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엄청난 양육비, 교육비를 들여 금이야 옥이야 길러서 세상으로, 사회로 공급된다.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저출산’이다. 인간사회에서는 인간들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고 난리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정말 사회에서 한창 임무를 부여 받고 열심히 일해야 청년들이 숫자가 부족해서 문제인가? 아니면 그 청년들이 능력이 부족해서 사회에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인가? 대부분의 청년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쓰레기가 되어 가고 있다. 왜 우리 청년들이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어떤 인간을 원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과학기술 혁명으로 탄생한 인공지능, 빅데이타, 로봇 등의 도구들은 인간사회에서 어떤 역할은 하게 될까? 이렇게 만들어진 물질들은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줄까? 아마 대부분의 창조물들은 쉽게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시대에 인간사회에서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할까? 우리 사회는 온갖 생활쓰레기, 산업폐기물 등의 물질적 쓰레기와 사회에서 은퇴하는 대규모의 베이비부머 쓰레기와 사회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청년 쓰레기 천지가 되어 가고 있다.
“.... 수십만 명의 청년이 계속 높아져만 가고 있는 교육과 부의 수준으로부터 배제됨에 따라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수가 지난 10년 동안 2배가 되었다. 우울증은 가장 불쾌하고 비참하고, 사람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정신질환이다. 가장 흔하게 내려지는 원인 중의 하나는 실업으로 이는 특히 신규일자리 창출과 새로운 자산의 확충 대신 인건비 삭감과 인력감축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려는 시장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이 직업을 가질 전망이 희박해지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이에 대한 치료법 중 하나는 청년고용이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국가보조금 지급이다. 이와 함께 젊은이들에게는 직업을 평생 계획의 기반이나 자존심과 자기정체성 또는 장기적인 안정의 보증으로 여기기보다는 융통성을 갖고 특별히 까다롭게 굴지 말며, 직업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고, 자리가 나면 너무 많은 것 묻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일하는 동안만큼은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기회로 삼으라는 충고가 주어진다. 현대사는 '좋은 사회'라는 모델을 다량으로 생산해내는 공장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와 생산적 역할이 주어지는지가 좋은 사회의 판별기준이 된다. 현재는 이러한 당위에 못미친다고 비판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는 많은 질곡을 해치고 전진했지만, 결정적인 투쟁은 일자리 부족에 맞선 싸움이다.
잉여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 사회는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할 수 있고, 당신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할 어떤 자명한 이유도 없고,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만한 어떤 뚜렷한 정당성도 없다. 잉여로 규정된다는 것은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여는 불합격품, 불량품, 폐기물, 찌꺼기와 그리고 쓰레기와 의미론상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실업자, 노동예비군의 목표는 다시 노동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쓰레기의 목적지는 쓰레기장이다. 잉여라고 선언된 사람들은 흔히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취급되곤 한다. 부양해야 즉, 먹이고 신발을 사 신기고 거처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자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생존수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잉여에 대한 해답은 이 문제에 대한 규정과 마찬가지로 돈과 관련 되어 있다. 즉 국가가 제공하거나, 국가의 입법으로 뒷받침 되거나, 국가가 보증하거나, 장려하는 생계보조가 해답이다. 이 모든 조치가 납세자들에게 재정적인 부담이 된다. 잉여라고 선언된 사람들의 생존을 지원할 필요성은 실업자들이 본인들과 타인들에게 제기하는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쓰레기를 위해 남겨둔 자리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잉여가 자존심과 인생의 목표의 상실을 수반하는 사회적 홈리스 상태를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또는 아직은 아닐지 몰라도 언젠가는 그것이 운명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젊은 세대가 이전 세대와 공유하고 있지 않은 삶의 경험의 일부다.
