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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파울루 프레이리, 남경태 옮김)

피억압자를 위한 교육2

피억압자는 자신을 억압자의 숙주로 인식해야 한다.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의 이중성에 머무는 한 그리고 그 되고 싶은 내가 사실은 억압자로서의 인 한, 억압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피억압자 교육은 피억압자가 비판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도구다. 억압자도 피억업자도 모두 자유를 얻기 위함이다. 억압자는 피억압자에게 가부정적으로 대하는 죄의식을 합리화하면서 종속 입장에 두려워한다연대감이 생기려면 연대감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같은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진정한 연대는 그들을 서로 타인의 존재로 만드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함께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위선적이고 감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과감히 사랑의 행위에 나서야 한다.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모순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생겨나므로 이 모순의 해결은 자신이 억압자임을 인식하고 억압을 하게 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변혁해야 한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존재할 수 없으며 둘로 나눌 수도 없다.( 자석에서 N극과 S극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분석이나 행동함에 있어 객관성을 부정하고 주관주의를 취해 유아론적 입장에 빠지면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게 됨으로써 행위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세상과 인간은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고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 존재한다. 객관적인 사회현실이 우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산물이라면 그것을 변혁시키는 것도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사회현실을 만들어낸다면 그 현실을 변화 시키는 것은 역사적인 과제이며 인류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억압의 기능은 대상을 길들이는데 있다. 억압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길들여짐을 거부하고 항거해야 한다. 나와 세계에 대한 성찰과 행동의 목적은 나와 세상을 변혁하기 위함이다. 피억압자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대면함과 동시에 현실을 객관화하고 그 바탕 위에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이 따르지 않는 피상적 현실 인식은 참된 인식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의 변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현실 개입이 인식자의 계급적 이익과 상충하면 제대로 현실을 인식할 수 없다. 사실을 다르게 볼 수 밖에 없다. 방어기제로서 자신의 합리화로 결국 주관주의에 이르게 된다. 민중의 현실 개입을 좌절시키기 위해 각종 금기와 난관을 설치한다. 억압자는 그 개입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그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민중은 침묵의 상태를 유지하고 현실 앞에 무기력한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변혁대상의 객관적 현실이 없다면 인간을 내가 아니게만드는 그에 도전하는 세계가 없다는 것이고, 당연히 인간행동도 없다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현실 인식과 이해가 없다면 인간 행동도 없다는 것이다. 세계와 행위는 상호의존하는 것이다의식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은 본연의 행동을 설명 하는 것이다. 민중과 더불어 그 행동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피억압자 마음은 그들이 그저 불운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억압자와 경쟁하기 위한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아니다. 억압자의 이기적인 이해관계에서 출발하여 억압자가 피억압자를 인도주의를 발휘할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교육은 억압의 유지를 공고히 한다. 압제를 먼저 시작한 쪽은 압제의 희생자가 아니라 압제자들이다. 증오를 먼저 품은 쪽은 경멸 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경멸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억압자들이 보기에 불만을 품고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고 사악해 보이는 쪽은 언제나 그들 폭력에 맞서는 피억압자들이다.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모순을 위한 순수한 해결은 단순한 억압자와 피억압자 양측이 서로의 입장을 역전 시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예전 억압자 대신 새 억압자가 나타나 해방이라는 미명 아래 피억압자를 다시 종속시키는 것도 아니다. 타인을 억압한 경험에 사로잡힌 이들은 전과 달라진 상황을 마치 억압처럼 받아들인다. 공동체 권리라는 이름으로 생활방식에 제약이 가해지면 예전의 억압자는 그것을 심각한 개인침해로 보게된다. 그들은 수많은 민중이 고통받고 슬픔과 좌절을 겪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억압자에게 인간존재란 자신들만을 가리키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사물일 뿐이다. 억압자들은 자신들만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 피억압자는 자신들이 조금 용인하는 권리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민중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들이 지배계급으로 지낸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억압은 힘을 가진 자들이 시작한 폭력행위로 시작되어 폭력이 자리를 잡으면 다음 세대도 영속화 된다

 

