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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보리스 시륄니크지음, 정재곤 옮김)

섹스의 죽음

"드디어 불구가 되었다. 이제 섹스로부터 해방이다. 자유, 자유,... 여태까지 섹스 때문에 여자들에게 매여 있었지만 앞으로 기꺼이 섹스를 버린다. 감시당할 필요도 없고 책임질 것도 없고 얼마나 홀가분 한가. 사랑의 댓가는 감옥이 아니던가? 우리는 다만 자유를 누리고 싶을 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들 만큼 대하기 편한 사람은 없거든요. "  

 

1986년 <포앵>지는 독자들에게 삶에서 가장 가치를 두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여론조사를 했다. 음악, 스포츠, 가족, 사회적 성공이 상위를 차지했다. 섹스는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다. 물론 여론조사는 부분적인 진실만을 알 수 있다. 국가마다 개인마다 다르다. 사랑이란 감정은 언제나 새롭게 태어난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이든, 신을 향한 사랑이든 사랑은 격앙된 공통의 감정이거나 완전한 융합처럼 유일한 의미에 대한 극한적인 의식을 의미한다. 희열을 동반하는 마취제와도 같은 강렬한 이 감정은, 우리의 사고를 장악하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반면에 애착은 교묘하게도 일상적으로 엮어진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애착은 매일매일 그 흔적을 각인해 놓는다. 애착을 쌓아 나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그것에 무감각해지고, 애착의 대상을 상실했을 때라야 비로소 그 위력을 실감한다.

 

 "나는 내가 그 남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지 못했어요. 그 남자가 곁에 있을 때는 의식조차 못했지만, 지금은 그 빈자리가 너무도 휑합니다." 사랑하다란 동사는 사랑의 희열뿐 아니라 말없는 애착을 아우르는 표현으로 성격이 완전히 다르고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감정을 동시에 가리킨다. 사랑이 지속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태어나는 사랑은 과도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사랑을 포기한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더 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 중에는 독신 여성의 비율이 대단히 높다.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새로운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고 뛰어난 미모를 갖춘 여성들이, 자기보다 키도 작고  부족한 남성을 선택하는 사회화 과정을 선택한다. '만일 사랑하는 남성이 성관계를 하지 않고 당신을 다정하게 안아만 준다면 당신은 만족할 것만 같습니까?' 라는 물음에 10만명의 여성중 72%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남편이 필요해요. 남편이 나를 다정하게 감싸주길 바래요, 남편이 옆에 있어주고, 쳐다봐주고, 내가 딸아이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만져주는 것이 좋아요. 남편과 성관계만 가질 염려만 없다면 정말 편할 것 같아요. 하지만 남편이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하면 불안해져서 일부러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아요. 물론 남자가 필요하긴 하지만 이왕이면 성불능 남편이면 좋겠어요." 남성도 이런 유형의 사랑을 원하기도 한다. "성 불능이 되다 보니 다정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어. 폭풍처럼 몰아치는 성욕과 달리 다정함은 그야말로 감미로운 것이지. "  "사랑하지 않는 남성과 결혼하면 편리한게 한두가지 아닙니다. 섹스, 열애, 열병, 고통, 격앙된 감정 따위는 남의 일이 될테니 말이죠.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남편을 부려먹고 일을 시킬 수도 있고, 복종할 필요도 없고, 거리를 둘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과도한 사랑은 존재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자아를 혼란에 빠뜨리며 때로는 불안감을 안겨준다. 사랑이 몰고오는 격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지만, 욕망의 상상체계에 조정을 가져온다. 격정이 가라앉고 성적매력이 사그라지면 애착이 정착하기 시작한다. 남성이 자기 아내보다 덜 예쁜 여인도 자극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 여성이 적절한 거리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혼외관계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재차 일깨우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젊은 부부는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뇌의 신경세포는 20-25세까지 계속해서 생성되고 인성은 오랜 기간동안 유연성을 발휘하며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모험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는 사랑으로 서로에게 흔적을 남길 때에도 여전히 미완성 상태인 것이다. 그 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두 존재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했을 어려움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애착이 형성된다.  애착은 강해지고 사랑은 수그러드는 것이다.

 

19세기만 해도 남녀가 맺어지고 나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이 15년이었다. 한번 맺어지고 나면 50년 동안이나 지속되는 오늘날의 부부에게 새로운 형태의 섹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뜨거운 혼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법적인 배우자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게 남아있는 현상으로 전에는 보지 못하던 갈등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재혼한 커플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은 두 사람이 우정과 다정다감함, 매혹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이는 처음 맺어진 커플이 서로에게 너무 빨리 익숙해짐으로써 보여줄 수 없었던 특징이다. 이혼 후 다시 맺어진 이런 커플들은 서로에게 좀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이미 부부생활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쩐일인지 우리는 이혼하고 나서 더 친한 친구가 되었어요." 우리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여성이 전업주부인 가정의 부부관계가 비교적 무감각한데 반해 맞벌이 부부의 성생활이 오히려 왕성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커플의 70%가 두 번째 결혼이 첫 번째 결혼보다 행복하다고 응담한 것으로 조시되었다. 무엇인 달라졌을까? 성생활이보다 적극적이 되고, 부부가 일상적으로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좀더 온화해진다.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섹스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20%이고, 불안감을 느끼거나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3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50% 가량의 사람들이 섹스의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