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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행복한 삶이란

 

태어날 때 주어진 환경과 조건중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부시 아버지도 미국 대통령이었다. 아버지 부시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석유기업을 경영하여 억만장자가 되었다.  빈라덴 아버지도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재벌이었다. 부시는 미합중국에서 태어나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었고, 빈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나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부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빈 라덴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뉴욕 세계무역센타 빌딩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두 사람의 악연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출생이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휴전선 남쪽에 태어난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 인생에서 성공이라고 할만한 어떤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팔할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삶이 순조롭지 않을 때아무리 애를 써도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래서 흔히 부모를 원망한다.  출생의 행운과 불운은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하지만 태어날 때 받은 어떤 행운도 행복한 생활, 훌륭한 삶, 성공하는 인생을 완벽하게 보장하지는 않는다.  행운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불운은 온전히 혼자 감당하면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인간은 이성과 더불어 욕망을 가진 충동적 존재이다. 욕망에 휩쓸리고 충동에 빠지면, 때로 이성이 무력진다. 여기서 무지가 겹치면 터무니 없는 망상에 빠져 자기 손으로 삶을 파괴할 수 있다. 사랑, 기쁨, 행복, 열정, 환희 등 삶에서 귀중한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 오로지 지금 여기에만 있다.  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삶에는 끝이 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은 머지 않아 모두 스러지고 망각된다. 인생은 헛되다. 하지만 기쁜 삶, 의미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삶의 유한성과 관련한 허무의식을 이겨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는 길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삶의 유한성과 투쟁하느라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환희를 외면한다. 

 

은하와 행성의 생애 주기에 비추어 보면,  인간의 삶과 하루살이의 삶은 양적인 차이가 없다.  둘 다 찰나의 시간을 살 뿐이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루살이는 그것을 모른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호모시피엔스의 특별함이다. 그 특별함을 지성이라고 한다. 삶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제대로 살수 있다. 좋은 음식, 건강한 생활 습관, 효과 있는 약물과 의료기술, 이런 것들의 도움을 받아 수명을 조금 연장하기는 했지만,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백년을 넘기기 어렵다. 인간의 몸은 누구나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슘, 인, 칼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특별한 원자는 없다. 원자의 단위로 보면 별과 달, 풀과 나무, 아메바와 사람은 모두 같다.  그런데 무생물이나 다른 생물과 달리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있다.  몸은 모두가 똑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데도 인간은 서로 다른 자아 정체성을 형성한다.

 

신은 오직 그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  영혼의 불사를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각자의 자유다. 그 영혼이 신의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린다고 믿든, 아니면 영혼이 환생한다는 윤회를 믿든, 남에게 피해 줄 일은 없다.  그러나 이 믿음을 잘못 쓰면 자기의 삶을 망칠 수 있다. 영생을 위해 다음 생에서 좋은 삶을 얻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누릴 권리가 있는 삶의 환희를 자기 손으로 억압하고,  질식 시킬 수도 있다. 심지어는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생명을 빼앗기도 한다. 죽음의 필연성을 부정하지 못하고,  영혼의 영생이나 천국, 윤회에 대한 믿음에서도 큰 위로를 받지 못할 때, 유한한 삶의 허무함을 달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은 이름이 후세에 오래 기억되게 하는 것이다. 이름을 남기려는 노력이 삶에 활력을 불러넣을 수는 있다.  위대한 인물들은 위대한 진리를 밝혔거나, 거대한 제국을 세웠거나 마음을 흔드는 예술 작품을 남겼다. 

 

이름과 업적이 남았기에 그들의 삶은 훌륭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들이 진리에 대한 호기심, 깨닫는 즐거움, 내면에서 솟구치는 열정,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자기 나름대로 표현하고 실천했다. 만약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고 자신이 이룬 것에 만족한다면, 그 인생은 이름이 남든 그렇지 않든, 그에 상관없이 훌륭한 인생이다.칸트의 충고를 기억하자.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훌륭한 인생, 행복한 삶은 죽음 너머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석가모니도, 예수도 이름을 남길 목적으로 살지 않았다. 모두 스스로설계한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 죽었을 뿐이다.  훌륭한 삶을 살면 이름이 남는다.  그러나 이름을 남겼다고 해서 다 훌륭하게 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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