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또한 어느 포유류 처럼 갓 태어난 새끼를 핣아줌으로써 자궁에 있을 때 삼킨 푸른색 잔유물을 배설토록 도와준다. 어미 원숭이는 갓태어난 새끼의 배를 접촉하고 눌러줌으로써, 새끼의 소화기관을 자극하고 새로운 환경에 순응토록 한다. 이것을 순진한 관찰자는 중대한 오류를 가져올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자기 멋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실인데 어미 침팬지가 자기 새끼의 배를 물어뜯고 머리를 짓밟고 자나가는 거예요. 정말 못된 어미 아닌가요. 그 결과 어미 침팬지는 진정제를 먹이거나 뇌절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는 개인주의 문화에 젖어있는 서구인들이 가장 손쉽게 치할수 있는 치료방법이다. 주변환경 탓에 새끼와 어미 사이에 당연히 있어야할 상호작용이 흐트러진다. 따라서 치료를 받아야 할 대상은 바로 이같은 병리현상을 만들어낸 인간 자신이다.
아기는 혼자만의 존재가 아니라는 가정하에 우리는 신생아들이 자라나고 또한 외부압력 즉 부모의 열망을 짊어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관찰했다. 아기는 신경 펩티드 때문에 미소를 짓지만, 엄마는 아기가 엄마를 알아보고 미소짓는다고 해석한다. 엄마는 신생아의 미소를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여정과 스스로의 삶에 부여하는 의미에 기초하여 해석한다. 엄마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을 내린다는 점이야말로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 또 때때로 엄마들은 불안감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만일 엄마가 이런식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신체적 태도가 만들어진다. 젊은 엄마는 몸이 굳어지고 아기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본다면, 엄마가 취하는 이런 행동은 엄마의 신체에서 발원하는 감각적 자극으로부터 아기를 멀어지게 한다. 아기는 엄마의 냄새를 덜 맡으려 하고, 엄마의 목소리도 덜 매력적으로 느끼고, 엄마의 손길도 덜 감미롭게 느낀다. 엄마의 무의식에 의한 우울한 해석이 아기 주변에 차가운 감각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미소는 처음 지어지는 순간부터 의미와 삶, 해석과 생물학을 함께 뒤섞어 놓았다. 이미 미소는 변모될 수 밖에 없었다. 해석이 가해지는 순간 미소는 역사가 얹어졌고, 최초의 생물학적 미소와는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태어난지 두 주가량이 되면 미소는 벌써 사회성을 띠게 된다. 아기는 눈을 뜨고 입을 벌린채 다가오는 엄마의 얼굴에 자극을 받아 커다란 사교적 기쁨을 표현하는 옹알이를 해댄다. 우리가 아기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림로써 '더 이상 교류하지 않겠다'는표를 할 때 대화가 종료된다는 사실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상호작용에 싫증난 아기의 관심을 계속해서 끌고 싶어한다. 우리는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가 소리를 받아들이는 존재라 간주한다. 그러다가 아기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되고, 이번에는 아기를 돌보는 인물이 아기가 내는 소리에 반응함으로써 상호작용의 자장안으로 진입하게 된다.
산모들은 아기가 아프면 아무 생각도 할수 없어 아기곁을 지킬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기가 큰소리를 내기시작하면, 그때서야 엄마가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활짝 열리면서 다른 데를 쳐다볼 수 있고, 자리를 뜨고 말을 할 여유가 생긴다. 엄마는 아기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아기가 소리를 냄으로써 의사소통의 창구가 재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갈매기와 신생아는 소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정보가 생물학적으로 조건지어져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자극을 받아들이는 쪽이 그것을 해석할 때 비로소 의미를 띠게된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겪어온 역사가 바로 자극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