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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보리스 시륄니크지음, 정재곤 옮김)

애착의 부재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낯선 것과 대면하면 흥미를 느끼지만 가족 없이 자란 아기들은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은 뭔가 마음을 안정시켜줄 수 있는 애착의 대체물을 찾아나선다. 이때 가장 안정적이면서 영속적인 감각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자기 신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아이들은 모든 자기중심적인 행위를 자기 몸에 집중시킨다. 아동을 혹독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키울 것을 권고하기도 한다. 사실상 오늘날의 부모들은 자신들이 누리지 못한 것을 자녀에게 주기 위해 온갖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노고는 아이들의 발달을 돕는 좋은 조건을 제공하기보다 과잉으로 인한 병리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가축화된 동물들은 자연적인 환경에서 사는 동물에 비해 오래 살지만, 훨씬젊어서부터 노쇠현상을 나타낸다. 가축들은 영양과잉과 과보호 덕택에 스트레스는 피할 수 있지만, 저항능력이 저하되어 일찍 노쇠한다. 가측들은 일찍부터 류머티즘, 동맥경화, 내출혈, 반신불수, 그리고 노화 과정에 뒤따르는 일종의 에이즈인 선천성 면역결핍증을 앓는다. 이처럼 가축들은 병을 앓으면서도 오래 사는데 반해 자연적 환경에서 사는 동물들은 병을 앓거나 늙지 않는다. 그저 죽을 뿐이다.

 

저개발국가의 여성들은 일찍 죽는다. 유렵의 출산 환경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지만, 아프리카에는 전문인력이 부족하여 출산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세 명의 여성중 한 명이 출산중에 사망한다. 반면에 선진국 여성들은 장수를 누린다. 여성들은 작업중의 사고나 술, 담배, 자동차 사고 또는 자신을 돌보려 하지않는 사고방식 등으로 사망률이 높은 남성들에 비해 훨씬 오래산다. 하지만 65세를 넘기면 여성들도 외로움과 가난, 치매,  끊임없는 질병등에 시달려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삶다운 삶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반 남성의 평균수명이 40-50세 였던데 반해, 학자들의 수명은 17세기에 64세, 18세기에 65.8세, 19세기에 68.8세, 1960년대 71.5세였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98세까지 살면서 저술활동을 하였고, 아인슈타인도 76세까지 살았다. 수학자들은 극히 예외적으로 15세에서 20세 사이에 최고의 천재성을 발휘한다. 수학자들의 창조성은 25세를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하고, 반면에 나이가 들면 뇌가 노화하면서 언어적 창조성이 증가한다.

 

