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역사가들은 그리스를 서양문명의 요람으로 간주한다. 그 이전의 크레타와 더 이전의 오리엔트 문명이 그리스 문명의 선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 시대에 와서야 서양문명의 골격이 갖추어졌다는 주장이다. 유럽 중심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실제로 근거로 삼는 근거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는 그리스 민주주의이고, 둘째는 그리스 고전시대의 사상이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근대 민주주의로 부활했으며, 그리스시대의 철학과 정치사상은 오늘날까지 서양사상의 원류가 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를 발달시킬 만한 특별한 능력이라도 지녔던 것일까?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폴리스 체제를 취했기 때문이다. 지형상 항구중심도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폴리스가 발달했다. 폴리스체제는 제국주의체제처럼 중앙집권을 지향하지 않았다. 문명이 어느 정도 발달하면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체제가 필수적이다. 아테네가 민주정은 물론 시민층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였으나 시민주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참정권을 가진 시민들의 비율이 너무 적었고 아테네는 여전히 가문과 신분이 중시되는 사회였다. 그런 점에서 아테네의 민주정은 귀족정의 변질된 형태라 볼 수 있다. 여러 가문이 돌아가면서 정치를 담당하는 제도는 임기가 정해진 왕정이나 다를 바 없다. 그리스 민주주의 성과는 자유로운 개인주의다. 평민층의 성장하면서 아테네는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는 기풍으로 흘렀다. 참정권이 폭 넓게 인정되면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와 수사학이 발달했다. 그 소산물이 그리스 사상이다.
철학은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권위가 약한 곳에서 가장 먼저 철학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그리스 본토보다 이오니아에서 싹트게 된다. 6세기 무렵 소아시아의 밀레투스는 지중해와 오리엔트 세계를 잇는 무역중심지로서 번영하는 국제도시였다. 이곳에서 최초의 서양 철학자로 불리는 탈레스가 처음으로 물음을 던진다. ‘세상만물을 이루는 근본적인 것은 무엇인가?’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주요 질문은 ‘... 이란 무엇인가?’라는 형식의 문제제기로 이루어지는데 그 시초가 탈레스이다. 탈레스는 세상만물의 근본이 물이라고 했다. 탈레스의 대답이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물음 그 자체다. 이렇게 근원을 묻는 사고방식이 철학이다.
탈레스가 제기한 물음에 대해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원질原質은 경험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고 보고, 네 가지 성질 뜨겁고 차고, 마르고 젖은 성질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낙시메네스는 그것을 공기라고 주장했다. 공기의 농도에 따라 형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들을 밀레투스학파라고 한다. 또 다른 이색적인 인물이 피타고라스이다. 그는 밀레투스 앞바다에 위치한 사모스 출신으로 그는 종교적 관심에서 철학을 시작했다. 피타고라스가 찾은 원질은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수數이다. 만물의 근원에 수가 있고 우주는 수에 기초한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피타고라스 정리와 무리수 개념을 알게 되었다. 그 밖에 헤라클레토스, 파르메니데스 등도 만물의 근원을 나름대로 주장했다. 이들은 모두 이오니아나, 이탈리아 출신으로 그리스 본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최초로 발생한 최초의 철학자는 소피스트들이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주정이 발달한 아테네에서 토론과 설득의 기술이 중요했다. 전통적인 신분이나 재력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도 출세하는 세상이었다. 그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소피스트들이다. 소피스트들은 폴리스를 돌아다니면서 각 지역의 관습과 문화를 두루 익혔다. 민주정을 꽃피운 아테네야말로 그들의 장기를 써먹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프로타고라스, 고르디우스 같은 소피스트들은 대부분 아테네인이 아니고 떠돌이 교사나 외교관으로 아테네에서 자리 잡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오니아 철학자들과는 달리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바꾸는데 기여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한 프로타고라스의 말로 요약되듯이 소피스트들은 자연세계를 분석하는 대신 인간세계를 움직이는 기술을 철학으로 정립했다.
하지만 탐구를 포기하고 모든 지식을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아테네 지성계는 혼탁해졌다. 소피스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닌 궤변을 일삼는 자가 되었으며, 아테네 사회는 심각한 윤리적 타락마저 조장했다. 이때 소피스트들에 맞서 도덕을 강조하고 철학의 학문적 기초를 놓으려는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지식장사꾼 소피스트들을 겨냥한 말이었다. 그는 독단적인 지식을 주입하거나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했다. 그것이 바로 ‘산파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대화를 통해 지리를 깨닫게 하는 방법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최초의 철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테네의 황금기를 산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늦은 나이게 악처로 유명해진 크산티페와 결혼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중장보병으로 참전해 고초를 겪었다. 그는 제자가 스파르타 첩자였다는 모함을 받아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제자들이다. 모든 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제자는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스승의 철학방식을 계승해 대화체로 많은 책을 썼다. 이오니아 철학의 자연과 그 근원에 대한 관심,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인간에 대한 관심을 합치면 무엇이 나올까?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원질은 영원불변한 것이므로 수시로 변하는 세상 만물에서 찾을 수 없다. 세상만물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체는 따로 있다. 그게 바로 이데아다. 이데아는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실체이며, 사물은 이데아를 인식하게 해주는 창문과 같다. 이데아와 사물, 본질과 현상의 관계가 수천 년 동안 서양사상중 하나인 이원론의 토대가 되었다.