억압자는 폭력을 물려받고 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억압자의 의식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지배의 대상으로 만든다. 무제한적 소유욕을 통해 억압자는 모든 것을 소유대상으로 탈바꿈시키고 확고한 물질주의적 인생관이 생긴다. 돈은 모든 것의 척도이며 이윤은 주요목적이다. 그들에게 삶이란 소유이며 가진자의 계급에 속하는 것이다인간성은 사물일 뿐이고 그들은 그것을 배타적 권리로 상속받은 재산으로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소유한 것들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자신의 노력, 능력으로 즉 위험을 감수한 용기로써 획득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들이 보기에 타인은 지배계급의 관용에 감사할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에 대한 통제는 필수적이다. 또한 억압자는 피억압자를 강력히 통제할수록 그들을 무기력한 사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타인을 지배하는 데서 느끼는 쾌감은 사디즘적 충동의 본질이다. 사디즘의 목적은 사람을 사물로 활력있는 것을 무기력하게 변화시키는데 있다대상이자 사물이 된 피억압자는 오로지 억압자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외에 다른 어떤 의도를 가질 수 없다. 순수하게 민중에 헌신하는 사람은 스스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자신이 혁명적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 지혜를 만중에게 줄 수 있다고 간주한다. 시련을 헤쳐나갈 사람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삶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농민은 자신이 종속되어 있음을 까달았을 때 그 종속성을 극복할 용기를 얻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그들은 늘 지주를 따르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일개 농부일 뿐인데 말이야숙명론은 민족적 특징인 온순함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온순함으로 위장된 숙명론은 민중의 고유한 행동 특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상황의 산물일 뿐이다. 그것은 거의 운명, 숙명 또는 신의 뜻과 같은 개념과 관련이 있다. 자신이 받는 고통과가 착취를 신의 뜻으로 여긴다. 현실속에 잠재한 피억압자의 의식에는 억압자의 이미지를 내면화하고 있다. (폭력적 아버지를 둔 자식은 그 내면에 폭력성이 내재되어 성인이 되면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식민화된 사람은 뼈속까폭력성이 스미어 동료에게 발산하기도 한다. 피억압자 내부에 억압자가 존재하므로 동료를 공격할 때 억압자가 된다. 피억압자는 억압자의 생활방식에 강력한 매력을 느낀다. 피억압자는 기회만 되면 어떻게 해서든 억압자를 모방하고 추종한다. 중산층 피억압자는 상류층 인물과 동등해지기를 갈망한다. 피억압자는 자기를 비하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병들고 게으르고 무위도식하는 등의 말을 많이 들었을 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자신이 무용한 존재라는 믿음이 내재화되어 있다. 억압자의 강력한 힘에 대해 주술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

 

피억압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의식하지 못하는 착취를 숙명론으로 수용하게 된다. 세상과 자신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피억압자는 억압자가 소유하는 사물과도 같은 느낌을 가진다. 억압자에게 존재는 소유이며 피억압자는 정서적으로 종속적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지 못한다. 대신 가족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술을 마시는 것으로 슬픔을 달랜다. 피억압자는 자신의 삶과 동료 피억압자의 삶을 파괴한다. 피억압자가 자신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성찰한다고해서 탁상공론적 변혁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행동과 결과도 비판적 성찰 대상이 되어야 한다피억압자를 신뢰하지 못하면 대화를 할 수 없다. 구호, 일방적 대화, 지침만을 사용하게 된다. 피상적으로 변혁하려는 위험을 수반한다. 피억압자의 정서적 종속성을 이용하려 해서는 안된다. 종속성은 지배적 상황의 산물이다. 종속성을 인식하고 성찰과 행동을 통해 자립심으로 바꿔야 한다. 피억압자의 해방은 사물해방이 아니라 인간해방이다. 추진 과정이 비인간화 방식이어서는 안된다신념은 상품처럼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 성찰과 행동을 통해 얻는 것이다역사적 상황속에 뛰어들어 상황을 비판하고 변혁의 의지를 가지게 해야 한다. 피억압자는 객체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그 신념에 도달해야 한다. 피억압자의 교육도 억압자가 사용하는 교육모델을 모방한다. 억압자 행동을 부정하고 선전하여 피억압자를 설득하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하고 구성하고 감탄할 자유를 얻는 것이다. 자유는 각 개인이 노예나 기계의 톱니바퀴가 아니라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피억압자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자신들을 사물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자신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서 투쟁은 시작된다. 선전, 책략, 조작은 인간성 회목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유일한 도구는 인간화 교육이다. 교육방법은 피억압자가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표현하게 만드는 데 있다. 법이란 의식의 외적 형태가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행동은 의식의 근본 속성인 지향성이다. 의식의 본질은 세계와의 어울림이다. 의식이 방법이다공동의 성찰과 행동을 통해 현실에 관한 앎에 도달할 때, 그들은 자신을 제창조자로 인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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