독일의 움직임에 제재를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경제의 우두머리인 미국 역시 대공항 대책에 부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변화에 관심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고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독일은 몇일 뒤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그제서야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하였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격파하자 동쪽의 러시아도 러시아 민족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폴란드를 공격했다. 두 나라가 폴란드를 분할했다. 폴란드는 나라 잃은 설움에서 해방된 지 20년 만에 또다시 나라를 잃었다. 소련을 내친 김에 발트 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와 악전고투를 벌였다. 하지만 소련은 국제질서 재편의 주역은 아니었다.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공격하면서 영국과 프랑스군과 처음으로 충돌했다. 독일은 어렵지 않게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손에 넣었다. 영국에서는 체임벌린내각이 사퇴하고 독일에 대해 강경한 처칠을 중심으로 하는 거국적 연립내각이 들어섰다.
파시즘이 대중에게 불어넣는 현상은 파시즘이 힘을 잃으면서 깨어졌다. 파시즘이 패하는 것을 본 대중은 간사하게도 파시즘에 대한 혹독한 탄압으로 돌아섰다. 프랑스는 본토를 점령당했지만 영국에 망명한 드골정부가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고 조국의 해방도 스스로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아무리 프랑스가 유럽에서 대접을 받는 국가였다고 할지라도 종전 후 별 발언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와는 달랐다. 1930년대 전성기를 맞았던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은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더욱 고삐를 죄어야 할 상황에 오히려 위축되었다. 게다가 일본의 강압으로 징병까지 당한 탓에 종전 후 연합국은 한동안 한반도를 피해자로 보지 않고 일본의 협력자로 여겼다.
20여 년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 세계는 엄청난 규모의 전쟁에 경악했다. 그런 만큼 이것으로 전쟁은 끝이 난줄 알았다. 한 번만으로 끝날 줄 알았던 세계대전은 겨우 20년 뒤 그것도 더욱 큰 규모로 터져 나왔다. 그제야 세계는 얼마든지 더 큰 전쟁도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럴 경우 세계는 공멸하리라는 것도 실감했다. 인간세상은 최소한의 통합성이 없다면 전쟁은 필연적이다. 30년 전에 홉스라는 철학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법과 제도에 묶이지 않은 자연상태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있을 뿐이라고. 그는 한 나라 내의 개인과 사회를 말한 것이지만 ,그 말은 국제적으로 연장하면 국가가 곧 개인이 된다. 국가의 국가에 대한 투쟁이다. 중세에는 교회와 교황이 그런 투쟁을 조정하는 법과 제도의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연합국측은 중세의 교황과 같은 역할을 해줄 기구를 만들었다. 그것이 1945년 10월에 결성된 국제연합이다. 1차세계대전후 생겨난 국제연합은 강제력이 없었다. 국제연합을 그 점을 보강했다. 참가국들의 군사력을 동원해 국제연합군을 편성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규모 국제전은 많은 신생국들을 만든다. 17세기부터 세기마다 한두 차례 터진 유럽의 국제전이 모두 그랬고, 20세기 초의 제1차 세계대전도 그랬다. 제2차 세계대전은 사상 최대의 신생국들을 낳았다. 엉겁결에 독일에 합병된 오스트리아는 다시 분리되어 중립국이 되었으며 이탈리아가 점령했던 동유럽의 국가들도 전부 다시 독립했다. 아시아에서도 일본이 점령했던 한반도가 독립했고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가 프랑스에 귀속되었다가 결국 독립했다. 승전국이 차지한 지역은 독립시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소련이 집어 삼킨 발트삼국도 독립하지 못했다. 폴란드는 소련이 다시 토해내야 했다. 여기서 연합국들은 새로운 긴장을 느꼈다. 잠시 국제 파시즘이 지배한 동유럽 국가들은 전통적인 지배층이 대부분이 파시즘과 결탁하고 있었다. 독립을 이루면서 반파시즘 세력이 지배층을 쫓아내고 집권했다. 그 중심이 사회주의였다.
전후에 약소국이었던 그들은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소련에 붙었다. 다른 연합군들은 새로운 위기를 느꼈다. 전후 좋지 않았던 영국의 경제는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몰락했다. 영국의 리더 자리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경제의 중심은 미국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세계정치의 중심도 미국이었다. 소련의 동유럽 진출로 연합국들이 느낀 위기는 미국으로 넘어갔다. 새로운 세계질서의 두 축이 된 미국과 소련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7세기 30년 전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 서유럽의 질서를 완성한 전쟁이었다. 30년 전쟁으로 서유럽은 하나로 통합되었던 종교적 질서를 깨고 각개 약진에 나섰고, 에스파니아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나폴레옹전쟁을 거치면서 국민 국가적 질서를 수립했다. 이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1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여기서 패배한 후발 제국주의가 국제 파시즘 세력을 이루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벌였다. 치열한 전쟁을 치루면서 최종적 전리품은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 연합국의 3대 승전국인 영국, 미국 소련 가운데 영국의 운명만 서유럽과 함께 몰락했고, 미국과 소련은 전후 질서 주인공으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