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사람에게 물어보니 제일 좋은 삶은, 건강하게 살만큼 산 다음에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그대로 깨어나지 않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오래 중병을 앓다가 죽으면 자식들 한테 짐이 될까 걱정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몸보다 정신이 먼저 생물학적으로 사망하기 전에 철학적으로 죽는 것이 두렵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면 흠뻑 젖는 일은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뇌의 노화를 늦추는데 도움이 되는 활동을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치매를 막을 수 있다. 특히 정신을 집중해서 쓰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면 큰 도움이 된다. 나이를 먹는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청년기에 들끓던 욕망과 충동, 번민이 다소 잦아드는게 무엇보다 좋다. 예전보다 평온만 마음으로 아침을 맞을 수 있다. 여유있게 사람을 대할 수 있다. 나쁜건 여기 저기 몸이 고장난다는 점이다. 미래에 대한 이상을 잃어버리고 현재의 행위를 스스로 설계하지 못하게 된다. 나이를 먹고 죽는 것도 삶의 과정이다. 생물학적 사망의 축복이 내릴 때까지 그냥 살아야 한다.
로널드 레이건은 아흔넷의 나이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국 대통령을 두 번 지냈으며 죽기전 십년 동안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레이건은 강력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대규모 부자 감세정책을 폈고 복지 예산을 줄였으며, 노동조합을 적대시했다. 댜륙탄도 미사일 방어체제 도입에 돈을 쏟아부어 미국 연방정부를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중동과 유럽의 부자와 은행들이 미국 국채를 구입하려 앞다투어 달러를 사들이자 국제환시장에서 달러가 초강세를 보였다. 달러값이 오르자 미국산 상품과 서비스의 국제가격이 올라 막대한 무역적자가 생겼다. 레이건은 미국 경제를 망쳤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기 위해 정부와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자기가 설계한 방식으로 살았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라고, 자식을 낳거나 낳지 않거나 낳지 못한 채, 늙고 병들고 죽는다. 세상은 커다란 저수지와 비슷하다. 위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유입된다. 아래에서는 죽음이 흘러간다. 사람은 대부분 병에 걸려 죽는다. 압도적 다수가 암, 뇌혈관 질환, 심장질환, 당뇨병, 폐렴, 고혈압, 간질환 등의 질병으로 사망한다. 질병 다음이 자살이다. 교통사고 사망자는 자살자의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죽음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찾아든다. 아이들 경우는 교통사고, 암, 선천성 장애가 주된 원인이고, 열살부터 서른 아홉까지 활기찬 인생 황금기의 최대 사망 원인은 자살이다. 40대와 50대는 자살이 여전히 두 번째 사망 원인이다. 60대로 넘어가면 암, 뇌혈관 질환, 심장질환이 3대 사망 원인이 되어 자살이 뒤로 밀려난다.
고령층에 질병 사망자가 많아서 그런 것일 뿐 실제 자살율은 고령층이 가장 높다. 갈수록 삶이 길어지는 이유는 영양상태가 좋아졌고, 상수도 보급과 전염병 예방 등 체계적인 공공보건정책 덕분에 전염병 위험이 줄었다. 그릐고 의료기술이 발전하고,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늘어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장수는 기회인 동시에 위험이다. 운이 없거나 잘 대비하지 못하면 재앙이 된다.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에만 장수는 축복이 된다. 무엇보다 먼저 삶의 의미가 있고 사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장수는 또한 건강해야 축복이 된다.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수명은 80세가 넘었지만 건강수명보다 9년이나 짧다. 질병이나 부상 때문에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기간이 9년이나 된다는 뜻이다. 건강이 나쁘면 행복하게 살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는 돈이 있어야 장수가 축복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삶의 지혜를 담은 챡을 읽는다. 하지만 품위 있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죽음은 합당한 이유없이 본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갑자기 찾아든다. 죽음이 남기는 것은 가슴저린 한과 애통함, 억울함 뿐이다. 죽음은 피해야 할 재앙일 뿐 미리 준비해야 할 그 무엇이 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노환과 만성질병으로 죽는다. 죽음은 무작정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죽음이 예측할 수 없는 재앙처럼 다가올 때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기 어렵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까? 선택하기 어렵고 보장할 수도 없다. 그래도 최대한 소망과 가까운 방식으로 삶과 작별하고 싶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 환자가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가족들이 연명치료를 요구하더라도 병원은 거부한다. 의사와 병원은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도덕적 의학적 신념이다. 하지만 환자의 가족들에게는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모독하는 일이다. 생명은 존엄하다. 죽음 역시 존엄하다.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내 선택은 단 1초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다. 감각은 죽고, 의식 혼자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적 자아는 감각과 정신, 욕망과 이성의 통일이다. 운동이 멈춘 몸에 존재하는 의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연명치료는 비용이 숨을 쉴때마다 불어날 것이다. 건강보험공단이 지불하는 돈만큼 사회재정에 부담을 준다. 자식들은 헛된 희망을 품고 병실 구석에 앉아 귀한 시간을 허비하게 될 것이다. 죽기위해 국가나 사회의 허락을 받을 이유가 없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본질적으로 나의 자유이며 권리이다. 국가는 나를 죽일 권한이 없으며, 살라고 명령할 권한도 없다.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는한 삶에 대해서든, 죽음에 대해서든, 국가나 사회가 나의 의사결정에 간섭해서는 안된다. 자기 방식대로 살고 자기방식대로 죽는 것은 만인에게 주어진 자연법적 권리이다.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나날들이 지속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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