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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세계사 (남경태)

서양사 2

신에게서 인간으로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부활을 뜻한다. 그리스 문화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고 16세기 무렵 서유럽 전체가 르네상스 문화를 공유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서유럽이 1000년에 달하는 오랜 중세를 끝내고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이행기이다. 르네상스가 프랑스어인 이유는 후대 프랑스학자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문화와 예술을 넘어 14-16세기 서유럽 지성운동이었다. 그리스 고전문화가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다가 어떻게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부활했을까? 서양역사는 오리엔트에서 씨앗이 그리스, 로마에서 뿌리를 내렸으며 중세에 줄기가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씨앗과 뿌리, 줄기는 같은 식물의 성장 단계이므로 연속적이고 순차적이다. 이 연속선상에서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 종교개혁은 중세의 줄기가 자라 꽃을 피운 것이다.

 

역사에서 비약이란 없다. 그리스가 오리엔트 문명을 이어받지 않았다면 서양문명의 뿌리는 없었을 테고, 뿌리 없는 줄기와 꽃이 없듯이 중세와 르네상스도 없었을 것이다. 르네상스는 중세와 근대에 끼인 이행기가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천천히 뿌리와 줄기를 키워오던 서양문명이 최초로 꽃을 피운 시기다. 르네상스를 고전문화의 부활로 보는 것은 중세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중세를 부정하면 그리스문화로 직접 연결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중세와 대립하는 측면이 강하다. 중세가 해체기로 접어들면서 그리스도교의 통합력이 점점 약해진다. 종교의 바깥에서 힘을 갖춘 세속의 왕국들이 생겨나고 자라났다. 종교 안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거셌다. 사회의 복잡화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지식을 쌓아갔고 이성의 힘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삶이 신에게 종속되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표이며 행복을 구현하려 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살아가고자 했다. 마저도 이성적으로 해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교 자체는 아직 힘을 잃지 않았지만 기존의 신앙으로는 사람들의 커진 머리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소수의 선각자들이 느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두 가지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것은 신이 아니다. 둘째는 신께서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앞의 것은 신의 부정이고 뒤의 것은 앎과 이성을 통한 신앙으로 이어진다. 중세가 해체되고 있는 와중에도 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뒤의 입장을 따랐다.

 