두뇌 활동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은 노화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다. 모든 사람은 지적 활동과 음식, 운동, 즐거운 마음과 사회활동 등이 노화를 늦추게 하는 요인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하지만 노화를 방지하는 사실 가운데 가장 의외의 방법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다. 근심 걱정도 없고, 자녀 때문에 속썩을 염려도 없는 독신자들은 노년을 보내기가 쉽지 않다.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는 혼자 사는 사람보다 오래 그리고 질적으로 나은 노년을 보낸다. 어째서 결혼 생활이 노화를 방지하는 수단이 될까? 근심, 걱정, 갈등, 불안, 체념, 제약, 책임 등이 떠나지 않는 결혼생활이 어떻게 이롭게 작용할 수 있단 말인가? 이혼 했거나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에게가장 먼저 찾아오는  변화는 섭취하는 음식물의 변화다. 단조로운 식사는 머지않아 소화장애와 비타민 부족을 가져온다. 두변째는 의상변화다. 혼자된 남성은 스포츠 복을 찾게 되고 낡은 옷을 입는다. 여성은 실용적이고 질긴 옷을 입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가정해 볼 필요가 있다.  "책임과 부담이 따르기는해도 부부생활은 노화과정에 맞서싸우게 해주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고 갈등을 동반한 이 같은 형태의 애착은 자극적인 일들을 만들어 내고 일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부부가 맺어질 때의 애정적인 약속이나 관계는 오랫동안 부부생활을 하면서 일상에 묻혀 버린다. 하지만 처음의 약속은 은퇴시기가 찾아오거나, 한쪽 배우자가 상대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게 될때 표면으로 불거진다. "남편은 권위적인 사람이예요. 하지만 남편의 그런 면이 나에게 피해를 준적은 그리 많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맞벌이 부부라서 늦은 밤이 되어야 다시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남편은 은퇴하고 나서 집안 일을 적극적으로 했다. 집안 살림은 흠 잡을 데 없었고, 쓸데없는 지출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부인도 은퇴하게 되어 본래 여성의 영역이던 살림에 관여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남편은 공격적으로 변하고, 우울해졌다. 남편은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결정권을 상실하고,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겼다. 노인들은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릴 뿐아니라, 소화하기 쉬운 음식물을 섭취하고 낮잠을 자야 하며, 익숙한 환경에서 지내야 하고, 가까운 단골 상점들만 이용해야 하는 등 일상의 제약들이 가중되는 까닭에, 흔히 여성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모계사회와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부부사이에는 성문제나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일상에 대한 주도권 싸움으로 갈등이 빚어진다. 나이든 여성은 남성이 가사에 간섭하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을 쉽게 내쫓곤 한다. "제발 나가서 산책이러도 하라고, 친구라도 만나고 해라고"  "나는 남편이 내 눈 앞에 얼쩡되는 꼴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남편이 장을 보거나 설거지 하는 것을 보면 못참겠어요."  바쁜 일상 생활 탓에 50년간 묻혀 있다가, 표면에 도출된 이러한 갈등은 사실상 부부가 처음 만나던 때부터 잠재되어 있었다. 나이든 부부이 갈등은 이들이 청소년기에 자신들의 부모와 빚었던 갈등을 재현한다.

 

"제가 키우던 개를 대신할 수 있는 개는 세상에 없어요. 애정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그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없어요." 남편을 먼저 보낸 여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이든 부부는 부부로서의 인연이 맺어지던 때에 자리 잡은 문제를 끝내 떨치지 못한다. 은퇴는 거의 언제나 직업으로 부터의 해방감과 좀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를 안겨준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부모의 곁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이 말썽을 피우면 가정은 엉망진창이 된다. 말썽 많은 자녀가 집을 떠나면 부모는 자유를 느낀다. 나이든 부부중에 집이 텅빈 것 같은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보통 자녀들에게 과도한 애착을 쏟았던 이들이다. 

 

40대 이전에는 남편이 부인보다 바람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 남성의 에로티시즘은 25세에 절정을 이룬다. 반면에 여성은 남성이 잠잠해지는 40대 이후에 성적 욕구를 분출시킨다. 부부사이에도 이처럼 화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노년은 위기가 가장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시기다. 사춘기의 갈등이 삶의 초창기 몇 년동안의 시간에 기반을 두고있는데 반해, 노년이 되어 겪는 고통은 젊은시절부터 뿌리 깊이 정착해 온 것이다. 나이든 사람이 어린시절에 겪었던 문제로 고통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느 환자는 68세가 지난 다음부터 남편에게 모질게 굴었다. 그녀는 그 까닭을 묻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이런 못난 사람과 결혼한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과 결혼했어야 했는데 사실 그 사람과는 천생연분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찌 저런 작자와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한번도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이처럼 뜬금없이 과거의 일이 문제 되는 것은 나이든 사람의 특유의 기억방식 때문이다. 노인은 질소질 유기물의 부족으로, 최근에 있었던 일이 기억창고 속에 잘 고착하지 못한다. 의식이나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어린시절이나 젊은시절의 일들이다. 노인들이 머나먼 과거의 일로 괴로워 하는 것은 생물학적 이유 때문이다.

 

욕망은 결핍이 존재할 때 강렬해진다. 만족은 욕망을 죽인다. 나쁜 엄마가 애착형태를 강화시킨다. 인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나쁜 엄마는 애착의 욕망을 강화한다. "이 다음에 크면 나는 우리 부모가 이루지 못한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낼거야. " 가족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족만큼 절실한 것이 없고,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에게는 관계만큼 애틋한 것이 없다. 확신과 평화로운 무감각으로만 이루어진 삶이 과연 존재할까?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불안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