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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보리스 시륄니크지음, 정재곤 옮김)

아버지의 의미

자녀의 탄생은 아빠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왜냐하면 이로인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가 아기를 대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엄마에 비해 보잘것 없고 미적지근하다. 반면에 엄마가 느끼는 감정은 강렬하면서도 애정이 넘치고, 애틋하면서도 생생하다. 아내의 출산이후 남편들은 마음이 공허하고 허탈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산모는 힘들고 모진 방식으로 자신이 엄마임을 체험했다. 하지만 남편이 아버지로서 인정 받으려면, 자기 아내를 통한 사회적 인정에 의해서만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게된다. 일반적으로 아빠들은 엄마들에 비해 아기를 단장하는 일에는 소홀하지만 훨씬 잘 놀아준다. 엄마를 대신해서 아기를 돌보는 이같은 아빠의 행태는 아기의 발달에 변화를 가져온다. 아기는 엄마에 비해 아빠를 좀 더 활동적이고, 공격적이고, 대담하고, 멀게 느끼는데, 바로 이점이 아기의 독립심과 공격성을 키워준다. 아빠는 아이와 함께 놀아줌으로써 아기가 분리의 경험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고 공격성을 승화할 수 있게 해준다. 아빠가 돌보는 아기들은 미지의 대상에게 좀더 호기심을 많이 보이는 듯하다. 대개 아빠와 아기 사이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은 엄마를 매개로한 삼각관계로 이루어진다.

 

금실이 좋은 부부는 배우자의 말이나 행동에 대단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이런 부부는 배우자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 파트너의 말이나 행동을 아기에게 흉내내곤 한다. 일반적으로 부부가 함께 있을 때 아기는 심리적으로 좀 더 안정감을 느낀다. 신생아와 맺는 여러형태의 상호작용은 부모의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모의 무의식이 아기의 행동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 6개월째부터 얼굴 전체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아는 얼굴을 대할 때만 반가워하는 기색을 나타낸다. 만일 아기가 모르는 얼굴을 접할 때는 미소 짓는 대신에 얼른 엄마 품에 안기려 한다. 어떤 가정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아빠를 성가시게 하지 말아라. 고단하실 테니까. ' 아이는 아빠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어하고, 아빠는 조금도 피곤하지 않은데 말이다. 엄마가 자녀의 애정을 독점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을 이런 식으로 드러낸다. 항구도시에 거주하는 아동들에게 아버지는 비록 항해중이라 없지만 어머니는 사진이나 물건 또는 말을 통해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환기시키고 의식하게 해준다.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뜨겁게 환영받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며 슬픈 표정을 짓는 아내들도 있다. 요컨대 은연중에 엄마가 보이는 태도에 의해 사진속의 아빠 에게 부여되는 의미가 달라진다.

 

