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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잔 들고가게!

핵전쟁

전쟁과 살인은 동일한 성격의 현상이다. 나는 심리적 관점에서 전쟁은 살인이라고 확신한다.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가해질 때. 자신의 생존이 도전받을 때 인간의 분노는 사람을 살인의 상황으로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종류의 위협이 국가에 가해질 때 국가도 걷잡을 수 없는 살인적 분노에 휘말린다. 개인적 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몇몇이 다수의 대중을 부추겨 당면 상황을 국가 간 전쟁으로 몰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의 기록 속에서 종종 보게 된다. 전쟁에 사용되는 살인기술이 발달하면서 전쟁의 피해는 도를 넘는 처참한 수준으로 치달아왔다.
 
국가가 또는 특정 기득권 세력이 매스컴의 근간을 틀어쥐고 있으므로 국가가 국민을 쉽게 선동하여 전쟁으로 몰아갈 수 있다.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격렬한 분노는 아주 먼 옛날 진화과정에서 만들어져서 아직도 우리 뇌의 파충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감정의 중제와 기억의 관장은 진화의 가장 최근단계에서 발달한 포유류와 인간의 뇌인 변연계와 대뇌피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많은 갈등은 파충류와 포유류의 뇌가 벌이는 대립의 소산인 셈이다. 인류가 하찮은 수준의 무기만으로는 아무리 분노가 극에 달해도 죽일 수 있는 사람 수가 제한적이었다. 현대로 오면서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쟁의 수단도 급격히 발달했다. 현대 무기는 수십억명의 인명을 한꺼번에 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人性의 성숙도도 예전에 비해 문명의 발달만큼 성숙해졌는가?
 
핵무기를 통한 전쟁 억제라는 아이디어는 전적으로 우리의 비인간적 조상의 행동양식에 근거한 것이다. 막가파식 공갈협박을 구사하여 상대방을 속이려면 절묘하게 가장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장에는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중대한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한 사람이 비이성적 형태로 협박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이러한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협박의 허세를 허세로 묶어두지 못하고, 언젠가는 결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행으로 옮기는 우를 범하게 된다. 허세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허풍이 아니라 실재라고 믿게 하려다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된다. 협박은 실행으로 옮겨질 위험을 반드시 동반한다.
 