실제로 젊은 세대가 우울증에 빠질만한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환영받지 못하고 기껏해야 참아 줄만한 대상으로 취급되고, 사회적 선행과 관용의 수령자 위치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고, 잘해야 자비, 자선, 동정의 대상으로 취급될 뿐, 형제애적 원조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게으르다고 비난받고, 흉측한 의도와 범죄적 성향이 있다고 의심받고 있으니, 젊은 세대가 사회를 충성과 관심을 기울여야 할 안식처로 대할 이유는 별로 없는 셈이다. 자격을 잃은 피고용인들이 노동세계의 규칙에 노골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적 게임의 규칙을 존중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일한 게임에서 탈락하면 더 이상 선수로 뛸 수 없으며, 따라서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게 된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는 또한 바로 직전 세대보다 훨씬 더 극심하게 양극화 되어간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쉽게 변하는 사회적 위치, 어두운 전망, 지속적으로 또는 적어도 좀 더 오래 자리 잡을만한 확실한 기회도 없이 건건히 꾸려가는 생활, 살아남기 위해서 배우고 익혀야 하는 모호한 규칙들, 이러한 것들이 모든 젊은 세대를 무차별로 괴롭히면서 불안감을 조장하고, 이 세대의 모든 또는 거의 모든 구성원의 자기 확신과 자존심을 박탈당하고 있다.
세상은 또한번 도약했고, 그러한 속도를 견디지 못한 승객들은 점점 속도를 높여가는 차량에서 점점 더 많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 중 재빨리 달려가서 따라잡아 올라타는데 실패하는 사람들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젊은 세대의 걱정, 잉여로 취급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젊은 세대 역시 이들 세대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전례 없는 일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점점 더 속도를 내고 있는 차에 올라타는데 성공해 승차감을 만끽하는 동안, 이들보다 덜 영리하고, 덜 기민하고, 약삭빠르지 못하고, 힘이 없거나, 덜 모험적인 다른 많은 사람들은 뒤처지거나, 만원이 된 차량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저지당했으며, 그나마 차바퀴에 깔려 완전히 박살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동시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현재의 문제가 과거 세대들의 문제와는 다르다고 여기고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오늘 날에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특허 의약품들이 더 이상 듣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련하게 위기를 관리하려 하더라도 실제로는 우리가 항상 겪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고 있다. 그러나 항상 규칙들은 사전통지도 없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다른 것으로 교체되곤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일단 배제되어 쓰레기 딱지가 붙은 사람이 완전히 자격을 갖춘 사회구성원으로 되돌아 갈수 있는 길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핵심적으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일이 문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집안에 있는 도구와 자원만으로 이러한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일시적인 하락의 문제, 경기과열과 또 다른 경기상승 사이의 경기후퇴 문제가 아니다. 세금, 보조금, 수당, 인센타브 따위로 땜질해 소비자 주도의 경기회복을 다시한번 불러오면 사라져버리는 과거의 역사가 되어버릴 일시적인 자극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문제의 뿌리는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옮겨간 것처럼 보인다.
안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다. 지식공장에서 생산품은 쓰레기와 구분되며, 이렇게 구분하는 주체는 잠재고객들의 관점과 요구와 욕망이다. 실용적 의도와 목적에도 불구하고 배제된 것은 더 이상 거기 있지 않게 된다. 인간의 이해라는 척도에 맞추어 다시 만들어지는 사회는 관리 가능한 동시에 관리를 필요로 한다. 현대인에게 자연은 좋든 싫든 알든 모르든. 태초 이래로 복종시켜야할 대상이었다. 인간이 만들지 않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에 있고, 인간의 힘을 벗어나 있는 존재라는 것이 결국 ‘자연’이라는 관념이 정확하게 의미하는 바였다. 농업은 인간이 땅으로부터 빼앗은 것을 사려 깊게 돌려준다. 이와 반대로 채광 과정은 파괴적이며, 일단 캐낸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광업은 인간의 불연속성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농업은 연속성을 대변한다. 하나의 낟알은 더 많은 낟알로 되돌아오며, 한 마리의 양은 여러 마리의 양을 낳는다. 변한 듯해도 변한 것은 없다.
존재의 재확인과 재긍정으로서의 성장, 상실 없는 성장, 도중에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죽음은 재생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광업은 단절과 불연속의 전형이다. 새로운 것은 어떤 것이 버려지거나 폐기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한 태어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우선 광석을 함유하고 있는 땅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숲을 베어버리거나 불태우고 광맥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땅을 찾아서 한층 한층 파내야만 광석에 접근할 수 있다. 광업은 새로운 것의 탄생이 옛 것의 죽음을 요구한다는 가정 아래 진행된다.