모든 것이 파란 세상에서는 파란색이란 개념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파란색을 깨닫기 위해서는 파란색이라고 부르게 만드는 감각과는 다른 파장을 지각할 수 있어야 한다. 신경생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변하지 않고 반복되는 감정은 전혀 자극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정보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의식화나 추상적 사고 , 재현이 가능하려면 뭔가 다른 정보가 주어져야 한다. 모든 것이 푸른색뿐인 감각의 무차별 세계속에서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재한 것조차 알 수 없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재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지시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누군가 아버지가 부재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한다. 아버지는 엄마에 비해 아홉 달이나 늦게 인식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게다가 우리 문화권에서 아버지상은 사내다운 덕목을 강조하고, 강력한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 아버지란 존재는 어머니의 말에 의해 재현될 뿐 아니라, 국가주의에 의해 가정을 대표하는 가장으로서 역할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말과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남성 다움의 교차로에 위치한 아버지는 자녀를 돌보고 먹이고 팔에 안는 따위의 감각을 박탈당한 존재로 해석된다. 자녀와 감각적으로 접촉하는 것은 결코 사내다운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마가 일하기 위해 밖을 나갈 때 자녀들이 변하는 까닭은 엄마가 일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의 변화로 인해 애착의 통로가 변경되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사회적 역할은 애착의 심리적, 생물학적 통로를 변화시킴으로써 가족의 삼각구도내에 애정적 힘의 분할을 변경시킨다. 우리가 이제껏 보아 왔던 것과 정반대로 자녀를 돌보는 아버지가 자녀를 감각적으로 책임지는 반면 어머니는 아버지 말에 의해 존재가 인식되는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자녀가 아버지의 존재를 자각하게 됨으로써 아버지는 분리자로서 이 역할 뿐만 아니라 안정감을 제공하는 어머니의 몸과, 두려우면서도  호기심 많은 미지의 욕구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까지 담당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화를 이끌어 낸다. 아이가 처한 개체 발생적 환경은 처음에는 엄마의 뱃속에 국한 되지만, 점차 엄마의 몸을 매개삼아 발달하면서 아버지의 존재가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생후 6개월이 되지 않았고 따라서 아직 엄마의 주변 세계를 지각할 능력이 없는 시기라면 남성은 호의적이고 발달을 도울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저 엄마를 대신한는 존재로서만 지각 될 뿐이다. 하지만 아기가 8개월을 넘기면 이 남성은 아기를 이끄는 양육자로서 맏형 내지 큰 오빠, 또는 유사한 아버지로서 지각된다. 아직 남성이 아버지로서 지위를 얻지 못하는 시기다. 아기가 이 남성을 아버지로 인지하려면 신경감각적으로 성숙해지는 민감한 시기에 아버지를 지각해야 하고,  게다가 엄마가 무의식적인 제스처를 통해 남성을 아버지로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남성이 아기로부터 아버지로 인지되기를 원한다면, 아기의 엄마에 의해 아버지로 명명되는 동시에 아기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민감한 이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접하는 세 번째 환경은 바로 사회적 아버지다. 대개 사회적 아버지는 아버지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꼽히는 아버지의 상이다. 침팬지의 경우도 수컷새끼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청소년기에 접아들기 전에 어미로부터 쫓겨나 그들의 변경에서 얼쩡거려야 한다. 그러면 장성한 수컷들이 접근하여 함께 놀아주기도 하고 지배력을 행사한다. 사자의 수컷들은 갓 태어난 새끼들을 모조리 물어 죽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회적 물리적 시각에서 볼 때 이같은 행태는 후대의 유전자를 모조리 없애버리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수컷은 짝짓기를 할 암컷의 새끼들을 모두 죽여 없앰으로써 앞으로 태어날 새끼들이 생물학적으로 자기 새끼들임을 확신하고 개체의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아버지들은 어머니와 사회 사이에 위치한 중간지대에서 벗어나 있거나 쫓겨난 채 가족 내에서 감각적 존재감을 갖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사회조직이 바로 아버지의 자리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못하는 대상은 의미론적으로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아버지 없는 사회가 남성 없는 사회라는 뜻은 아니다. 아버지는 세종류의 아버지가 존재한다. 즉 아버지는 자녀의 정신세계 내에서 어머니 안의 아버지, 어머니 주변의 아버지, 그리고 사회적 차원의 아버지로 존재한다. 어머니 상에는 연속성이 있다. 어머니가 부재할 때 어머니는 아이에게 감각적이고 상징적으로 어머니를 대신하는 잠정적 대상에 이해 대체될 수 있다. 반면에 아버지의 개체발생은 좀 더 뚜렷한 단계를 가진다. 생후 6개월까지 지각되는 아버지, 15-20개월 사이에는 아빠, 그리고 2-3세 사이의 사회적 아버지 이다. 어머니 안의 아버지란 씨를 뿌리는 아버지를 말한다. 어머니 안의 아버지는 어머니에 의해 그 존재감이 감각적으로 전달된다. 

 

어머니 주변의 아버지, 지각되는 아버지, 상상력의 감각적 토대, 낯설지만 어머니가 친밀하게 대하는 이 인물은 모든 언어적 방식을 통해 '아버지'라고 말해진다.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아버지라고 불린다는 사실만으로 삼각구도를 만들어 낸다. 아기가 대상을 인지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15-20개월째 이르러 삼각구도를 이루는 관계를 인식하고 대상을 가리킬 수 있게 되면서 부재하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말을 통해 현존하는 대상을 인식하고, 가리킬 수 있게 되면서 아버지를 의미하는 말을 통해 현존하는 대상을 지각하고 아기가 엄마를 쳐다보면서 검지로 대상을 가리키며 '아빠'란 소리를 만들어 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아이가 3세 경에 이르게 되면 엄마, 아빠라는 말은 차별화된 기능을 가르키게 된다. 즉 아빠는 아버지를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내 아빠란 뜻이 된다. 드디어 아버지의 존재가 언어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순간 어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의미론적 아버지가 된다. 그후 오랜 시간이 지나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사회로 나왔을 때 가장, 수표를 긁는 기계로 불리는 존재가 출현한다. 이제 아버지란 존재는 사회적 역할이나 사법적 지위를 지니고 가정 내에서 사회를 대변하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아버지란 존재는 무한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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