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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보리스 시륄니크지음, 정재곤 옮김)

개인사의 생물학

무의식은 기억할 수 없다. 의식의 영역안에 들어있지 않은 이같은 기억을 회상할 수 없지만 격한 감정이나 행동을 유발한다. 세상에 태어난지 6개월된 아기가 엄마와 떨어짐으로써 느껴야 했던, 그 절망감을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 같은 비극은 당사자의 인성발달에 영향을 미쳐 결국 그를 정에 굶주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사실은 현실에서 관찰할 수 있지만 마치 생물학적 분자와도 같이 의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사실은 결코 기억할 수 없다. 암양은 출산 직후 몇시간 동안에만 새끼에게 모성 본능을 나타낸다. 따라서 갓태어난 새끼는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어미를 감각적으로 자극해야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암양은 출산 직후 몇시간 동안은 자기가 낳은 새끼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새끼에게도 애착을 보인다. 그리고 민감한 몇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낳은 새끼도 내친다. 암양에게 자기가 낳은 새끼가 아닌 다른 새끼를 돌보게 하려면, 갓 출산했을 때 양수를 적신 어린양을 곁에 놔주고 어미양이 코로 냄새를 맡게 하면 된다. 애착관계는 외부정보(갓태어난 새끼양의 냄새)와 내적감수성(출산에 뒤따르는 호르몬 체계의 변화)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로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어미와 새끼 사이에 애착관계가 대단히 용이하게 이루어진는 시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출산 직후 민감한 시기에 엄마와 신생아가 떨어져 지내면, 최초의 애착관계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며, 미숙아가 겪을수 밖에 없는 중요한 발달장애를 겪는다. 버림받은 아이들이 간직하는 기억과 자의식, 뒤늦게 찾아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암양의 경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화 과정의 특징을 이룬다. '역사화 과정'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은 자신이 과거를 창조해 내는 적극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과거는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암양과 인간 여성은 동일한 생물학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바로 '말'이다. 엄마와 아이 사이의 상호작용은 말이 개입되면서 생물학적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다. 암양의 코를 막게 되면 새끼 양과의 상호작용은 깨어지고, 애착관계가 영구히 손상된다. 어미 양이 자기 새끼에게 영원히 애착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새끼한테 애착을 느끼지 않게 된 어미양은 새끼를 자기와 무관한 존재로 여기고 쫓아낸다. 반면에 의식을 가지고 있는인간 여성은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조산 때문에 아기와 떨어져서 지내야만 하는 산모는 인큐베이트 안의 아기가 자기 아이란 사실만으로 애착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아이가 말을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시기에 이르면 아이의 행동양식에 변화가 온다. 아이는 소리를 통해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전달하기도 한다. 말은 놀라운 감정적 힘을 가지고 있어서 20년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앞으로 10년후에 벌어질 상황 때문에 기뻐하게 만들기도 한다. 말이 가진 이 같은 기능은 감정을 증폭시키고, 거듭 체험하게 하며, 여러 사람에게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해 같은 생각을 품게 하기도 한다. 말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동물의 언어는 맥락의 언어이고 근접한 감정에만 반응한다. 반면에 인간은 지난 날이나 앞으로 다가올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또 이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말을 통해, 맥락을 벗어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릴 때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했던 성인들은,그렇지 않은 성인들에 비해 우울증 증세를 나타내는 비율이 무려 열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아이의 인성발달에 민감하게 작용할 수 있는 시기에 아이가 엄마와 일찍 떨어지면 애착관계가 붕괴된다는 사실을 밝혀낸 비교행동학적 관찰은 임상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애착관계가 단절된 아이는 장차 20년이나 30년이 지난 다음에도, 사소한 일을 계기로 그 취약성이 나타날수 있다. 그럴 때 주변인물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야. 우울해야 할 이유가 없거든."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이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어린시절에 겪은 일로 인해 인성에 영원히 새겨진 취약성의 흔적은 사소하지만 의미를 띨 수 있는 계기를 맞아 우울증 증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흔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사실상 우연이 아닌 경우는 수없이 많다. 그런 일들은 행동방식의 결과일 수 있으며, 어느날 사소한 계기를 맞아 표면화한 것 뿐이다. 우울증은 결코 우연이나 운이 나빠서가 아니다. 우울증 이미 삶의 초창기에 윤곽이 그려진 인성발달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다. 이처럼 후천적으로 획득된 생물학적인 요인은 정신세계가 환경의 영향을 극도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시기에 행동 유형을 결정해버린다.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는 끊임없이 반복적인 행동유형으로.

 

아기가 젖을 빠는 행동이 무르익고 게다가 이런 행동이 엄마의 해석과 결합하기까지 무려 2년에 걸친 발달과정이 필요한 셈이다. 매일매일 행위에 행위를 거듭한 후에야 비로소 아기의 반사적 행동은 의미를 지니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 역사가 엮어지게 된다. 또한 아이의 반사적 행동이 의미를 띠게 되고, 아기의 입으로 하는 행동이 두사람 간의 역사에 힘입어 마침내 입맞춤이 되기 위해서는 2년에 걸친 아기의 신경 발달과 엄마의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첫 몇 달동안 우는 아기를 얼러줬던 초기의 상호작용이 한참 후까지 아기의 행복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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