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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보리스 시륄니크지음, 정재곤 옮김)

사랑의 흔적에서 평온한 애착으로

잠자리를 거듭하는 동안 연인들은 연정을 잃어버린다.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어째서 이렇듯 사랑은 한번 사그라지면 다시 살아날 줄 모르는 걸까? 사랑이라는 말의 역사는 동물적 욕망과 에로티시즘의 문제를 동시에 제기한다. 넓은 의미에서 사랑은 우리를 특정 대상으로 향하게 만드는 애정담긴 힘을 가르킨다. 자애로운 어미의 사랑뿐만 아니라, 성적 흥분을 촉발하는 격한 감정, 사물이나 사상, 혹은 자기 스스로에게 열렬히 끌리는 사랑도 포함된다. 생물학적 요인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아뫼르(Ameur; 짐승의 발정 난 상태)는 호르몬 분비와 함께 성적대상을 맹렬하게 찾아나서게 만든다. 그러다 마침내 적당한 개체를 발견하면 이번에는 이쪽에서 성적 행태를 촉발함으로써 서로 간에 감각적 접촉이 이루어진다. 이로서 두 개체는 상호작용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에게 일련의 제스처를 촉발하고, 자극이 누그러들 때까지 서로의 욕망을 일치시킨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 출생후 몇 년 동안 감각의 활황기로 지내다가 욕망이 식어버리는 동면기를 맞이하게 된다.

 

어떤 문화에서든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랑이란 감정이 탄생하는 순간을 들려준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감정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자기세계에 나와 완벽하고 이상적인 대상을 찾아나선다.  “ 그날 저넉,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그녀와 첫눈에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를 모험에 나서게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감정이다. 이리하여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펼쳐진다. 시나리오 또한 언제나 동일하다. 첫마디 말과 매혹된 시선, 건네는 첫마디 말과 제스처, 접근과 유혹의 과정, 그리고 서로의 욕망과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공감, 벅찬 가슴은 상대방의 사소한 말이나 몸짓, 가볍게 흔들리는 옷섶이나 머리카락, 미세한 눈짓이나 깜빡임에도 관능을 느낀다. 사소한 자극도 평범을 넘어서는 감각을 전한다.

 

사랑의 이야기는 끝이 나빠야 한다. 사랑이야기는 죽음으로써 종지부를 찍고, 결혼으로서 사회적 맥락안에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사랑이 가져오는 융합은 오로지 닫힌 세계, 사적인 영역 안에만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꽃은 이미 꺼져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인은 환희의 기억 그리고 불과 몇 달 동안의 일이지만, 잃어버린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향수를 계속해서 내면에 간직한다. 감각적으로 평온을 찾아가는 이때가 되어서, 우리는 현실과 서서히 위력을 회복하는 사회적 제약에 다시금 눈을 뜬다. 사랑하는 남녀가 현실과 타협할 때, 사랑의 이야기는 의식으로 끝을 맺는다. 그들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이 붙는다. 이들은 가족 수당을 신청하고, 또 좋은 조건으로 융자를 받았다. 현실이 위력을 발휘하며 사랑이야기는 마침표를 찍는다. 사랑이야기는 결말이 나쁠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종국에는 비루한 현실세계로 돌아와서 사랑이 죽어가듯 그렇게 서서히 죽는다.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언제나 눈물과 함께 들려주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사랑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놀라운 경험인데 반해, 애착은 일상생활을 통해 쌓아나가는 문제다.

 

우리 모두는 욕망에 의해 태어났다.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부모님이 서로에게 품었던 애정의 결과로 태어난 존재다. 사실 첫 번째 자녀는 부모이 애정에 의해 태어나는 비율이 75%에 달하지만, 네 번째 자녀는 그 비율이 30%에 그친다. 한편 첫 번째 자녀는 과도한 책임감으로 우울하고 초조한 성격을 갖게될 가능성이 높은데 반해, 막내는 이와 같은 부담감에서 벗어나  있는 만큼, 심리적으로 보다 안정되어 있다. 모든 생명은 두개체의 결합으로 잉태된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예컨대 수소와 산소 따위의 융합이라거나, 남성 세포와 여성 세포의 결합처럼....  어쩌다 보니 사랑하는 대상이 인간이었을 뿐 산이라면 산에 올랐을 것이고 악기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우리를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로 향하게 하는 힘이야 말로 삶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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