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행복을 얻기가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창조한 여러 신화들과는 달리 우주는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좌절은 인생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들이 채워지는 순간 또 다시 우리들은 다른 것을 원한다. 이런 만성적인 불만족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다. 행복을 쉽게 얻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우주 자체가 인간 안위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기권 밖에서 바라보면 이름답고 평화스럽게 보이는 지구의 실상도 보기와는 딴판이다. 지구상에 존재하기 위해 인류는 수백만년 동안 빙하, 불, 대홍수, 야생동물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미생물과 투쟁을 벌여오지 않았던가? 현존하는 위험이 사라지면 곧바로 새롭고 복잡한 위협이 나타나는 것 같다. 행성 괘도나 에너지의 전환 처럼 우주는 예측, 설명 가능한 원리를 따른다. 문제는 자연법칙들이 우리의 소망과는 아무 상관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삶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만들어 가는 원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원리대로 움직인다.
우주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다. 단지 인간들의 관심사에 무심할 뿐이다. 인간이 우주의 운행 법칙을 바꿀 수는없다. 또한 우리가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외적인 힘에 대해서 대항할 방법도 별로 없다. 우리가 핵전쟁을 막기 위해서, 기아와 질병을 근절하기 위해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기아와 질병을 근절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상황을 변화시키기위한 노력이, 곧 바로 삶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 “ 인간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한 삶의 질의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어떤 사람들에게 삶의 목적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자신과 자녀들이 생존하는 것이다. 기왕이면 아등 바등 살아가기보다는 어느 정도 편안함과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존의 필요한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그런 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새로운 욕구와 욕망이 샘솟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물질적 풍요가 갖추어지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다른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끊임없이 높아지는 이러한 욕망의 역설적인 상황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하는 의문이 제기한다. 사실상 우리가 높은 목표를 가진다는 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즐기면서 노력하고 있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를 이루는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현재의 삶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데 큰 문제가 있다. 원래 인간의 욕망에는 무관심한 것이 우주 자연일진대 자연이 우리만을 지켜줄 것이라는 문화적 교만이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더 이상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사람들은 사소한 어려움에도 용기와 결단력을 잃고 만다. 불만스런 모든 문제를 나라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불만족의 뿌리는 우리 내부에 있으며 우리들 스스로의 의지로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한다. 쓸모가 있었던 과거의 종교나 애국주의 등의 문화적 방패가 더 이상 우리를 정신적 혼돈 상태로부터 지켜주지 못한다.
아동기는 힘들었을수도 있고, 청소년기는 혼란스러울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고비를 넘긴다면 좋은 세상이 펼쳐질 것 같았다. 성인기 초기 조차도 창창한 미래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득 어느날 갑자기 목욕탕 거울 앞에선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 둘씩 흰머리가 솟아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조금씩 늘어나는 체중은 쉽게 줄어들 것 같지 않고, 눈은 침침해지고 여기저기 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생명의 유한성은 우리에게 “ 자, 이제 너의 시대는 끝이야, 다음을 준비할 수 밖에 없어” 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세상 누구도 이 메시지를 편히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뭔가에 속았다는 느낌, 억울하다는 느낌은 현실을 깨닫는 순간,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우리들은 모두 축복된 앞날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라고 믿는다. 과거의 경험이 어떠했던 간에 지금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미래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현대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과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가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의 달콤한 매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세를 취해야한다. 이러한 자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상도 주고, 벌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외적 여건이 어떻든 간에 스스로 즐거움과 삶의 목적을 발견해 나가는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문명이란 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구성원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규범을 습득하지 않는다면, 사회 질서나 노동의 분화 등을 유지하기가 불가능 할 것이다. 사회화 과정, 즉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으로 잘 통제 할 수 있고, 사회에서 주는 당근과 채찍에 따라서 예측 가능한 반응을 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가장 잘 된 사회화 형태는 구성원들이 사회 질서를 완전히 내면화 한 나머지 이를 어기고는 한순간도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를 사회화 하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연합군은 우리의 생존적인 욕구 및 유전자의 희망 사항이다. 사회적 통제라는 것은 생존을 위협해서 이루어진다. 사회가 처벌만으로 잘 통제되지 않을 때 사용하는 방법은 쾌락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 본성은 정치인들, 종교단체, 기업, 광고주들이 선호하는 공략의 대상이다.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편익을 위해서라기보다 종족 보전을 위한 유전자의 반사적 반응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식도락이라는 말도 결국 신체의 필요한 자양분을 보충하는 것의 현학적인 표현이 아닌가. 성행위도 우리의 유전자가 자기의 영속성을 위하여 우리 몸속에 집어넣은 프로그램 일종이다. 좋은 느낌이 오면 그리고 그 느낌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생겨났다면 그것은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를 통제해 왔던 사회적이고 유전적인 힘들을 아무 의심없이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그것은 곧 자기의 의식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술과 음식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섹스에만 온갖 관심이 쏠려있는 사람은 그의 심리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보다 태어날 때부터 많은 남성 호르몬을 갖고 있고, 그 결과 좀더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그런 사람이 유전자의 지시대로 행동하여 폭력행사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유전적 프로그램에 복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스스로가 무기력해지고 만다. 필요한 상황에서 유전적 지시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은 매우 허약해진다. 개인적 목표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대신 자신의 신체에 적용된 프로그램을 따라야 하기때문이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독립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본능적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복잡 다단한 사회에서 여러 가지의 강력한 집단들이 서로 다른 목표들을 우리에게 주입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학교, 교회, 은행 등의 집단들이 우리들을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다른 한편에선 상인, 제조업자, 광고주들이 우리들의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서 꼬드긴다. 그것은 우리를 목적 달성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결국에는 우리들이 그 사회 시스템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사회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순간순간에 주어지는 보상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경험의 흐름에서 주어지는 의미를 발견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사회적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보상을 자기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 동안 사회에 맡겨 두었던 본인의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몸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독립적이 되어야 하며 우리 마음속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며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물학적 욕구를 이용해 우리를 조절하는 이 사회의 자극, 반응, 양식에 순종하는 한 우리는 외부 힘에 의해 통제될 뿐이다. 현란한 광고에 침흘리고 직장 상사의 찡그린 얼굴이 우리 하루를 망치도록 방치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을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의식을 통제하고 외부의 꼬임과 협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마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프로이드는 우리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 날뛰는 두개의 폭군이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개인의 본능 욕구인 이드(id)요, 다른 하나는 사회적 압력인 초자아(superego)이다. 그리고 이들과 맞서는 것이 자신의 본질적 요구를 대변하는 자아(ego)이다. 의식을 통제하려는 동양의 기법은 여러 종류이며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 비롯 서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요가나 중국의 도교 그리고 불교의 선 등은 모두 우리 마음을 외적 유혹으로부터 해방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의식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지적 기술이 아니다. 지능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것은 감정의 몰입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앎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작곡가가 알고 있다고 해도 수많은 연습을 해야 좋은 곡을 쓸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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