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번뇌煩惱를 끊는 이야기(간화선의 길

천개의 눈중에 바른 눈?

우리 속에 있는 성품이 곧 불성이다. 이 성품은 누구나 있다.  다만 내가 가려 놓고 있다. 이 가려진 부처를 서로 드러내 놓고 보자는 것이 곧 무차대회다. 禪은 다툼없는 마음, 곧 부처 마음이다. 가려진 마음이 사람마다 가린 것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고 나온다. 성품을 덮어 놓으면 중생이요, 열리면 성인이다.  본 성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있지만 문명이 주는 생활패턴에 나를 빼앗기고 나에게서 먼 것 같다. 우리 눈에 보이는 저 푸른 잎은 저 나무 아래 있는 뿌리에 닿아있고, 그 뿌리는 땅에 이어져 있다. 땅엔 잎도 없고 나무도 없지만, 나무를 푸르게 하고 줄기를 튼튼하게 한다. 내 몸에 붙어있는 오관인 눈, 코의 감각이 이 심지의 땅에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뭇가지나 잎이 저 아래 흙에 닿아 있듯, 내가 보고 듣는 감각 또한 내 성품인 부처에 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있다. 바람을 만나면 피하려고 하고 편안한 것을 찾아나선다.

 

불교는 나를 놔두고 찾는 종교가 아니다.  문명의 변화 속에서 나는 날마다 시끄럽다.  수행은 나를 떠나지 않고 있는 성품을 만나는 일이다. 이 성품에서 온 지혜는 거울 같다. 이 거울은 옛날도 비추고 지금도 비춘다. 이런 사람은 시끄러움이 없다. 옛 언어에 묶이지 않고, 지금에도 묶이지 않는다. 만나는 경계마다 비추어낸다. 神의 성질은 사람의 알일이 아니다.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신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신은 묘함의 다른 이름이다. 뜻을 얻는 이는 말을 듣고, 말 아닌 것을 분명히 안다. 하나를 따라가는 이치가 끊어지면 생각이 그친다. 그치는 곳에 일어나는 일은 아직 모른다. 실상은 이치에 머물지 않는다. 성품에서 온 지혜는 아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때그때 알아야 할 것을 알아낸다. 道를 이해한 사람은 도의 이치를 안 사람이다. 

 

언어는 사람을 속이는 도구다. (말을 배우고 문자를 배워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배운다. 거짓말은 삶에서 필요한 도구다. 잘 써야 하는 도구다)  우리가 살다보면 비가 올때도 있고, 해가 나올 때도 있다. 비가 올 때는 우산이 필요하고, 해가 나올때는 우산을 집에 놔두고 나간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엔 우산이 필요없다. 법은 상황에 따라 그 상황에 맞게 써야 한다. 선의 지혜는 그런 것이다.  이해하는 선은 우산을 항상 들고 다닌다. 법을 알되 상황에 안 맞는 말을 한다. 道는 어느 하나의 이치에 붙들려 있지 않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세존께서 연꽃을 들어보이니 아무도 그 뜻을 모르고 오직 가섭만이 미소지었다.

 

사람마다 품고 있는 불성은 앉고 서고 걸을 때도 있는 것이다. 이는 몸이 아니고 몸을 통해서 작용을  보여주지만 잡으려들면 멀어지고 보려 하면 안 보이는 것이다.  ( 세상을 몸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을, 의도를 통해서 보여준다. 나는 내 몸과 세상 사이에 있다.  내가 맑아야, 내가 비어 있어야 올바르게 세상을 비출 수 있고,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고 행동한다. 나는 비어 있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한다.) 근본을 알면 언어가 물러가지만 붙들리면 언어가 근본을 덮는다.  법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조사는 먼저 듣는 이로 하여금 믿음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 돌아보도록 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스스로가 확인한다. 마음이 비면 가린 것이 없으니 성인과 중생이 바로 통한다. 그리고 옛날과 지금도 통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눈을 스스로 가려 살고 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마음이 가 있어 그 속에서 바쁘고 예기치 않는 어려움을 만나고 苦를 받는다. 내가 나를 가린줄 알고 그 가린 것을 보아 깨달으면, 이미 나에게 있는 부처가 드러난다. 그 마음이 선심이고 불심이다.

 

마음은 형상이 없는 것이어서 이름이 붙을 곳이 없는 것이다.  못 깨들은 이에게도 있고, 깨달은 이에게도 있는 것이 불성의 성질이다. 이 눈을 임제 스님은 천수안중에 있는 정안正眼이라고 한다. 이 정안을 놔두면 천개의 눈이 쓰이는 것 같이 많은 능력으로 나오지만 다시 거둬들이면, 그 크기가 작아서 바늘을 꽂을 땅도 못 찾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눈의 주인이 관자제보살이다. 불자에서는 이를 대자대비라고 한다. 보살은 깨닫는다는 마음이다. 관觀은 본다는 말이고, 세음細音은 세상에 나와 있는 소리이다. 소리가 나는 곳에 관음이 있다. 있지만 눈에는 안보인다.  우리의 눈이 현상에 마음이 가서 이 눈을 잊어버리고 산다.  이 눈을 갖는 사람은 처하는 곳마다 눈과 손에 지혜를 달고 나온다.  필요할 때마다 너 좋고 나 좋은 곳에 쓴다.

 

내가 날마다 말하고 듣는 곳에 있다. 그러나 그 뜻을 못 얻으면, 그 말은 스스로 죽어 있는 말이 된다. (아무리 좋은 말도, 세상 사는 답을 이야기 해도 그 뜻을 얻지 못하면 죽은 말이다) 빛깔을 따라다니는 신앙은 오나 가나 마음만 바쁘고 서두른다. 하는 일에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다는 그런 마음이 없다. '놔버리라'는 언어는 눈 밝은 스승이 믿어온 제자가 붙들고 있는 무거운 짐을 보고 있는 데서 온 말이다.  부처님은 말을 가르친 분이 아니다. 말은 뜻을 취하지 못하면, 불설도 죽은 말이 되고 만다. 불교를 배우라는 것이 아니다. '불교를 배워 내 마음을 믿어라'고 한 것이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 했다고 하면 중생을 제도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은 제도한 것이 잘못 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해야 보살이고, 그래야만 본래 있는 진리는 진리대로 살고, 다른 사람을 구제했다는 말을 품고 있는 것이 된다.