여분의 불필요한 쓸모없는 것을 잘라 내버림으로써,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만족스럽고 좋은 것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예술품은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어낸 것은 대리석판 한 개를 골라,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깎아내면 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쓰레기는 모든 창조의 산파인 동시에 극히 가공할만한 장애물이다. 머리카락은 신체 일부일 때는 머릿기름을 바르고 빗고 매우 정성들여 치장하는 등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지만, 일단 잘려나가자마자 쓰레기가 된다..
현대세계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욕망과 신념을 담고 있다. 자기를 지금과 다르게 만들고, 고쳐 만들고 계속해서 다시 만들려는 욕망이 그것이다. 현대의 조건은 끊임없는 움직이는 데 있다. 선택은 현대화 아니면 소멸일 뿐이다. 현대라는 시기의 역사는 계획되거나, 시도되거나, 추진되거나, 완수되거나, 실패하거나, 폐기된 일련의 설계들로 점철되고 있다. 순전히 좋기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좀 더 좋은 결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예측이 불가능한 만큼 이득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도 수반하기 마련이다.
설계의 바탕이 되는 전략과 불가피한 결과는 행위가 낳은 물질적 산물을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 ‘쓸모 있는 것’과 ‘쓰레기’로 나누는 것이다. 쏟아져 나오는 과잉정보는 인간두뇌에 저장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분량이며, 심지어 전통적인 정보저장소인 도서관 서가에 저장되기에도 너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자기억장치가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다. 월드와이드웹은 무한히 넓고 기하급수적으로 확장중인 정보들의 쓰레기통이 되고 있다. 정보쓰레기의 생산은 모든 쓰레기 생산활동과 마찬가지로 자가발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쓰레기를 처리하려는 노력이 더 많은 쓰레기를 만든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야기는 쓰레기에 관심이 없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생산품이지 쓰레기가 아니다. 두 종류의 트럭이 날마다 공장을 떠난다. 하나는 창고와 백화점으로, 다른 하나는 쓰레기장으로. 우리를 둘러싼 이야기는 '첫 번째 종류의 트럭만 주목하라'고 우리를 훈련시켜 왔다. 반면 두번째 종류의 트럭에 대해서 우리는 쓰레기더미가 눈사태처럼 쓰레기산으로부터 무너져 내려와, 우리 뒷마당을 둘러싼 울타리를 뚫고 침범하는 경우에만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극히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쓰레기를 처리한다. 즉 쓰레기를 보지 않음으로써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다.
쓰레기는 모든 생산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비밀이다. 쓰레기는 그 엄청난 양 때문에 감추거나 은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쓰레기처리 산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현대적 생산의 한 부문 인 것이다. 아무리 엄밀하게 나누려고 해도 유용한 생산품으로부터 쓰레기를 분리시키는 경계는 회색지대이다. 정부도 관심 갖고 싶어 하지 않으며 그것에 휘말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민간업자가 알아서 적당하게 은밀하게 처리하게 한다.
설계작업이 중요한 것은 현존세계에 개선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설계의 목표는 좋은 것이 차지하는 자리는 더 넓히고, 나쁜 것이 차지하는 자리는 더 좁히거나 없애는 데 있다. 나쁜 것이 나쁜 이유는 좋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쁜 것은 개선의 결과 발생한 쓰레기이다. 당연히 자연은 그것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자연법칙은 인간들이 만든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들에 의해 폐지될 수 없다. 베이컨의 조언에 따르면 인간은 그러한 법칙들을 배워 인간의 이익에 맞게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적 결속의 형태를 설계할 때도 적절하지 않은 사람은 쓰레기가 된다. 즉, 설계된 형태에 맞지 않거나 앞으로 맞지 않게 될 일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새롭고 예전보다 향상된 인간적 결속형태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은 ‘질서구축’이다. 질서란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제기능을 하는 상태다. 질서를 잡는다는 것은 ‘물건을 정리해두거나 적절한 상태로 만들다, 규칙에 따라 배치하다. 조절하다. 다스리다. 관리하다’이다. 혼돈은 질서의 분신이며, 마이너스 부호가 붙은 질서이다. 즉 어떤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제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도 않은 상태이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 지그문트 바우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