중세의 서사시는 간혹 있었으나 그것들은 전해내려 오는 민담들에 의해 살을 붙인 것으로 단테의 신곡처럼 지은이가 분명한 작품은 아니었다. 피렌체의 정치인으로 황제파에 속했던 단테는 교황파가 피렌체 정권을 차지하면서 시에서 추방된다. 이후 어려운 망명생활에서 집필한 작품 신곡이 교황이 지배하는 현실을 부정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단테의 한 세대 다음인물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에 이르면 르네상스의 정신이 현저히 드러난다. 호메로스, 플라톤 세네카, 키케로 등 그리스와 로마의 고문헌을 수집하여 연구한 페트라르카는 르네상스의 특징인 인문주의 경향성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현실의 종교, 성직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교황에서 거지까지 귀족에서 하인까지 아르는 사회 각 계층의 수많은 인물을 동원하고 있다. 문학을 통해 르네상스의 문을 연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는 이탈리아 북부의 자치도시인 피렌초와 아레초 출신이다. 르네상스가 북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난 이유는 북이탈리아 도시들이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면서 르네상스의 경제적 배경을 이루었다. 당시 이곳에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독일이 분권화의 길을 택함으로써 북이탈리아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많이 약해졌다. 이곳은 로마문명의 고토이므로 다른 지역보다 고전문화의 전통이 강했고 로마시대 유적도 많았다. 이런 조건은 문학이 문을 연 르네상스의 대표주자로 떠오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정치와 경제, 사회제도 등이 하드웨어라면 문화와 예술은 소프트웨어다. 일반적으로 소프트웨어가 발달하는 속도는 하드웨어보다 느리다. 중세가 한창 변하고 있던 12,13세기 서유럽 세계는 다른 면에서 비잔티움을 따라잡았으나 문화와 예술은 미치지 못했다. 비잔티움 문화가 선진풍이고 첨단의 유행이었다. 이때 피렌체에 조토는 새로운 화법으로 유럽 근대 회화의 창시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비잔티움 성화는 종교적 이목만 부각시킬 뿐 인물이 평면적이고 비사실적 형태를 취하는 데 반해, 조토의 그림은 성서 내용을 소재로 하면서도 각 인물을 개성을 가진 존재로 살려내는 사실적인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또 보는 사람의 눈과 물체의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을 경우 어느 정도로 작게 보이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 원근법의 근본원리를 사용하였다.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한 이 원근법은 3차원의 입체를 2차원의 평면으로 묘사하는 회화에 필요했다. 중세기간에 종교가 만들어낸 압력에 짓눌려 인류 역사 내내 관철되어 오던 사실성을 향한 지향이 끊겼다. 그것을 부활시킨 것이 르네상스 미술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르네상스는 단지 고전문화만을 부활시킨 것이 아닌 억압되었던 인간의 본능을 해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미술을 먼저 떠올리지만 르네상스가 인류 역사 특히 서양의 역사에 크게 기여한 것은 학문분야였다. 인간을 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게 한 인문주의는 인간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다. 중세에는 인간의 위상과 세상에서 역할이 신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인간을 설명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계기를 얻었다. 인간은 이제부터 세계를 마주하는 입장이 되었다.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철학의 주제이지만 아직 철학은 신학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인간중심 세계관을 부르짖은 학문이 천문학이었다. 이탈리아 화가들이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화폭에 담기 시작할 때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로마시데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립한 천동설을 정면으로 뒤집는 지동설이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동양사회에서 인쇄술과 활자를 먼저 발명했으나 주로 지식을 보관하는데 사용했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인쇄술을 발명하자마자 지식보급에 이용했다. 르네상스시대 초기에 시민계급이 탄생하면서 지식이 점차 민간에 확산되었고, 그에 따라 지식의 필요성이 커졌다. 인쇄술 덕분에 새로 정립된 세계관은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인쇄술이 개발되자 장정 먼저 인쇄한 서적이 성서였다. 성서가 대량으로 인쇄되고 폭넓게 보급된 것은 종교개혁의 물결을 거센 파도로 바꾸었다.

 

배가 고프면 단결하지만 배부르면 분열하기 마련이다. 17세기 전반의 유럽이 대체로 그런 상황이었다. 아메리카 발견으로 부를 쌓은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서유럽의 패권을 꿈 꾼 것이나, 조금 일찍 영토 국가의 개념을 깨우친 프랑스가 프랑스 동부 알자스와 로렌 영토를 노리고 30년 전쟁에 개입한 것이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번영을 계기로 커진 국력을 틀어쥐기 위해 영국의 왕과 의회가 싸운 것이다. 모두 배고픈 시절에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들이었다. 신성의 외피를 두르고 시작한 전쟁들이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서 모두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으로 바뀐 이유가 때문이다. 먹고 살만하니까 싸움을 시작했다면 그 전쟁을 촉발시킨 원인이 되는 서유럽의 부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 시대에 동양과 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을 통해 유입된 물자들은 향료나 금은처럼 현금과 다름없는 것들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옥수수, 감자 같은 새로운 농작물, 설탕, 차 같은 다양한 생필품이었다. 동양항로를 장악한 포르투갈은 총포를 내주고 물자를 교환하는 경제적 무역에 그쳤지만, 신대륙을 정치적으로 정복한 에스파냐의 경우에는 무상으로 현지 물자를 빼앗았다. 풍부한 노예 노동력으로 생산한 생산물이 서유럽으로 대량 유입되었으니 서유럽이 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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