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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정 공 부 (미리암 그린스팬, 이종복 옮

두려움

최근 통계에 의하면 약 5000만명의 미국인이 삶의 어느 순간에 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이 공포증들 가운데 몇몇은 한시적인 것이지만, 다른 것들은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삶을 통해, 지속되고 악화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통계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불안장애로 진단 내려지는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이 시대는 불안의 시대다. 이 정신 상태는 일반 대중 사이에 우울증보다도 훨씬 넓게 퍼져있다. 두려움은 특정 대상에 대한 불연속적이고 강력한 감정인 반면, 불안은 불편함이 일반화된 상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 반면 모든 것에 대해 불안해 한다.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생존의 위협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지구 온난화, 공해, 핵무기와 생화학무기의 재앙, 테러리즘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위협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위협들과의 관계속에서 야생 멧돼지들에게 쫓겨 다닐 때 했던 것처럼, 1:1로 맞서는 오래된 방법을 통해 두려움을 경험하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지금 우리의 두려움들은 합리적이며, 개개인을 초월한 것이며 압도적이다. 그들은 또한 대부분 거부된다. 예전에는 아무도 겪어 보지 못했던 세계적인 맥락에서 두려움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다시 마비된다. 느낄 수 없다면 고칠 수 없다.

 

우리가 두려움의 윤곽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순수하게 경험하거나 터 놓고 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십중 팔구 불안감, 공포증,  패닉,  강박관념, 정신적 신체적 질병 그리고  파괴, 폭력적인 행동으로 인해 고통받을 것이다. 두려움은 분노가 그러하듯이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이다. 두려움의 본성이 어떠하든 간에, 이 짐승과 친숙해지는 것이 얼어붙고 회피하는 것 보다 도움이 된다. 두려움은 웃음이나 눈물만큼이나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 극소수는 기꺼히 인정하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무서워한다. 이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인간존재의 조건은 두려움이다. 두려움, 상실 그리고 죽음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장되어 있는 것들이다. 무차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우리는 무력감에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는 불확실성, 무기력, 고립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는 고통 혹은 죽음없이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가능한 바램들은 우리 모두를 더욱 더 두려움에 떨게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간에 이러한 기초적인 두려움이 우리 안에 거주하고 있다. 당신이 거명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공포증 혹은 두려움들은 다음과 같은 여섯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고통, 상실, 죽음, 취약함, 고립, 그리고 혼돈의 두려움이다.

 

당신이 암을 가진 것으로 판명이 난다면, 침체된 경제상황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다면, 열네살 난 딸이 식욕부진에 걸린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배울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두려움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시급하고 밀접한 관심이 필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우리가 목숨을 보호하도록 움직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두려움은, 우리가 인간이고 완벽하지 못하다는 두려움은 우리를 행동하도록 밀어 붙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피하려고 한다면 그 두려움은 더욱 커질 뿐이다. 비결은 어떻게 참아내는가, 어떻게 그것과 마주하는가, 그리고 어떤 행동이 올바른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두려움을 부정하는 문화의 기초는 이러하다. 두려움은 모든 좋은 것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두려움을 느끼거나 표현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오직 겁쟁이들과 비겁자들만이 무서워한다.

 

슬픔은 심각한 상실 뒤에 오는 표식으로 이해된다. 우울증과 알콜중독과 같은 절망은 질병으로 간주됨으로써 도덕적으로 면죄되었다. 그러나 당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두려움을 보든 간에 이것은 본질적으로 치욕적인 것이다. 우리의 문화는 두려움을 거부하는 문화다. 두려움은 유약함, 비겁함, 비합리성, 여성과 유아기의 영역과 관련된 특성이다. 우리는 사랑, 이성, 창조, 용기 그리고 능력의 장애물로 두려움을 간주한다. 두려움을 하등 쓸데없는 것으로 본다. 두려움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의 퇴화는, 젊은이들의 감정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지성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의 아이들은, 대중매체의 무서운 화면들이라는 음식을 끊임없이 먹으며 성장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폭력적인 행동들을 밤마다 뉴스에서 보게되고, 그러한 장면들이 스위치 한번에 꺼졌다, 켜졌다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실제 이미지들과 오락의 이미지들이 섞여 현실의 일상적인 폭력에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덧 씌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두려움은 경고신호라는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다음 채널로 돌리기도 전에 짜릿한 느낌으로 변해버린다. 우리는 감정적 본능의 야생성을 잃어왔으며,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우리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영화와 비디오들은 마비된 두려움의 감정을 뚫고 들어가서,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기 위해 점점 잔혹하게 무섭게 만들어진다. 공포영화는 한시적으로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 삶속의 현실, 목적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더욱더 소외되고 현실의 두려움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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