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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성철스님의 중도론

본시 禪은 석가모니가 그의 손에 꽃을 들어보이니 가섭이 조용히 웃는데서 시작한다.  보리달마는 이 법을 가지고 중국에 온다. 달마가 오기 전 중국인에게는 제자백가사상이 그 문화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제자백가 사상은 보리달마가 온 뒤, 그 선비들 또한 마른 나무가 촉촉한 비를 만난 것처럼 생명이 살아난다.  중국 선사들 언어속에는 노자와 중용을 깔고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道와 中庸이라는 언어가 禪이라는 말을 둘러쓰고 나온다. 불교에 있는 인과의 윤리가 품고 있는 덕德을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는 것이 너무 드러난 것은 곧 철徹에 속한다. 그리고 天道는 사사로히 친함이 없다’ 도덕경의 철이라는 말을 우리 시대로 가져오면 그가 말한 도의 성질이 더 잘 드러난다. 성철 스님은 노자가 말한 철로 이름이 난 대표적 인물이다.

 

어느 수행자가 묻기를 '응무소주이생기심(마땅히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내라)을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했다. 선사는 답한다. ‘허공에다 말뚝을 박을 수 있겠는가?' 응무소주를 다른 말로 나타낸 것이다. 허공의 성질이 이렇다. 식識이 먼저 밝아진 사람은 그 이치에 따라 매달려 있다.  그리고 아는 힘이 항상 침묵을 먼저 하고 나온다. 다툼을 놔 버린 마음엔 옳고 그름이 없다. 눈에 있는 옳고 그름에는 다툼이 있다. (감각기관은 분별심을 만든다. 분별심은 생존을 위한 도구다. 그래서 분별심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것이 믿음 가려서는 안된다. 그러면 편협해져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불성은 열려있는 마음이다. 열려있다는 것은 분별심이 없는 것이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마음은 비어 있어야 한다. 불교의 중도가 빈 마음이다. 마음공부의 목적이다.)

 

‘중도는 시비, 선악 등과 같은 상대적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입니다’ 성철 스님의 중도론이다. 밥을 너무 많이 먹으면 지나친 것을 알고, 너무 적게 먹으면 조금 더 먹었으면 하고 안다. 이 알게 하는 것이 中이 갖고 있는 성질이다. 그러나 지식속에 묻혀있는 중도는 이 삶을 모른다. 중도는 사람속에 있으면서 눈에는 안 보인다. 안보이니 잡을 수가 없다.中에 든 마음은 언어나 형상으로 보이고는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 내게 있지만 볼 수가 없고 잡을 수가 없다.  중도를 아는 사람은 치우친 것에 마음이 없다.  그래서 中을 만나는 사람은 붙들고 있는 것을 절로 놓는다.  다툼은 절로 그치고 슬기로운 눈을 갖는다. 사실 부처는 되는게 아니다. 원래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중도를 짓고 부처도 쉽게 짓는다. 조작이다. 성철스님이나 탄허스님 같은 분들이 워낙 박식해서 철 즉 밝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많은 지식을 남기고 가신 분들이다. 노자는 말한다. ‘성현은 밝되 밝음을 따라가지 않는다'  성철스님은 밝음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많이 알기는 하지만 밝은 식識을 못 놔버린 사람이다. 거울은 사물을 비추지만 그 비추어진 물건을 지니고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는 것으로 인한 시끄러움이 없다.  왜냐하면 거울 같은 우리 성품은 아는 것을 찰나에도 붙들고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울은 비추는 성질일뿐, 짐으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