지구 전역에 공포와 균형을 유지하는 핵전쟁 정책을 시도한 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이 정책은 성공을 하여 결국 인류 전체를 볼모로 잡고 있다. 어느 한 쪽이 정해진 선을 넘는 행동을 하게 되면 핵전쟁에 즉각 돌입하게 됨을 양측 모두 알고 있다. 각 진영은 군사적 우위에 서야 한다는 강한 유혹을 받게 된다. 전 지구적 공포와 균형을 유지하기 힘든 아주 미묘한 불안전한 평형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파충류적 열정을 적정 수준이하로 제어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살해된 군인과 민간인이 약 5천만 명이었다. 그 후 살인의 과학기술이 지구 자체를 날려버릴 만큼 성장해 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핵무기가 사용된 최초의 전쟁으로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전쟁 동기와 전쟁 성향이 그 후 변했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현대 전쟁은 군인들만 죽는 것이 아니다. 국가 전체가 싸우고 국민 전체가 피해를 입고 죽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자폭탄으로 그 도시의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결정권자들이 몰랐을까? 제2차 세계대전 중 모든 국가에 투하된 폭탄 총량이 TNT 200만톤, 즉 2메가톤이었다고 한다. 이 폭탄들은 1939년과 1945년 사이에 유럽과 일본 등지에 하늘에서 비 오듯 쏟아져 수많은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2메가톤은 수소폭탄 하나의 에너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날 지구에는 수만 개의 핵폭탄이 있고 이것들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지구촌 어느 지역도 안전한 곳이 없다. 이 요술램프들은 누군가가 비비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요괴들이다. 미래의 핵전쟁에서는 불과 수 시간이내 TNT 100억톤 전부가 집중 파괴에 쓰일 것을 생각해보라. 지구상의 모든 가정 하나하나에 초대형 고성능폭탄이 하나씩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핵폭탄이 폭발하면서 생기는 충격파는 투하지점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철근콘크리크 건물을 한순간에 날려버린다. 핵폭발에 동반되는 불기둥, 감마선 그리고 중성자에 노출되는 즉시 사람의 육체는 내부 속속들이 아주 철저하게 구워진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지구 대기의 먼지양이 증가하고 먼지 증가는 태양복사의 유입을 차단하여 지표 온도를 낮춘다. 이것으로 농업생산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핵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또 다른 성격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 엄청난 수의 화상환자, 시력 등을 상실한 불구자들, 각종 괴이한 질병, 공기와 물에 오랫동안 만연할 유해성 방사능, 악성종양에 대한 공포, 사산아 출산, 장애아 출생, 적당한 치료법의 부재, 아무런 소득 없이 자기 파괴의 길을 걸어온 문명에 대한 허탈감, 이 모든 재앙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죄책감...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파괴력은 겨우 13킬로톤이었다. 1954년 마셜군도 비키니섬에서 시험한 수소폭탄은 15메가톤급이었다고 한다. 핵폭탄의 충격파, 열폭풍, 방사능의 피폭과 낙진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을 깡그리 죽일 수는 없을 것이지만, 낙진 위험은 장기간 계속 될 것이다. 핵폭발은 지구상층 대기의 질소와 산소의 결합을 촉진시켜 오존의 상당량을 파괴할 것이다. 더 두려운 것은 지구생태계의 변화이다. 자외선으로 인해 곡식의 수확량을 격감시킬 것이며 다양한 미생물들을 죽일 것이다. 미생물이 지구생태계의 맨 밑바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인류가 속한 지구생태계는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다. 미국은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낼 수 있었다. 그때의 상황을 한 여학생이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 지옥의 밑바닥과 같은 암흑 속에서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여왔다. 큰 우물 통 안에는 온 몸이 벌겋게 구워진 간난 아기를 한 어머니가 자신의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힘겹게 흐느끼고 있었다. 또 다른 어머니는 화상을 입은 자신의 젖을 아이에게 물리고 서럽게 소리 내어 울었다. 물통 안에 있는 학생들은 머리만을 물 위로 내민 채 비명을 지르고 부모를 찾아 외치지만, 그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성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바짝 그슬려 곱슬곱슬 뒤말린 머리카락은 온통 재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
 
최근 수십 년간의 국제상황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핵무기와 그 수송체계의 발달을 보면 지구 전역에 걸친 재앙이 머지않아 우리에게 다가올 것임을 예감할 수 있다. 또 비핵무기의 국제교역량도 갑자기 성장하기 시작했다.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최상의 임금을 받고 여러 가지 특권을 즐기며 때로는 해당분야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고 산다. 무기개발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익명이 보장되고 철저히 외부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군수산업체들은 종사자들에게 타분야에 비해 월등한 보상을 주고 서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으스스한 결속으로 끼리끼리 끌어안고 산다. 그들은 막강한 카르텔로 인간의 탐욕을 이용하여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인류생존에 반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떠밀리어 갈 수밖에 없다.
 
강대국들은 살상용 핵무기를 자체 조달하고 비축하는데 대한 자기 나름의 정당화 논리를 구축해 놓고 있으며, 그 논리의 당위성을 만방에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항상 적국의 문화적 하자를 지적하고, 그들이 저지를지 모르는 비이성적인 행태를 상정하여 사람이 아직 갖고 있는 파충류의 뇌를 자극하는데 유효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자국민을 파충류적 행동기제로 몰고 가곤 한다. 자국은 상대국과 달리 문화적 하자가 없고 타국을 해칠 의도가 없으며, 건전한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의 정복 따위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외계 우주인들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우리는 현재 지구 곳곳에서 진행 중인 군비경쟁의 당위성을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라마다 자기 나라를 위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인류전체를 위하여 외쳐댈 사람은 지구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과연 누가 지구편이란 말인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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