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가 급속히 늘어나자 서유럽 각국은 저마다 제 몫을 챙기려 들었다. 특히 합스부르크가 여기저기 전쟁을 벌이면서 흥청만청 돈을 쓴 것은 서유럽 전체로 보면 부의 국제적 재분배를 대신 해준 것이다. 절대주의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려면 관료와 상비군이 있어야 하고 그밖에도 국가기구들을 운영하기 위해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다. 그 재원을 확보하기 좋은 방법은 전쟁이다. 다른 나라를 집어삼키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엄청난 국가의 부를 단기간에 크게 늘릴 수 있었다. 그런 의도에서 서유럽 각국은 국가재정 상당 부분을 군사부문에 투입했다. 그러나 아무 나라나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 부유한 나라를 정복해야 하는데 그런 나라들은 힘이 세다. 따라서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주목한 것이 무역이다. 방법은 오늘날 보호무역주의와 같다.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리면 부가 쌓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세의 장벽을 높이 세워야 한다. 수출증대와 보호관세를 내세우는 서유럽 각국의 정책을 ‘중상주의’라고 부른다. 이제 국가는 정치주체뿐 아니라 경제의 주체가 되었다. 그래서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국부 개념이 생겼다. 이 국부의 개념은 곧이어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를 가능케 했다. 이 국부개념이 충분히 성숙해졌을 때 자본주의의 정체가 뚜렷이 드러났을 때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이라는 책을 쓰게 된다.
중상주의에 문제가 있었다. 보호관세가 제구실을 하려면 필요한 게 있다. 바로 국내산업이다. 수출할 물건이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에스파냐를 본받아 상업과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던 각국은 점차 산업과 공업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상업과 무역을 잘하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물자를 유통시키는 것일 뿐 생산과는 무관하다. 부가 외부에서 추가로 유입되지 않으면 총체적인 부의 증가는 없다. 13세기 이탈리아 자치도시 상인들은 자체 생산시스템을 만들었다. 수공업자에게 미리 돈과 원료를 주고 물건을 제작하게 한 뒤 그것을 가지고 상업과 무역을 전개했다. 그런 개념으로 시장을 위한 생산이라는 관념이 충분히 무르익었다. 그런 발상과 관념이 낳은 새로운 제도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칼 마르크스가 처음 사용했다. 생산과 분배를 포괄하는 경제제도라는 의미로서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20세기 들어와서 사용되었다. 중세 서유럽에 동방의 문물을 전함으로써 서유럽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이탈리아 상인들이었고 대항해시대에 서유럽을 세계 최대의 경제 중심지로 만든 것은 에스파냐였다. 전통이 강한 곳에서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어렵다. 변화의 바람은 변방으로부터 불어온다. 변방은 바로 중세적 전통이 가장 약한 곳이다.
전통적인 것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것은 신분제다. 성직, 지배하는 영주, 싸우는 기사, 일하는 농노가 명확히 나누어져 있던 중세사회 전통에서 모든 개개인이 신분에 의해 규정된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런 신분제를 부추긴 것이 종교의 굴레다.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현세보다 내세를 중시했다. 현세는 좋은 내세로 가기위한 중간단계 혹은 시험장에 불과했다. 현세에는 오로지 신앙만이 중요할 뿐 세속적인 삶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세의 틀을 부수기 위해서는 망치, 종교개혁이 필요했다. 칼뱅주의는 현세의 세속적인 삶이 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좋은 내세를 보장한다는 척도라고 가르쳤다. 자본주의의 발생에 필요한 적당한 부를 가지고 있고 중세의 종교적, 신분제적 굴레에서 자유로운 곳이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에스파냐를 물리치고 최대의 해상 무역국가로 발돋움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이루기 위한 재정적 자격을 구비했고, 가톨릭 냄새가 있지만 영국국교회로 종교독립을 이룸으로써 자체 종교적 면허도 가졌고, 대륙 봉건제가 강력하게 뿌리 내리지 못한 곳으로 신분적 굴레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봉건 영주들이 농민들을 폭력적으로 몰아내고 농민들 울타리 대신 자신들의 울타리를 치면서 영주들은 토지에 농사를 짓는 대신 양들을 길러 당시 첨단산업이었던 모직물공업의 원료인 양모를 생산했다. 이는 자본주의의 초기적 단계에 속한다. 모직물공업이 발달하면서 농민들 중 일부 부유층은 자작농으로 성장했고 이들 중 상층부가 평민출신으로 귀족신분에 가까이 다가간 ‘젠트리’를 형성했다. 이 젠트리가 시민의 주력을 이루었고 청교도혁명의 주체세력이 되었으니 영국의 근대적 의회제도는 이런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사에서 올바른 평가란 무엇일까? 토지를 잃은 영국 농민들은 유랑민이 되어 고통을 겪었고 이것이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진보적이었던 토머스 모어는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당시 누가 봐도 나무랄만한 영주들의 탐욕은 결국 영국이 자본주의 앞당기는 역할을 했고 세계최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피땀 흘려 닦아 놓은 대서양 항로에는 점차 네덜란드 상선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몰락해 가는 에스파냐 유산은 한때 에스파냐 자식이었던 네덜란드에 거의 상속되었다. 그때 영국이 등장했다. 이미 엘리자베스시대 말기 1600년에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만들었다. 그러자 영국도 동인도 회사를 세웠지만 영국은 무역 면에서 네덜란드에 비해 한 수 아래였다. 네덜란드는 인도는 물론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일본까지 손을 뻗쳐 본격적으로 아시아 무역에 나섰다. 특히 이 무렵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는 각별했다. 일본에서는16세기 중반부터 포르투갈 상인들이 출입했으나 일본인들은 무식한 장사꾼 취급을 했고, 가톨릭을 내세우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네덜란드 상인들은 종교도 강요하지 않았고 신사다워 쇼군의 호감을 샀다. 그들에게는 나가사키 항구에 별도 구역을 설정해 무역을 허락했다.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크롬웰은 새로운 항해 조례를 정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산출된 물건을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로 운송할 때는 영국의 선박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항해 조례에 따라 곳곳에서 네덜란드 상선들은 영국 군함에 검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제 영국은 에스파냐 뒤를 이어 해가지지 않는 나라의 명성을 물려받고, 세계 진출 선두주자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발흥했던 시대였던 만큼 영국의 세계진출은 에스파냐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항해시대에는 식민지에서 필요한 물자를 들여오는게 중요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는 무엇보다 시장이 중요했다. 에스파냐의 식민지에서 착취를 통해 단기간에 단물을 빼먹는 방식을 썼지만, 영국은 장기적이고 다목적 용도로 원료공급처인 동시에 수출품 시장으로 이용했다. 이를 위해 정치적 지배가 필수적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식민지가 아메리카였고 인도였다. 전 유럽에 근대국가 체제를 확립시킨 30년 전쟁은 사태종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일차적 영토 분할은 끝났고, 그것으로 모든 문제는 종결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원대한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바둑으로 치면 포석을 마치고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는 단계였다.
