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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기술( 딕 티비츠:Dick Tibbits, 한

내 삶의 주도권

당신이 맡은 일을 날마다 열심히 하는데 누군가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먼저 부당한 대접을 받은 것을 불쾌하게 여길 것이다. 그 녀석이 나에게 왜 그러지? 그 사람이 당신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수 있다는 생각에 초조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바로 그 사건의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한 이야기를 스스로 되뇌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 억울한 사연은 당신의 감정을 해친 사람을 향한 적대감을 부채질 한다. 당신이 이렇듯 억울한 사연을 지어내는 이유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통제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불가피하게 당신을 자기 피괴적인 길로 안내한다. 이 억울한 사연을 계속 되뇌이고 이것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당신은 자신의 삶이 비참하며 그것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당신은 마치 덫에 걸린 기분이 들 것이다. 용서의 세계로 들어서라. 용서는 당신이 그 이야기에 새로운 틀을 입히도록 해준다. 그렇듯이 이야기의 본질을 바꾸면 당신은 다른 관점에서 그 상황을 바라볼 수 있고 더 건강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향해 갈 수 있다.

 

<억울한 사연이 만들기>

- 당신이 부당한 일로 고통을 받는다. 무언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이 당신에게 일어난다. 불친절한 말, 약속이 깨지는 것, 예상 밖의 실패나 손해를 보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당신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 그 사건을 특정 관점에서 해석한다. 상처 받았다고 느끼면 내부에서 분노가 차오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낀 것 때문에 상대방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억울한 사연을 항상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무엇과 관계 있다. 사소한 것들이라면  억울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당신은 깊은 상처를 받는다. 상처가 되는 사건을 곰곰이 생각할수록 당신은 그 인간적인  부분을 더욱 과장하게 된다.

- 그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남들에게 다시 들려준다. 당신은 그 이야기를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반복해 들려준다. 또한 자기 머리 속에서 되풀이 한다.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면서 당신은 그 부당한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 그것을 설명하고, 분석하고 당신이 겪은 상처 뒤에 숨은 사악한 의도와 못된 세력을 낱낱이 드러내려 애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까지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자신에게 반복하면서 간작할 것인가? 아마도 당신은 상처 준사람이 생각을 바꿔 그 일을 바로 잡든지, 또는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당신이 겪은 억울한 사연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할 때마다 당신은 해묵은 상처를 들춘다. 당신은 그 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예전 그대로인 고통스러운 각본이 계속해서 당신을 흔든다.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에게 사실상 자기 자신을 수갑을 채워 넘겨주는 꼴이 된다.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 사람이 수갑을 풀어주길 기다리지만 정작 그 열쇠는 당신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용서를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다. 원한을 키우는데 에너지가 소모된다. 원한을 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우리의 삶을 탕진한다. 생산적인 삶을 살기보다 원한에 집착하는데 더 많은 삶을 산다. 

- 더 중요하게 사용될 에너지를 소모한다. 원한에 집착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면 쓸수록  우리의 삶에 기쁨을 주고 풍요롭게 하는데 쓸 에너지는 줄어든다. 

- 해묵은 고통을 되풀이 해 느낀다. 원한은 나를 공격한 상대방에게 거의 벌을 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30년이 지나도 아직 그 자리이다. 아직 비참한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상대방은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지 오래다. 이 점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핵심이다. 억울한 사연은 당신을 어둡고, 고통스러운 그 장소에 계속 가둬둔다. 정작 상대방은 잘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이 원래의 고통스런 사건보다 더 불공평해 보인다. 내 사연은 사실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이게 바로 나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일이야. 네가 그것을 알아줬으면 해. ' 그러면 이제 내 상황을 이해하고 나의 비극적인 처지를 공감하겠지. 우리는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 할 때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말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 주기를 바란다. 다른 누군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다른 누군가가 내 사연을 쥐고 흔든다. '나는 아니다. 그렇게 만든건 다른 사람이다' 바로 그 사람이 내 삶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으며 나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 사람이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그 사람이 마음을 바꾸고 사과하거니 무언가를 하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당신 스스로 이 덫을 빠져 나올 수 있을까? '그렇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저지른 일에 집착을 하는 것을 그만둘 때에만 가능하다. 당신이 앞으로 스스로의 삶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할것인가는 그 사람 책임이 아니다. 과거에 어떤일이 일어났든 지금 이순간은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 결국 당신의 삶은 당신이 주도해야한다.  당신이 품은 억울한 사연은 그것은 진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거짓이 섞여 있어서 당신에게 상처를 준다. 그 이야기가 정확해서 당신이 덫에 빠진 것이 아니라, 왜곡된 현실을 드러내기에 덫에 빠진 것이다. 그 사건은 어쩌면 당신이 기억하는 상황과 똑 같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당신 버전의 이야기는 온전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세세하게 기억할 수 없다. 당신은 오직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에 어울리는 사실들만 기억한다. 모든 사람들도 그렇지만 당신의 기억은 선택적인 것이다.

 

당신은 과거 경험을 토대로 현재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당신은 과거의 비슷비슷한 느낌이나 경험을 몇개의 범주로 나누고 그에 맞춰 기억을 저장한다. 당신이 과거에 겪었던 일은 현재 상황을 분석하는데 사용된다. 상황을 마치 과거의 경험의 반복으로 여긴다. 기억의 본래 성질은 완전하지도 않고 심지어 정확하지도 않을수 있는 이 성질은, 또한 당신 품은 억울한 사연, 타인을 보는 시각에 왜곡을 불러 일으킬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한다. 그 사건에 쓸데 없이 격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또한 공격자들이 보상하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받으면 당신은 그 사건과 관련하여 온통 부정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상황을 공평하게 만들려면 더 대단하고, 더 큰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당신은 자기에게 상처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 빚은 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다. 당신을 아프게 했던 그 사연을 진정 바꾸고 싶다면, 상대방이 오로지 사악한 의도로 그런 짓을 했다고 탓하는 것을 그만두라. 그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갖고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당신은 알 수 없다. 자신이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면 용서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용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고 현실을 왜곡하는 관점을 줄인다. 결국 당신이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사연은 부정확한 사실일 뿐 아니라, 당신이 성장과 행복을 망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든다. 당신은 억울한 사연의 중심에 놓인 그 사건에 평가를 내려야 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내게 상처를 주는 타인의 행동이 진정 내 삶의 운명을 결정하는가?, 아니면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 삶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 내가 발언권을 가질 것인가?'

 

- 용서는 당신의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 분노에 매달리면 당신만 상처받는다.

- 당신이 용서하면 감옥에 갖힌 한 사람을 풀어주게 된다. 그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  상황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당신이 변하면 당신 주변 사람들도 더 쉽게 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