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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 권리(박영숙 지음)

세상에서 양육기간이 가장 긴 종

무턱대고 방침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분명한 근거를,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도록 문서로 작성해둘 필요도 있다.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수습하는 것은 더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새학기나 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내준 책 목록을 들고 와서 검색대와 카운터를 오가며 책을 찾느라고 바쁜 것은 아이가 아닌 부모들이다.  방학을 맞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부모 자신이 읽을 책을 고르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에게 말을 걸면서 진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두가지다.  첫째 아이에 제대로 모르고 목소리도 들어본 적 없이, 아이가 뭐에 관심이 있고,  어떤 환경에서 사는지 아무 것도 모른채 그 아이에게 알맞은 책을 골라 준다는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하는 점, 둘째 아이 말고 '당신 자신은 어떤 책을, 언제, 왜 읽고 싶어했나요?' 하는 질문이다.

 

아이들도 현실을 살아낼 힘이 있다는 믿음, 함께 할 사람들이 있다는 부모의 믿음이 중요하다. 특히 만화를 금지해야 한다는 요구에는 공부에 도움이 될만한 책만 보기를 바라는 욕심도 깔려 있다.  만화책이든, 그림책이든, 텍스트만 있는 책이든 정확한 자료의 의미있는 메시지를 담도록 공들여 만들어졌는지, 이용자들의 요구에 맞는지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 아이들의 다양한 선택권은 오롯이 부모의 몫이다. 아이들이 끼어들 틈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은 100평짜리 집에 살아도 소외계층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맘껏 빈둥거려도 좋고, 알마든지 실패할 권리도 누릴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다. 부모가 도서관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단연코 도서관이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교육에 대한 생각과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삶에서 무엇을 우선 순위에 두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 아이러니일 것이다.  부모들은 불안해 한다.  공부하느라 바쁜 아이를 아무도 관리해주지 않는 도서관과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아이 혼자 책을 고르도록 맡겨둘 수도 없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어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잠깐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인데 '억울하게 우리 아이만 피해를 입을 수 없지 않느냐'고 불안한 부모들에게 도서관이 내건 지적 자유는 너무 먼 이상, 혹은 속모르는 답답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평가나 경쟁에서 벗어나 진짜 배움의 의미와 즐거움을 스스로 알아가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가르치고 돌보고 평가하고 책임지는 대상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배우고 고민하고 성장하고, 때론 실패하면서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만나길 바란다아이들이 그저 돌봄의 권리만 보장받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돌볼 권리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시간을 통해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그런 바람이 전해지면 아이들은 도서관에 오면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덜자란 어른이나 부모의 소유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소통하고 공감대를 만들어가야 할까?  한국 사회에서 양육기간은 참으로 길다. 불과 한 세대 전만해도 스무 살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고 일상을 꾸려가면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홀로 설 수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자란 청소년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기간을 길어지고 점점 더 연장되고 있다.  스무 살은 커녕 서른이 넘어도 자립은 어렵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언제, 누가 선언한 것도 아닌데 누구나 그렇게 믿어버리게 되었다. 준빌해야 할 과업은 학습에만 치우쳐져 있다.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을 배울 기회가 없다. 외형적으로 발육속도는 더 빨라졌지만 제 앞가림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은 보호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정서적 발달도 마찬가지다. 호기심, 설렘, 모험, 상상력같은 것은 쓸데없는 일로 치부된다. 그래서 양육기간의 연장은 성장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이것이야말로 발달장애로 보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성장기 청소년의 90%이상 아니 99%가 발달장애를 겪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모를 세 글자로 풀면 '보증금' '고시원'으로, 열 글자로 풀면 '보증금 없는 가장 싼 월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몇 년동안 먹여주고 재워줄 곳으로 군대 정도를 생각한다. 입시, 진학, 취업 준비의 대열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데도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20대 긴 시간동안 유일한 생계 수단인 아르바이트에 의존한 채, 학업과 취업 전쟁의 언저리에서 서성대는 주변인으로 지내야 한다. 몸과 정신의 불균형의 성장기는 청소년의 오래된 특징이다. 양육기간이 길어지고 불균형이 심회 되면서 방황과 혼란을 넘어 무기력과 무능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신체 발육이나 세상에 대한 지식도 상당한 수준이지만 정작 제 앞에 놓인 일상의 과제나 사적인 문제 대해서는 기가 찰 만큼 무력하다. 대학 입시를 마칠 때쯤이면 머릿속에 입력된 지식과 정보의 양은 인생을 통틀어 거의 최고치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밥도 못짓고, 아픈 사람이나 어린 아기를 단 하루도 돌보지 못하고 누군가 부당한 폭력을 당하는 걸 보고도 무심하다면, 그야말로 발달 장애가 아닌가. 많은 소년들이 소녀를 만나 진짜 남자가 되는 달콤한 환상의 맛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될수도 있는 혼돈도 겪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른들이 할 수 있는 몫은 무엇일까?  흥분, 당황, 충만함,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의 폭풍을 거치는 청소년을 이해하려고 너무 애태우지 말고 조금 담담하게 바라볼 것.  청소년들이 어른흉내 내면서 성과 사랑에 눈 뜨고 생명에 대한 책임을 배우며, 인간으로 성숙해 갈 수 있도록 사랑하고 배우며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

 

소통이 발화되는 데는 필요한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엔진이 잘 가동 되려면 워밍업이 필요하고, 좀 떨어져서 봐야 형체가 보이는 그림처럼 말이다.  너무 가까워 딱 달라 붙어 있으면 어떤 물리적,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기 어렵다.  적절한 거리는 소통에 도움이 된다.  서로에게 기대나 욕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좀더 솔직할 수 있고, 상대방의 부족함이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곧바로 영향을 주지않기 때문에 날카롭게 방어하지 않는다.  거리를 두면 그래서 너그러울 수 있고,  너그러워지면 상대방의 자리에서 그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남의 부모, 남의 아내에 대해 이해가 되면, 자기 부모, 자기자식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얻는 셈이다. 그 다음은? 

 

도서관에서 입이 닳도록 읊어대는 원칙, 자발성과 상호작용의 잠재력을 기대한다. 책, 만남 그리고 공간, 책은 나의 이야기도 너의 이야기도 아닌 제3의 주제를 무한대로 제공한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도 소통을 시작할 이야깃거리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도서관에서 가르치고, 돌보고, 지시하고, 관리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  부모, 자식, 주부, 학생처럼 주어진 몫에 매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일방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상대방은 기대 되는 답을 내놓아야 하는 관계가 아니다.  주고 받을 이야기도 함께 나눌 시간도 잃어버린채 입도 닫고, 귀도 닫고, 마음도 닫아 걸었던 아이들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다. 도서괸은 100만 명의 스토리텔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