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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 권리(박영숙 지음)

세상을 바꾸는 힘, 질문

세상을 바꿔온 힘을 한 글자로 담을 수 있는 공용어는 물음표 아닐까? 물음표는 통념이나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히 채워져 있던 빗장을 여는 열쇠다. 이유와 배경을 알려고 할 때 비로소 맥락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고, 맥락을 알게 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대안의 상상력에 불이 켜지는 것이다물음표에는 에너지, 힘이 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오면 아주 사소한 것까지 궁금해져 온통 머릿속에서 그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무엇을 봐도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나의 모든 것이 그와 연관되어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대상을 좀 더 잘 알고 싶어지고, 나와 그 대상이 상호작용하길 기대하게 된다.  '?'  물음표가 고리 모양으로 생긴 것은 아마 사슬처럼 고리에 고리를 끼우고 또 끼워서 이어가게 하기 때문 아닐까? 

 

우리가 세상을 배우는 힘도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어린 아이에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은  ‘이게 뭐야?’  ‘왜?’  ‘내가, 내가’ 이 세 마디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궁금하고, 건드려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물음표에 익숙하지 않다. 무엇을 배우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학교에 다니지만 질문하는 것을 미덕으로 보지 않는다. 무엇을 배울지, 과목을 선택하는 것부터 스스로의 호기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미처 호기심도 생기지 않는 것을 제대로 알고, 외우기 얼마나 어려운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질문하거나 반대로 질문을 받는데도 서툴다. ‘왜’라고 물으면, 따지고 드는 것으로 여겨지고  ‘NO'라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어떻게? ’라고 묻는 질문은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래서?’라고 물으면 한번 겨뤄보자는 도전으로 들려 방어벽을 세우기도 한다.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가는 ‘당신은 우리 편이 아니었던거야?‘ 라는 비난을 경험하고나면, 질문을 하는 일은 차츰 피하게 된다. 질문 하나를 가지고 편을 가르는 분위기까지 보태진다.

 

진정으로 동의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스스로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토론은 제3의 안을 발견할 가능성을 기대하기보다는 이편이냐, 저편이냐를 가르고 확인하는 심사대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이 있을 수 있고,  조금 더 가보면 생각지 못했던 더 좋은 안을 만날있는데, 마침표를 찍고 돌아선다. 물음표를 떠올리는 데는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겸손으로 판단중지를 할 수 있는 내공도 필요하다. 우리 삶과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모호함이 그대로 진실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불편하다면, 그 대상에 진짜 관심을 가질 동기가 없거나 자신감이 없는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이 건네는 물음표를 끼울 고리가 내게 없는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다른 사람 또한 관심을 표한다면 마땅히 반가워 할 일이다.

 

질문의 대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생각해볼 필요가 그것이다. 스스로 맥락을 이해하고,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는 과정 없이 이것저것 툭툭 질문을 던진다면, 그야말로 딴죽걸기가 되기 십상이다.  (물음표 ‘?’는 글의 끝에 물음을 뜻하는 라틴어quaestio를 문장부호처럼 붙었는데 매번 쓰기가 불편해서 qo라고 줄여 쓰다가, 다른 말과 혼돈을 일으켜 q는 위에 o는 아래에 쓰기 시작한 것이 ‘?’가 되었다고 한다) 도서관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하다. 책을 계속 읽게 되는 것은 호기심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물음표가 떠오르지 않는 책을 나는 본적이 없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왜 그랬던 것일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 많은 일을 당연한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누가 주입한 것도 아닌데 태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정말 그런지 묻지 않고 확인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일들, 예컨대 성실, 인내, 평등 같은 덕목이나 첨단, 성장, 경쟁력같은 척도에도 얼마나 무조건적으로 절대가치를 부여하는가? 또 얼마나 쉽게 자책과 절망과 불안에 자신을 내던지는가?  제도적으로 신분제가 사라졌으며 누구도 더 이상 쇠사슬에 묶이거나 족쇄가 채워지진 않는다.  그런데도 순간순간 온몸이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을 만난다. 누가 채찍을 들고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쫓기듯 살아간다.  끝 모를 경쟁, 적자생존의 이치와 개인의 노력에 책임을 전가하면서 불균형, 차별, 소외를 어쩔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대열에 속하지 않으려고 무장을 한다.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길을 잃은 건 아닌지, 목적지가 원래 있기나 했던 건지 떠올릴 틈도 없다.

 

원래 그런 것이고, 다들 그렇게 사는데 어쩔 수 없다는 핑계들에 핸들을 맡겨버린다.  어쩌면 원래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남과 달라도 괜찮을 수도 있고, 어쩔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때로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시간을 가질 때 비로소 돌아보고 둘러보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과 세상에 상처를 줄 수 있는지 깨닫게 되고, 쓸데없다고 여기던 것을 몰아내버려야 한다고 믿었던 것까지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멈춰서야 나를 싣고 달려가던 시간의 흐름에서 내려설 수 있다.

 

책은 삶의 길목마다 멈춤의 여백을 열어주는 열쇠다. 숨 가쁘게 쫓기던 일상에서 성찰과 사유의 시간을 연다. 자신을 돌아보고, 둘레를 둘러보게 한다. 그럴 때야 당연하게 여겼던 혹은 어쩔수 없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다시 보일 수 있다. 정말 어쩔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이 길에서 벗어나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이지 않을까? 고요한 성찰과 사유의 끝에서 세상과 대화하는 자신을 만난다.  다른 세상을 만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게 될 때 자기 자신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힘이 생긴다. 책으로 세상을 읽고 다양한 삶을 만나면서, 내삶에 대해서도 괜찮다고 괜찮을거라고 이해하고, 신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신을 긍정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오롯이 나로 살아갈 힘을 갖게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