추상적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훨씬 구체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형상form’이라는 개념으로 바꾼다. 형상은 질료를 통해 나타난다. 플라톤이 이데아는 사물개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별도의 실체인 반면, 형상은 질료와 함께 사물 개체를 이룬다. 플라톤의 이원론과 달리 일원론을 펼쳤다. 이후 수 천년동안 서양철학의 양대 축을 이루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에 그치지 않고 고대그리스의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과 같은 인물이었다. 철학과 정치학을 비롯해 논리학, 생물학, 천문, 심리학, 윤리, 기술과학 등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학문 가운데 그와 관계없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중세의 대학은 길드에서 출발했다. 길드는 원래 수공업체들이 결성한 직업적 단체였다. 길드에서 내용을 빼고 형식만을 취해 수공업자를 교사와 학생으로 대체하면 대학이 된다. 대학은 교사와 학생 간, 교사들 간 학생들 간에 결성된 일종의 교육조합에서 출발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정부에서 설치하고 운영했지만 서양대학은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육기관이었다.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라면 학교건물이다. 재정이 없거나 소규모로 운영되는 대학의 경우에는 건물을 마련하지 않고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이 기숙사 대학인 칼리지다. 대학이 인기를 끌자 군주나 도시자치정부들도 대학을 설립하는 사례가 늘었다. 이들은 대학을 관료를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 간주하고 앞다투어 설립했다. 대학의 발달을 군주보다 반긴 것은 로마교황청이었다. 대학에서 중요한 과목이 신학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이 생기기 이전부터 교회와 수도원에서 기관을 운영해오고 있었는데 그것을 ‘스콜라’라 불렀다. 스콜라에서는 당연히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신학은 모든 학문의 근본이자 중심이었으며 오늘날은 그 역할을 철학이 차지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신학의 시녀로 간주되었다. 스콜라에서 이루어진 중세신학, 중세철학이 스콜라 철학이다. 스콜라 철학, 중세철학의 원류는 교부敎父철학이었다. 교부철학은 그리스도교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역혁이 짧은 그리스도교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려면 그리스철학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로마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을 원용해 교부철학을 완성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완성을 이룬 후 철학의 발전은 정지되었다. 종교회의가 모든 철학적 논의를 대신했다. 11세기말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영국의 안셀무스가 신학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스콜라철학의 문을 열었다. 그의 고민은 ‘인간의 이성과 신앙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였다. ‘신을 무조건 믿을 것이냐 알고 믿을 것이냐’라는 것이었다. 신앙을 이성차원에서 논하는 자세였으니 당대 주교들은 깜짝 놀랐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안셀무스는 신앙이 지식보다 먼저이며, 신앙을 깊게 하기 위해서 지식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신앙을 말하는데도 이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
종교를 이성적으로 학문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스콜라 철학의 시각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12세기 초에 제기된 唯名論과 實在論의 대립이었다. 실재론은 실체나 본질이 따로 존재한다는 입장이고 유명론은 실체는 이름 일뿐 실재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세상만물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정한 실체는 따로 있다는 이데아 개념을 둘러싼 논쟁과 같은 것이었다. 풀라톤의 문제를 달리 해결한 사람이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교부철학을 완성한 이래 아리스토텔레스는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보존하고 발전시킨 것은 유럽이 아닌 이슬람 세게였다. 그리스도교권처럼 학문적 배타성이 없었던 이슬람세계에서는 고대철학이 편견 없이 연구되었다. 과학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이슬람 신학과 별로 상충하지 않았다.
스콜라 철학의 성과들을 집대성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의 저작인 신학대전은 교부철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나아가 이슬람 철학과 유대철학까지 총동원해 그때까지의 신학적, 철학적 논의를 문제제기와 쟁점 토론형식으로 총정리 하고 있다.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들이 그렇듯 토마스 사상도 절충적이다. 그전까지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이성과 신앙, 인간과 신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었으나 이제 과학과 종교의 관계도 쟁점에 포함된다. 그는 자연의 진리(과학)과 초자연의 진리(신)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신의 구도 속에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신의 경지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지식을 발전시켜야 하며 그것이 신의 은총을 이해하는 길이다. 종교를 근간으로 하는 해결책이지만 토마스의 노력 덕분에 세속 학문의 길이 열렸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이성을 통해 신의 뜻을 알아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 이성의 해방 즉 르네상스를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