루이14세는 다섯 살에 즉위했지만 72년이나 재위하는 바람에 아들과 손자 모두가 죽었다. 그의 증손자로 왕위를 계승한 루이15세도 증조부처럼 다섯 살 때 왕위에 올랐고 증조부에 버금갈 만큼 오래 재위했다. 그의 치세 60년 동안 프랑스는 내내 추락하면서도 보수화 추세는 더욱 강해지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프랑스는 안으로 점점 곪아갔고 문제는 쌓여갔다. 학문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발전하게 마련이다. 학문이란 문제를 추구해 답을 알아가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면 학문이 성립할 수 없다. 문제로 가득한 18세기 프랑스에는 그만큼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진 만큼 그 노력은 극히 다양했으며, 전부가 프랑스가 처한 어둠에 빛을 던지려는 처방적인 의도를 담고 있었으므로 크게 계몽주의라고 부른다.
종교가 지배하든 중세에는 사회적 문제도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나, 이제 그럴 수도 없고 해결도 교회에 맡길 수 없었다. 계몽사상가들은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의 힘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이제 인간은 신의 의지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계몽사상은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각개 약진중인 유럽의 군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가 계몽사상에 매료된 이유다. 많은 계몽사상가가 나왔으나 프랑스 지배층은 요지부동이었다. 볼테르는 철학 콩트 ‘캉디드’에서 인간정신이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프랑스 사회의 신분제도를 비판했지만, 프랑스 지배층은 그 저서를 금서로 지정했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인간은 이성의 산물이며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이 15세는 묵살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주권이란 사회내 개인들의 계약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을 때 ‘왕권은 신이 내린 거’라고 믿는 루이15세는 루소는 체포하려 하자 국외로 달아났다. 프랑스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유마저 탄압을 받았다는 것은 프랑스체제의 위기를 뜻하는 것이었으나 지배층은 모르고 있었다. 시민들의 생각은 자유로워지고 있는데 반해 체제는 자유를 옥죄려 했다. 그것은 구체제, 앙시앵 레짐이다. 계몽사상가들이 지적한 문제는 무엇보다 사회적인 불평등과 특권층의 존재였다. 당시 프랑스 총인구는 약 2700만 명 이었는데 2퍼센트도 되지 않는 성직자와 귀족들은 면세 특권을 누렸고, 전국 토지의 10분의 1을 소유했다.
미국의 독립은 영국의 패권전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프랑스 왕실에 기쁨을 주었지만, 그 때문에 왕실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유럽도 아닌 아메리카에서 영국식민지의 독립전쟁까지 하느라 프랑스 국고는 텅 비었다. 만성적 재정적자를 견디지 못한 루이16세는 삼부회를 소집했다. 1789년 5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가장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제3의 신분인 시민대표들이었다. 높은 인플레이와 과중한 세금, 거기다 산업혁명으로 경제력이 크게 팽창한 영국의 경제적 침략으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은 평민들이었다. 하지만 평민층과 지배층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자 시민들은 별도로 헌법제정 국민의회를 조직하고 새로운 헌법을 정할 때까지 농성을 했다. 그 회의장소가 테니스코트였기 때문에 테니스코트 서약이라고 한다. 성직자들과 일부 자유주의 귀족들도 동참했다. 삼부회는 문을 닫았고 신분제를 떨쳐버린 근대식 국민의회가 성립했다.
루이는 국민의회를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했다. 파리 시민들은 7월14일 총과 탄약을 찾기 위해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했다.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신호탄이었다. 각지 농민들은 영주의 자원을 습격해 약탈하고 봉건적 특권이 기록된 장원문서를 불태웠다. 혁명은 파리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마침내 8월 4일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1789년 8월 26일 인권선언이 성립되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제이다.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의 것이다. 재산권은 신성 불가침하다.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인권개념은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서 최초로 문서화 되었다. 엄격한 신분제와 절대왕권이 지배한 프랑스 사회로서는 급격한 변화였다.
서양사에서 흔히 쓰는 시민이라는 말은 도시거주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 평민, 국민에 해당한다. 서양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자치적으로 발전했다. 계급으로서 시민은 근대의 산물이지만 그런 역사적 전통이 있기에 서양에서 시민은 곧 국민을 의미한다. 서양에서는 우리나라에 해당하는 국민이라는 단어가 없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서양의 시민개념이 없다. 오늘날에도 아직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역사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