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싸워 나갈 것입니다' 나는 환자들이 목숨을 위협하는 질병에 대항해 투쟁해 나가겠다는 결단을 이런 식으로 표명하는 것을 수도 없이 들었다. 우리는 병에 관해서 얘기할 때 쉽게 전쟁의 상징이나 이미지를 사용한다. 우리는 암과 약물 남용에 대항해서 전쟁을 벌인다. 환자들이 전사의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건강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을 지난 몇 년간 면담하면서' 나는 싸운다'는 것이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치유체계를 정확하게 작동시키는 유일무이한 정신상태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면담을 하는 동안 일관된 주제 중의 하나는 투쟁이 아니라, 오히려 병에 대한 '수용'이었다. 질병의 수용은 종종 자아에 대한 수용의 일부가 되는데 이러한 자아의 수용은 인성의 변화를 유도하고, 그것을 통해
질병의 치유를 촉발할 수 있는 중요한 정신적 변화를 뜻한다.
제도과학에서는 정신이란 두뇌의 회전과 생화학의 산물일 뿐이라는 견해에 합의가 이루어져 가고 있고, 그 점에 대해 최후의 상세한 내용까지 규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신은 언제나 원인이기보다는 결과일 뿐이라는 관점을 지닌 과학자들은 정신이 어떻게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가하는 것에 대해 연구를 할 생각을 갖지 못하는것 같다. 1960년대 내가 학생이었을 때 네가지 질병의 원인에 대해 정신과 육체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것을 인장했다. 그 네가지 병은 기관지 천식, 류마티스성 관절염, 소하성 궤양, 궤양성 대장염이다.
만일 궤양상 대장염이 심신상관성 잘병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면 흡연이 스트레스 효과적 배출구이며, 그 배출구를 막아버리면 스트레스가 다른 곳으로 가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왜 어떤사람에게는 스트레스가 장으로 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강박적인 식사나 손톱 깨물기로 나타느냐하는 것은 개인적인 민감성의 문제이다. 환자에게 조언해줄 수 있는 것은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다른 기술을 터득하기 전에는 절대 금연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궤양을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라는 박테리아의 활동때문에 전염성 질병으로 여기는 경우가 흔하다. 많은 의사들은 궤양은 스트레스와 무관하며, 그것을 치료하는 데는 전적으로 항생제에만 의존해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라 위염과 궤양을 일으키는 요인이라는 데 아무 의심이 없지만, 그렇다고 정신의 영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는 위장의 화학작용을 변화시켜 세균이 공격적인 과정을 취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감염에 관한 나의 체험은 단지 악성세균이 출현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주인이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 질병을 야기하는 미생물의 행동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그들이 주인과 균형을 이루든지 혹은 그들에게 해를 입히든지 하는 것이다.
나는 자율신경계의 작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수용기와 우리가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성장조절자라고 다양하게 분류하는 많은 뉴로팹타이드 사이의 완전한 상호작용 속에서도 많은 가능성을 본다. 이런 조절 물질의 선구적인 연구자중 한 사람인 '캔디스 퍼트'가 이 각각의 조절물질들이 특별한 심리상태와 연결 되어 신체기능에 작용하는 것 이외에도 행동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소화기관과 두뇌 속, 특히 감정과 관련된 부분에 신경전달 물질들이 다량으로 존재하고 잇다고 말한다. 엔돌핀 수용기는 분명히 신경전달물질을 갖고 있다. 이 수용기들은 내장 기능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비현실적인 행복감을 갖는 병적인 감정의 격앙상태인 다행증과 고통에 대한 참을성을 만들어 낸다. 이 사실은 흔히 말하는 본능적인 감정에 깊은 생화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어쩌면 우리 내장이 감정의 자리일지 모른다.
면역체계 세포들이 이들 수많은 동일한 펩티드 분자에 대한 수용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방어 역시 신경계와 내분비계를 연결하는 그물망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으며, 감염에 대한 주인의 저항이 그의 마음상태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가를 설명하는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퍼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면역학과 내분비학, 심리학과 신경과학 사이의 개념적인 분리는 역사적인 가공물이 분명하다. 뉴로펩티드와 그들의 수용기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그물망은 신체의 세포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방어와 회복메커니즘, 분비선, 두뇌 사이를 연결 하는 고리를 제공한다. 새로운 환자에게서 병력을 들을 때 나는 생활방식, 인간관계, 취미, 휴식을 취하는 방법, 식습관과 운동, 성생활, 영적인 관심 등에 관해 많은 질문을 한다. 이런 질문들은 모두 사회적인 병력이라고 부르는 항목으로 분류된다. 의대생들이 처음으로 환자들을 마주하고 있을 때 환자 병력을 알아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정도다. 의과대학 3학년쯤 되면 학생들은 상급자 압력 밑에서 자신들의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단축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때가 되면 질문은 거의 무시되고 병력은 간소해진다. 사회적병력은 환자가 현재 지니고 있는 문제 뿐만 아니라, 그 해결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환자들이 의사를 찾게 되는 이유 중에서 일차적인 요인, 혹은 이 요인을 악화시키는 요소가 스트레스라고 믿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가 될만한 요인이 많은 환경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직업, 결혼문제, 자녀, 대인관계의 결핍, 그 외 여러가지 환경중에서과연 어떤 것이 문제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보다 엄밀한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정신과 육체의 또 다른 상호관계는 사랑에 빠짐으로서 심각했던 질환이 사라져버리는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나는 분노를 표현함으로써 치유가 최고조에 이르는 경우도 보았다. 나는 적절하고도 집중된 분노의 표현이 때로는 치유체계의 활동을 촉발한다는 사실에 일말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다. 특정한 사람이나 장소 또는 사물의 치유력에 대해 믿음을 갖는 것 또한 치유에 이르기 위한 중요한 사항이다. 우리는 흔히 의지를 발휘해서 치유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의지가 자율 신경계와 치유체계의 다른 조절 메커니즘들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외부 사물에 치유에 대한 믿음을 투사하고, 그 사물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이러한 장애를 뛰어넘을수 있다.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보게 되는 정신과 치유 사이의 가장 일반적인 상관관계는 환자가 자신의 삶을 질병까지를 포함해서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정신적으로 깊은 이완을 가능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삶에 대항해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길 필요가 없다고 느끼도록 만든다. 이것은 종종 영적인 각성의 일환으로 또는 높은 차원의 권능에 대한 복종의 일부로 생겨 나기도 한다. 흔히 사람들은 수용하는 인생을 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건을 만들어 내고 상황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발휘함으로써 삶을 영원한 대결 상대로 만든다. 고대 중국철학자 노자에 따르면 그런 삶의 태도는 삶의 道에 정면 배치되며, 그런 방식에 집착하는 사람은 결국은 불행을 맞게 된다.
부드러운 물방울이 단단한 바위를 가르나니
삶에 순웅하면 어려운 일이 풀린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나
삶이 절로 피고 지게 내버려두면
의지는 전혀 길이 아니다.
삶의 길을 버리면 곧 죽은 것이다.
수용,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이러한 정신의 변화는 치유력의 빗장을 여는 핵심적인 열쇠가 될 수 있다. 나는 평생을 똑같은 형식을 되풀이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신 앞에 나를 세워놓고는 '나는 이렇게 하겠다' '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면서. 지난 가을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두자. 일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내버려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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