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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알을 품고 있는 닭은 때를 알아

 마음의 땅을 心地라고 한다. 심지의 땅에 뿌려진 씨앗은 비가 와 촉촉해지면 어김없이 싹이 난다. 물건이 크다 작다, 부자다 가난하다, 명예가 높다, 이런 것들이 온통 나를 둘러싸고 있다. 이런 곳은 이익을 얻고자 서로 다투고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다. 같은 일이 반복되어 돌고 돈다. 내가 만들어 짓는 세계는 없어지는 것이으로 헛 것이고, 곧 그 만든 것이 무상한 것으로 눈앞에 드러난다. 하물며 내가 베워 익힌 것, 관념속에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몸이 부처 땅에 닿아 쓰이면, 학문도 에술도 다 꽃이고, 취미 또한 마음 땅에 의지해 보이면 역시 그것도 하나의 꽃이다내가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부자다.  언제든지 믿음이 있으면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눈이 조금만 열리면 타인의 허물 때문에 나를 돌아보고, 내가 밝아져 성장한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칸막이가 없어지면 신뢰가 깊어진다. 이 신뢰는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고 서로 넉넉진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부처도 살고, 있는 곳 모두가 평등해져 있다. 그것이 佛國土이다. 오직 사람이 사람을 믿어 사람안에 佛이 있음을 알고 믿으면 마음의 벽이 무너진다. 내가 마음 땅에 닿아 있으면, 고추씨를 심으면 고추가 열리고, 국화는 꽃을 피우고, 너도 피어나고 나도 피어난다. 보고 듣는 것이 밝아지고, 생각이 밝아지고, 돈을 다루면 돈을 다루는데 밝아져 그 돈으로 사람에게 이익이 되게 쓸 줄을 안다.

 

관념이나 번뇌망상은 없애려고 하면 더 성한다. 생각은 없애는 것이 아니다. 알고 놔두는 것이 일에 속한다. 깨달음은 미리 알고 있는 곳에서 오지 않는다. 믿음이 있는 곳에서 예기치 않게 온다.  이 믿음은 마치 알을 품고 있는 닭의 몸과 마음이 온통 품고 있는 알에 가 있는 것과 같다. 아는 것에 머물면 相이 생겨 중생의 어둠이 생긴다. 그늘이 생긴다.  사람은 이 相을 취한다. 우리가 대개 안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태어난 뒤에 온 것들이다. 그러나 알기 전에도 있다.  프랑스 사상가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지 않아도 존재한다. 이 언어는 현대인들의 의식을 잘 말해준다.  우리는 보통 생각해 존재하는 줄 안다. 생각이 있는 곳에 내가 밝아진다. 내게 있는 자혜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부러 생각을 놓으려고 하면 놔지지 않는다.  생각을 안할 때도 나는 존재한다고 알고 있으면, 생각이 저절로 놔진다.  데카르트는 개념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다.

 

앉아 좌선하고 있는 것도 품는 것이다.  닭이 병아리를 갖기 위해 알을 품고 있을 때는 고요한 곳에 자리 잡는다. 좌선이 그것이다. 道를 닭는 것은 닭이 알을 품듯 나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응 알을 안아 품는 것이다. 품지 않으면 께달음는 오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부처의 마음이 있다.  다만 우리가 가려놓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있는 알을 품을 수 있다. 병아리와 어미가 쪼는 것이 서로 맞아 떨어진다. 깨고나온다. 줄탁동시茁琢同時다. 생각이 일어난 것이 나쁜 게 아니다. 그 생각 위에 또 생각을 얹어 놓는 습관이 나쁜 것이다.  내 마음을 놔두고 왜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에 묶여 있는가!  생각으로 마음을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사람이이 말위에 저 말, 저 말위에 이 말을 얹어 놓는다. 사람이 공부를 하는 것이지 사람을 떠나서 다른 물건이 어디로부터 와서 하는 공부가 아니다.  공부는 사람에게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나오게 하는 공부다. 하지만 우리가 주워들은 것을 가지고 들어가 스스로를 막아 놓는다. 禪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종교를 넘어선 공부다. 사람이 근본을 변화시키는 공부다.  사람이 본성을 보고 나오면 종교를 바꾸지도 않고도 그 종교를 만든 성인을 만날 수 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